법거량(法擧量)을 보면서, 올바른 질문에 올바른 대답이
법거량이란?
법거량(法擧量)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스님들이 서로 갈고 닦은 실력에 대하여기량을 겨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거량에 대하여 현대불교신문에 따르면 인가(認可)를 중시하는 선종, 특히 화두참구로 깨달음을 얻는 간화선 수행전통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법거량은 일반적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뤄진다. 제자는 자신의 깨달음의 경계를 드러내고, 스승은 제자의 공부됨됨이를 점검한다. 또 이미 깨달음을 얻은 선사들은 깨친 법을 서로 확인하기도 한다. “ (현대불교신문 2005-02-11)라 하였다.
법거량에 대하여 또다른 말로 ‘선문답’이라고도 한다.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경계가 드러나고 기량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공부가 어느 정도 된 스님은 자신의 공부를 점검해 보기 위하여 유명선사를 찾아 뵙는다. 찾아 뵙고 알듯 모를듯한 질문을 던진다.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하여 상대방을 기량을 알게 되는데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판단되면 요즘말로 ‘깨갱’하며 엎드린다. 그러면서 한 수 배운다. 반면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기면 이겼다라고 생각한다.
“구구는 삼십육이로다!”
법거량은 어떤 것일까? 유튜브동영상을 보면 2002년 해운정사에서 있었던 법거량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무차선대회는 이렇게 하는 것, 진제스님 국제무차선대법회 2002년 해운정사(2015-05-1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2002년 해운정사 국제무차선대회에서 어느 스님이 질문하였다. 그 스님은 진제스님에게 “필경 그 주장자는 항순마차는..”라고 물었다. 이에 진제스님은 “구구는 삼십육이로다!”라 하였다. 그러자 질문자는 “나는 스님의 답을 인정할 수 없어요”라며 “스님이 내게 물어 봐요”라 말한다. 이에 진제스님은 “그건 됐고.. 들어가, 들어가!”라고 말한다.
법거량을 보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다. 질문에 대하여 동문서답식이기 때문이다. 상근기가 아니면 알아 듣기 힘들다. 근기가 낮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코미디’하는 것처럼 보인다.
코미디 같은 질의 응답이 하나 더 있다. 어느 재가자가 삼배를 올리고 “부처와 중생과 마음이 차별이 없다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떻게 증명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진제스님은 “하하하, 차별이 없다 해도 삼십방을 맞아야 해!”라고 답하였다. 가지고 있는 주장자로 삼십방 맞을 질문했다는 것이다.
어느 선사와 법거량을 하였는데
한국불교는 선종의 전통에 기반한 것이다. 선종은 중국에서 발생한 종파로서 수행방식은 조사선이다. 그래서 한국의 스님들은 중국의 조사스님을 개조로 하는 중국식불교를 믿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식 불교를 조사불교 또는 조교라 한다. 그런데 선종스님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의견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언젠가 어느 스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선수행을 오랫동안 한 선사이었다. 그 스님과 마음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 스님은 오래 전에 ‘한소식’을 한 것 같았다. 스님은 젊은 시절 큰 스님을 찾아 다니며 자신의 공부를 점검 받았는데 법거량 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 스님에 따르면 큰스님 중에는 자신의 공부에 대하여 인정해 주는 스님도 있었다고 한다. 반면 질문의 요지도 파악하지 못하였다는 큰스님도 있었다고 하였다. 법거량을 해 보니 모든 것이 다 드러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간에 알려진 큰스님들의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런 스님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그 스님은 삭발에 먹물옷을 입었다. 대면한 당사자는 유발에 속복차림이다. 한편은 수행을 오랫동안 하였다는 선사이고, 또 한편은 오로지 초기경전에 의존하여 글만 쓰는 보통불자이다. 그런데 대화를 할 때 마다 핀트가 빗나가는 것이었다. 스님은 화두와 선수행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상대방은 경전을 근거로 하여 교학에 대하여 이야기 하니 자꾸 엇나가는 것이다.
스님과 대화를 하였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도 불교라는 카테고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하는 것은 있었다. 그런데 스님이 갑자기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흔히 선사들이 묻는 질문 방식이다. 이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답변을 못한 것이 아니라 답변을 하지 않은 것이다.
입만 벙긋하면 어긋난다
선어록에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는 말이 있다. 이 사자성어는 ‘입만 벙긋하면 어긋난다’는 뜻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선종에 따르면 ‘진리의 세계는 입을 열면 곧 참모습과는 어긋난다’는 뜻이다. 말로서 글로서 진리의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만 설명하면 할수록 팔만사천리나 멀어지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진실은 말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선사의 물음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 선사가 생각하기를 상대방이 답변을 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선사가 이겼다고 볼 수 있을까? 선사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무엇이냐?”고 되물었을 때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 선사가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왜 그런가? 질문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는 ‘무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질문과 동문서답
선사들의 법거량을 보면 특징이 있다. 하나는 역질문이고 또 하나는 동문서답이다. 역질문이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질문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음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대답에 답하지 않고 곧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은 무엇입니까?”라며 역질문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꼼짝 못하게 만든다. 만일 답을 하지 못하면 지는 것이다. 답을 해도 사량하고 분별한다고 하여 삼십방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하나는 동문서답이다. 묻는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엉뚱한 말이 답인 것이다. 질문에 답을 하면 사량분별한다고 하여 진리가 아니라 한다. 이는 누군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라고 물어 보았을 때 “똥막대기이니라.”라고 답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선종에서 법거량은 상근기를 가진 자들의 질의응답방식이다. 즉문즉답을 통해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어떤 알음알이도 끼여들 틈이 없이 치열하게 전개 된다. 때로 고함소리가 나오고 방망이질을 하기도 한다. 이런 행위가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1998년 백양사에서 열린 무차선대회때 법거량에 나선 한 스님이 재가불자에게 선문답 도중 뺨을 얻는 맞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삿짜까와의 대론에서
법거량은 선종에서만 있는 것일까? 초기경전에서도 법거량에 대한 이야기가 보인다. 그런데 부처님은 법가량에 있어서 달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대론’ 형식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상대방의 교리의 모순에 대하여 연기법적으로 논파하는 형식이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부처님과 자이나교도 ‘삿짜까’와의 대론이다.
경에 따르면 삿짜까는 기둥도 떨게 만든다고 하였다. 어떤 자라도 자신과 토론하여 이긴자가 업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무심한 기둥에다가 말을 걸어 논쟁을 해도 나와 토론하여 논쟁하면, 기둥도 떨고 전율하고 크게 감동 받을 것인데, 하물며 인간의 존재이랴.” (M35) 라 하며 자신만만했던 것이다.
부처님과 삿짜까와의 대론은 맛지마니까야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에 실려 있다. 부처님은 상주불멸하는 ‘자아’가 있다는 자이나교의 교리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M35) 라고 묻는 식으로 굴복시켰다.
부처님은 물질에 대하여 영원한지를 묻는다. 이렇게 묻는 목적은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해야 함을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자아론자에게 무아를 말씀 하였다. 그런데 무아사상이 이 세상에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고 어떤 가르침에서 들을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부처님만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금강과 같고 벼락과도 같은 무아의 가르침으로 기둥도 떨게 만든다는 외도 삿짜까를 굴복 시켰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 대하여
선종에서의 법거량과 부처님의 대론 방식을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선종에서는 역질문을 함으로써 꼼짝못하게 한다든지 동문서답식으로 깨우쳐 주려 하지만 부처님은 ‘연기법’적으로 설명하여 굴복시킨다. 그러나 부처님은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무기하였다.
어떤 외도가 부처님에게 물었다. 외도는 “세존이시여, 지각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지각과 자아는 다른 것입니까?” (D9)라고 넌지시 물은 것이다. 이런 질문에 부처님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부처님은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는 “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류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질문을 삼세에 걸쳐서 확장하면 “세계는 영원한 것입니까?”부터 시작하여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이 된다.
외도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였을 때 목적은 뻔하다. 외도가 자신의 견해를 감추어 두고 답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여 실책을 유도하려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답변을 유도하여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궁지로 몰아 넣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상을 논파하면 명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질문을 한 것이다.
외도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한 것은 “오물장과 같은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여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Smv.376) 라 하였다. 왜 오물장 같은 질문인가?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여 답도 없는 질문을 하여 궁지에 몰아 넣기 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습니까?”
인터넷시대에 오물장 같은 질문은 넘쳐난다. 대표적으로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 질문이다. 질문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유아임을 가정하여 질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아론을 가진자가 무아인데 윤회하눈 것이 모순임을 밝혀 내기 위하여 질문한 것이다. 그래서 오물장 같은 질문이라는 것이다.
오물장 같은 질문에 답을 하면 말려 드는 것이다.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계속 물어 봄으로써 궁지에 몰아 넣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지각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지각과 자아는 다른 것입니까?” (D9) 라든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자아를 기반으로 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무기한 것이다. 이는 선사가 역질문하여 “그렇게 말하는 그놈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어 보는 것과 같다. 자아를 기반으로 하여 질문하였을 때 질문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나를 찾는 다는 것은
부처님은 “세상은 무한한가?” “세상은 유한한가?” 류의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무기 하였다. 또 “나는 누구인가?” 라든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식의 질문은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 하였다. 이는 맛지마니까야에서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 모든 번뇌의 경이 있다. 번뇌를 야기 하는 일곱 가지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그 중에 자아에 대한 것이 있다. 그런데 자아에 대하여 탐구하는 것에 대하여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M2)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쓸데 없는 짓을 한다는 것이다.
쓸데 없는 질문이나 의문은 어떤 것일까? 이는 “그는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M2) 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나를 찾는 다는 것은 한마디로 쓸데 없는 질문이고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는 것이다.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취합니까?”
선종에서는 나를 찾자고 한다. 템플스테이 광고를 보면 “나를 찾아서”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이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M2) 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질문이다. 왜 그런가? 질문같지 않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에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처님 앞에서 어떻게 질문해야 할까?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의 제자 팍구나가 질문하였다. 팍구나는 “세존이시여,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취합니까?” (S12.12) 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다.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āhāretī'ti ahaṃ na vadāmi. Āhāretī'ti cāhaṃ vadeyya, tatrassa kallo pañho 'ko nu kho bhante, āhāretī'ti. Evañ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kissa nu kho bhante viññāṇāhāro'ti, esa kallo pañho.
“그런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섭취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사람이 섭취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섭취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Moḷiyaphaggunasutta-몰리야 팍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2, 전재성님역)
질문이 왜 잘못된 것일까? 이는 “나는 ‘사람이 섭취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āhāretī'ti ahaṃ na vadāmi)”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어떤 중생이나 개인도 자양분을 취한다고 말씀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팍구나가 네 가지 자양분을 섭취하는 자아를 상정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질문자체가 잘못된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Srp.II.31) 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무아를 설한 부처님은 어떻게 질문해야 바르게 질문하는 것이라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 ('kissa nu kho bhante viññāṇāhāro)”라고 묻는 것이 바른 질문이라 하였다. 이런 질문에 나나 중생 등으로 표현된 ‘자아’가 들어가 있지 않다. 그대신 ‘어떻게(kissa)’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문제는 자아이다. 자아가 있다고 보면서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취합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은 무아를 설하시는 부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질문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M2) 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일체 답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이것이 무엇인고?”라 하였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를 찾는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인다.” (M2) 라 하였다. 나를 찾는 수행은 결국 번뇌만 야기할 뿐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질문할 때 어떻게 라는 말을 넣어서 질문하라고 하였다. 이는 “나는 누구입니까?” 가 아니라 “어떻게 내가 여기 있게 되었습니까?”라는 식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아닌 연기법적 사유이다.
올바른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부처님은 팍구나가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취합니까?”라고 질문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이는 상주불변하는 자아가 있어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가정하고 질문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대신 “무엇 때문에 자양분이 생겨납니까?”라는 질문이 올바른 질문이라 말씀 하셨다. 이렇게 올바른 질문을 하였을 때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ti.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의 조건이고, 그것이 생겨날 때 여섯 가지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난다.”(전재성님역)
“알음알이의 음식은 내생에 다시 태어남[再生]의 발생이라 [불리는 정신-물질]의 조건이 된다. 그러한 [정신-물질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 여섯 감각장소가 있고,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다.”(각묵스님역)
The nutriment consciousness is a condition for the production of future renewed existence. When that which has come into being exists, the six sense bases [come to be] with the six sense bases as condition, contact. (빅쿠보디역)
(Moḷiyaphaggunasutta-몰리야 팍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2)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하였다. 네 가지 자양분을 섭취하였을 때 이는 재생의 조건이 됨을 말한다.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 하여 유아론적 관점에서 물어 보았을 때 답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떻게 여기 있게 되었는가?”라며 질문 하였을 때 질문이 성립한 것으로 보고 연기법적으로 답을 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조건이다.
부처님은 조건에 따른 연기법을 설하였다. 그래서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의 새로운 존재의 생성의 조건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이라 하였다. 여기서 조건이라는 말은 ‘paccaya’이다. 이는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행을 조건으로 식이 있고,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라고 하였을 때 그 조건이 빳짜야(paccaya)이다. 이렇게 식은 조건 지어진 것이다.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조건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무아(anatta : 無我)’라 한다.
모든 사견을 부수어버린 연기법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고정된 실체, 즉 자아가 있다고 하여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는 질문은 질문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오물장’ 같은 질문이다.
오물장 같은 질문에 답을 하면 상대방은 계속 물고 늘어질 것이다. 또 질문에 대하여 답하지 않고 ‘역질문’을 함으로써 꼼짝 못하게 만들것이다. 답을 하지 못하면 ‘이겼다’라 할 것이다. 따라서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할 필요가 없다.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무기’하면 되는 것이다. 그 대신 ‘어떻게(how 또는 what)’라는 말을 넣어 질문하면 연기법적으로 답을 하면 된다.
연기법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견도 논파된다. 이는 법거량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것과 다르다. 상근기의 수행자들에게는 역질문이나 동문서답식의 법거량이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경계가 드러나고 기량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일반사람들이 보기에는 한편으로 보면 말장난 같고 또한편으로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무아와 연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 어떤 견해도 논파 된다.
무아를 설하신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그 어떤 견해도 논파하였다. 그래서 부처님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 라 하여 상주불멸하는 자아가 있다고 보는 브라만의 ‘전변설’을 논파하였다. 또 부처님은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 하여 육사외도의 단멸론 ‘적취설’을 논파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무아와 연기로서 이 세상의 모든 사견을 부수어 버렸다.
2015-12-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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