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아침이 되면 꿈에서 깨듯이, 빠꾸다 깟짜야나의 7요소설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2. 20. 12:19

 

 

아침이 되면 꿈에서 깨듯이, 빠꾸다 깟짜야나의 7요소설

 

 

 

꿈을 꾸었는데

 

요즘 갈수록 게을러지고 있다. 여름철에는 일어나는 시간이 네 시대이었으나 지금은 여섯시대이다. 동지가 가까워 오며 밤의 길이가 점차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이유도 있고 날씨가 추워 꼼지락 거리기 싫은 이유도 있다. 더구나 일곱시대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는데 도중에 잠이 깼다고 다시 잠든 케이스에 해당된다. 이렇게 균형이 깨진채로 다시 잠에 들게 되면 꿈을 꾸게 된다. 대부분 좋지 않은 꿈이다.

 

늦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생계와 관련된 것이다.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는데 적응되지 못하여 쩔쩔매는 꿈이었다. 능력이 되지 않아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갑갑한 꿈을 꾼 것이다. 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 것이다. 결국 존재에 대한 문제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노후를 대비하여 돈을 모아 놓아야 한다. 자녀가 있다면 학비 등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현대인에게 능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돈 버는 능력이 되지 않았을 때 안정적인 직장이 없었을 때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런 불안이 잠재의식에 저장되어 있어서 꿈속에서 발현되면 갑갑한 꿈을 꿀 수밖에 없다.

 

꿈속에서 이것이 꿈이었으면 하는 때가 있다. 그럴 경우 정말 꿈이었던 때가 있다. 그러면서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러나 현실이 꿈속처럼 답답하다면 현실은 악몽과도 같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행복을 바라고 미래를 위하여 대비한다. 이렇게 생존을 위해 오직 앞으로만 나아 가다 보니 옆도 뒤도 되돌아 볼 여유가 없다. 그런데 생존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어떠할까? 아마 현실이 악몽과도 같을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꿈은 게을러졌을 때 생생하게 나타나고 그것도 악몽인 경우가 많다. 만약 부지런하고 바쁘게 살아 간다면 꿈꿀 시간적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 꿈은 어떻게 묘사 되어 있을까?

 

앙굿따라니까야 커다란 꿈의 경(A5.196)

 

초기경전에서는 꿈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 아마 부처님이 현실적 가르침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그렇다고 하여 꿈에 대한 경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커다란 꿈의 경이라 하여 꿈을 제목으로 한 유일한 경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예전에 아직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커다란 땅은 그의 커다란 침상이었고, 산의 제왕 히말라야산은 그의 베게 였고, 동쪽바다에는 그의 왼손이 놓였고, 서쪽바다에는 그의 오른 손이 놓였고, 남쪽바다에는 그의 양발이 놓였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예전에 아직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커다란 꿈이 나타났다.

 

(Mahāsupina sutta-커다란 꿈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96,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보살로 있었을 때 꾼 꿈이다. 모두 다섯 이야기가 소개 되어 있다. 가장 먼저 꾼 꿈이 커다란 땅과, 히말라야산,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땅과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스케일이 매우 큰 꿈이다. 이어지는 꿈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띠리야라는 풀의 종류가 그의 배꼽에서 솟아서 천공에까지 이르렀다.”

흰 벌레들이 검은 머리를 했는데 발에서 기어올라 무릎까지 덮었다.”

네 마리의 다양한 색깔을 띤 새가 사방에서 와서 발 아래 떨어져 모두 흰색으로 변했다.”

똥으로 이루어진 산을 아주 높이 올라가면서 몸에 똥을 묻히지 않았다.”

 

 

부처님은 모두 다섯 가지 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주석에 따르면 이와 같은 꿈은 오직 일체지를 가진 보살 한 분만이 꿀 수 있다고 하였다.

 

네 가지 종류의 꿈이 있는데

 

사람들은 매일 꿈을 꾸고 있다. 꿈은 어떤 메시지나 징조와 관련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주석에서는 꿈을 네 가지 종류로 분석하고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Mrp.III.316에 따르면, 네 가지 종류의 꿈이 있다. 첫 번째 종류의 꿈은 담즙, 점액, 바람에 의해서 야기 되는 것으로 산에서 떨어지거나 공중을 날거나 맹수에 쫓기는 꿈을 꾼다. 두 번째 종류의 꿈은 과거의 인상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된다. 세 번째는 선하거나 악한 영혼에 의해 야기된다. 네 번째가 징조의 꿈이다. , 보살의 꿈과 같은 꿈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 꿈은 사실이 아닌 꿈이고, 세 번째 것은 지금까지는 사실인 꿈이고, 네 번째 것은 지금까지는 사실이 아닌 꿈이다.

 

(481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을 보면 꿈의 종류에 대하여 네 가지로 분류해 놓았다. 이런 분류방식은 현대인의 꿈속에서도 확인 된다. 그런데 주석에서는 사실이 아닌 꿈에 대하여 첫 번째와 두 번째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류로 보인다. 내용상 사실이 아닌 꿈은 첫 번째와 세 번째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주석의 오류인지 아니면 전재성님의 편집상 실수 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두 두 번째 종류의 꿈은 과거의 인상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된다.” 라 하였을 때 이는 사실에 대한 구성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일이 무의식속에 저장 되어 있다가 꿈으로 발현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네 번째 것을 보면 징조의 꿈이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지금까지는 사실이 아닌 꿈이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나중에 사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꿈에는 예지능력이

 

꿈에는 예지능력이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해몽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경을 근거로 하여 대비시켜 놓으면 다음과 같다.

 

 

1. 보살의 첫 번째 꿈

커다란 땅은 그의 커다란 침상이었고, 산의 제왕 히말라야산은 그의 베게 였고, 동쪽바다에는 그의 왼손이 놓였고, 서쪽바다에는 그의 오른 손이 놓였고, 남쪽바다에는 그의 양발이 놓였다.” 이 꿈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곧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에 대한 꿈이다.

 

2. 보살의 두 번째 꿈

띠리야라는 풀의 종류가 그의 배꼽에서 솟아서 천공에까지 이르렀다.”이 꿈은 고귀한 여덟 가지 길(팔정도)을 곧바로 원만히 깨달아 신들과 인간들에게 잘 설명하는 꿈이다.

 

3. 보살의 세 번째 꿈

흰 벌레들이 검은 머리를 했는데 발에서 기어올라 무릎까지 덮었다.” 이 꿈은

많은 힌옷을 입은 재가의 신도들이 부처님에게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함을 암시하는 꿈이다.

 

4. 보살의 네 번째 꿈

네 마리의 다양한 색깔을 띤 새가 사방에서 와서 발 아래 떨어져 모두 흰색으로 변했다.” 이 꿈은 네 가지 계급, 즉 왕족, 바라문, 평민, 노예가 있는데, 그들은 부처님이 설한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위없는 해탈을 실현한다는 꿈이다.

 

5. 보살의 다섯 번째 꿈

똥으로 이루어진 산을 아주 높이 올라가면서 몸에 똥을 묻히지 않았다.” 이 꿈은 부처님이 옷과 탁발음식과 와좌구와 필수약을 얻지만, 부처님은 거기에 묶이지 않고, 정신을 잃지 않고, 탐착하지 않고, 유혹을 보고, 여윔의 지혜를 갖추어 그것을 수용한다는 꿈이다.

 

 

이와 같은 꿈은 오로지 일체지를 지닌 보살 한 분만이 꿀 수 있다고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첫 번째 꿈에서 커다란 땅은 그의 커다란 침상인 것은 부처님이 될 징후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하였다. 또 산의 제왕 히말라야 산이 보살의 베게 이었던 것은 일체지자가 될 징후이었고, 동쪽바다에 보살의 왼손이 놓이고, 서쪽 바다에 보살의 오른손이 놓이고, 남쪽바다에 보살의 양발이 놓였던 것은 불퇴전의 법륜을 굴리는 자가 될 징후라 하였다.

 

부정적으로 묘사된 꿈

 

초기경전에서 꿈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는 편이다. 아마 현실적인 가르침을 중시하는 불교에서 꿈과 관련된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서는 “혹은 어떤 존귀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신자들이 보시한 음식을 향유하면서 이와 같이 예를 들어, 수족에 의한 점괘, 전조에 의한 점괘, 조짐에 의한 점괘, 해몽,…” (D2.52) 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재가자의 보시에 의존하는 수행자가 꿈해몽과 같은 일로 또 다시 재가자를 대상으로 하여 이익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꿈에 대한 비유는 거의 대부분 부정적인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 늙음의 경(Sn4.6)’에서 꿈속에서 만난 사람을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다시 볼 수 없듯,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나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습니다.” (stn807) 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또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M22)’에서는 꿈에 대하여 감각적 욕망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이는 뽀딸리야의 경(M54)’에서 “장자여, 한 사람이 아름다운 정원, 아름다운 숲, 아름다운 초원, 아름다운 호수를 꿈을 꾸면서 보다가 꿈이 깨면,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M54) 형태로 설명되고 있다.

 

일곱 가지의 꿈, 칠백 가지의 꿈이 있는데

 

이렇게 부정적으로 묘사된 꿈은 육사외도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활용되기도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알 수 있다.

 

[세존]

싼다까여, 이러한 것에 대하여 현명한 자라면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이 스승은 이와 같이 ‘이 일곱 가지 세계는 만든 것이나 만들게 한 것이 아니고 창조된 것이거나 창조하게 한 것이 아니고 생겨나지 않았으나 견고해서 석녀와 같고 산봉우리와 같이 서있고 기둥처럼 단단하여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서로 핍박하지 않는다. 서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 조금도 없다.

 

무엇을 일곱 세계라고 하는가? 땅의 세계, 물의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 괴로움의 세계, 즐거움의 세계, 목숨의 세계이다. 이 일곱 가지 세계는 만든 것이나 만들게 한 것이 아니고 창조된 것이거나 창조하게 한 것이 아니고 생겨나지 않았으나 견고해서 석녀와 같고 산봉우리와 같이 서있고 기둥처럼 단단하여 움직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서로 핍박하지 않는다. 서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 조금도 없다. 누구든지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잘라도 그 목숨을 빼앗을 수 없고 오로지 그 칼이 일곱 요소 사이의 간극을 통과한 것뿐이다.

 

또한 백 사십만의 생류를 비롯해서 칠백 다시 육백의 생류가 있고 오백 업류, 오 업류, 삼 업류가 있고 거기에는 하나의 완전한 업과 그 절반의 업이 있다. 예순두 가지의 업도가 있고 예순두 주기의 겁이 있고 여섯 가지의 인종이 있고 여덟 가지의 인간의 지위가 있고 사천 구백 종류의 사명외도가 있고 사천 구백 종류의 출가자가 있고 사천 구백 종류의 이름을 지닌 용의 족이 있다.

 

이천 가지의 감각능력이 있고 삼천 가지의 지옥이 있고 서른두 가지의 티끌세계가 있고 일곱 가지의 의식의 모태가 있고 일곱 가지의 무의식의 모태가 있고 일곱 가지 마디의 모태가 있고 일곱 가지 신들이 있고 일곱 가지 인간들과 일곱 가지 아귀, 일곱 가지의 호수, 일곱 가지의 매듭, 일곱 가지의 절벽, 칠백 가지의 절벽이 있으며, 일곱 가지의 꿈, 칠백 가지의 꿈이 있는데, 팔백 사십만 대우주기 사이에 어리석은 자도 슬기로운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에 이른다. 내가 이러한 계행이나 금계나 고행이나 청정행으로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고 이미 익은 업을 감내하여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에게 부과된 윤회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끝나거나 증가하거나 감소되거나 더하거나 덜함이 없다. 예를 들어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똑같이 그들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다할 때까지 윤회한다.’라는 이론을 갖고 있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만약에 이 스승의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의 의무를 다한 것이 되며,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산 것이 된다. 스승과 나는 동일하며, 우리 둘은 모두 같은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는 ‘스승과 나 둘 다 똑같이 유전하고 윤회하다가 마침내 괴로움을 끝내게 된다.’라고 설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 스승이 지나치게 벌거벗고, 빡빡 깎고, 웅크리고, 머리와 털을 뽑고 다니는 것은 쓸 데 없는 짓이다. 비록 내가 아이들로 북적이는 집에서 살고 까씨 국의 전단향을 사용하고, 꽃다발과 향료와 크림을 사용하고, 금은을 향수하더라도 내세에는 이 스승의 운명과 동일한 곳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이 스승 밑에서 그러한 청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무엇을 알고 또한 무엇을 보아야한단 말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것이 청정한 삶을 부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러한 청정한 삶을 싫어하여 떠납니다. 싼다까여, 이것이 그 세상에 존경받는 분, 아는 분, 보는 분, 거룩한 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께서 설하신 청정한 삶을 부정하는 네 번째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속에서는 현명한자라도 노력하여 청정한 삶을 이룰 수 없고 혹은 이루더라도 착하고 건전한 올바른 진리를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Sandaka sutta-싼다까의 경, 맛지마니까야 M76, 전재성님역)

 

 

 

samsara

 

 

육사외도중에서 빠꾸다 깟짜야나의 사견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꿈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것은 일곱 가지의 꿈, 칠백 가지의 꿈이 있는데라는 표현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그러나 Hda.251에 따르면, 꿈이라는 것은 영혼의 최종적 해탈 이전에 전개되는 꿈의 상태를 말한다.”(1324)라 하였다. Hda.251가 어느 주석서인지 알 수 없다. 초불연에서는 이 꿈에 대한 구절에 대한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빅쿠보디의 MDB에서도 역시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빠꾸다 깟짜야나는 도덕부정론자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일곱 가지의 꿈와 칠백 가지의 꿈에 대하여 영혼의 최종적 해탈 이전에 전개되는 꿈의 상태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본문에 아직 익지 않은 업을 익게 하고 이미 익은 업을 감내하여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초불연 주석을 보면 기간이 정해져 있는 윤회에서 현명한 사람에게는 윤회가 단축되거나 어리석은 자에게는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MA.iii.233) 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윤회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청정범행을 별도로 닦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칠요소로 구성된 존재는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관계 없이 때가 되면 누구나 해탈하여 윤회를 끝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운명론이다.

 

이와 같은 빠꾸다 깟짜야나의 견해에 대하여 절대적 도덕부정론을 주장한 자라 하였다. 왜 도덕부정론자인가? 이는 본문에서 누구든지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잘라도 그 목숨을 빼앗을 수 없고 오로지 그 칼이 일곱 요소 사이의 간극을 통과한 것뿐이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빠꾸다 깟짜야나의 7요소설에 따르면 7요소는 마치 석녀처럼 불생산이며 움직이지 않는 등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끼지치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론에 따르면 만약 누군가 칼로 머리를 잘라도 아무도 누구의 생명을 앗아 간 것이 아니며 단지 7요소 사이를 따라 칼이 통과하는 것일 뿐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 어떤 도덕적으로 금하는 행위도 무용지물이 된다. 그래서 디가니까야에 따르면 빠꾸다 깟짜야나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노략질 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D2.18) 라고 주장 하였다.  오계를 부정한 것이다.

 

유물론적 7요소설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빠꾸다 깟짜야나는 유물론적 7요소설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7요소는 본문에서와 같이 땅의 세계, 물의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 괴로움의 세계, 즐거움의 세계, 목숨의 세계이다. (pahavīkāyo āpokāyo tejokāyo vāyo kāyo sukhe dukkhe jīve sattime.)”(M76)  라 하였다.

 

여기서 땅의 세계는 ‘pahavīkāyo’를 번역한 것이다. pahavīkāyo‘pahavī(the earth) +kaya(group 또는body)’의 뜻이다. 이는 kaya에 대하여 축적된 의미로서 그룹의 개념으로 보아 세계라 번역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일곱가지에 대하여 ‘sattime kāyā’라 하여 일곱가지 세계라 하였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을 보면 일곱 가지 몸들이 있나니라 하여 kaya에 대하여 신체를 뜻하는 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7요소에 대하여 땅의 몸, 물의 몸, 불의 몸, 바람의 몸, 즐거움, 괴로움, 그리고 일곱번째로 영혼이다.”라 번역하였다. 이는 빅쿠보디의 MDB에서 “There are these seven bodies”라 하며 “They are the earth-body, the water-body, the fire-body, the air-body, pleasure, pain, and the soul as the seventh.”라고 번역한 것과 일치한다.

 

적취설이란?

 

육사외도 빠꾸다 깟짜야나의 ‘7요소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적취설이라 한다. 적취설은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일체 모든 존재의 구성요소인 지수화풍 혹은 지수화풍을 포함한 다수의 실재가 이합집산을 통하여 일체의 모든 존재를 형성한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한편 전변설이 있다. 이는 브라만교의 대표적 교설이다. 이는 유일의 실재인 브라흐마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일부를 분리하는 자기생식을 통하여 잡다한 일체의 만물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창조론과 유사한 것이다.

 

빠꾸다 깟짜야나는 ‘7요소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지수화풍 4요소에다 고, , 생명 3요소를 추가한 것이다. 만물이 지수화풍 4요소의 이합집산이긴 하지만 여기에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독립상주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현상을 관장하는 생명 또는 영혼의 개념인 jīva를 요소로 넣은 것이다. 그런데 이 jīva는 불생불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칼로 머리를 잘라도 그 목숨을 빼앗을 수 없고 오로지 그 칼이 일곱 요소 사이의 간극을 통과한 것뿐이다.”라 하였을 것이다.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7요소설에 따르면 누구나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재생이 되는 업을 짓지 않아야 하고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7요소설에 따르면 업과 청정한 삶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때가 되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윤회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예를 들어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M76) 이라 하였다.

 

실타래를 던지면 실과 함께 굴러간다. 그러다 동력이 상실되면 멈추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즐거움이나 괴로움은 할당되어 있고 또한 정해진 기간이 있어서 때 가 되면 어리석은 자나 현명한 자나 윤회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음을 말한다. 굳이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청정한 삶을 사는 등 도덕적 삶을 살 필요도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실타래는 다 풀리지 않고 가다가 멈출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실이 풀리면서 계속 굴러가다가 실이 다하는 곳에서 멈추고 더 이상 굴러가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설명한 기간보다 더 오래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MA.iii.233) 라고 하였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때가 되면 윤회가 끝남을 말한다.

 

빠꾸다 깟짜야나의 ‘7요소설에 따르면 우리가 도덕적 삶을 살 필요가 없다. 업을 소멸하기 위한 청정범행을 닦을 필요도 없다. 현명한자나 어리석은 자나 실타래가 굴러가다 멈추는 곳이 윤회가 끝나는 지점이다. 그런데 이를 꿈의 비유에 적용할 수 있다.

 

아침이 되면 꿈에서 깨듯이

 

꿈을 꿀 때 깨고 나면 꿈인 줄 안다. 그런데 누구나 꿈을 꾼다는 사실이다.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꿈을 꾼다. 그런데 꿈에서 깨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듯이 꿈이 깨면 일어나는 것이다.

 

그가 비록 일곱 가지의 꿈, 칠백 가지의 꿈을 꾸어도 아침이 되면 일어난다. 이는 실타래가 굴러가다 멈추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경에서는 일곱 가지의 꿈, 칠백 가지의 꿈이 있는데, 팔백 사십만 대우주기 사이에 어리석은 자도 슬기로운 자도 유전하고 윤회한 뒤에 괴로움의 종극에 이른다.” (M76) 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굳이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마치 아침이 되면 꿈에서 깨어 일어나듯이 누구나 때가 되면 윤회를 끝낼 수 있음을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간다고

 

빠꾸다 깟짜야나의 ‘7요소설은 대표적 사견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당시에는 민중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만약에 이 스승의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의 의무를 다한 것이 되며, 청정한 삶을 살지 않아도 산 것이 된다.”라 하였다. 이런 삿된 견해를 인정할 수 없음을 말한다.

 

빠꾸다 깟짜야나의 ‘7요소설은 부처님 당시만 있었던 사상일까? 오늘날에도 유사한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여기서 돌아간다라는 것에 대하여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다시 생명체로 태어났을 때 사대의 결합으로 본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돌아간다라는 말을 자연스롭게 받아 들인다. 바로 이 돌아간다라는 말이 육사외도의 적취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2015-12-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