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견해 에고(ego:自我)와 참나(眞我)
빗나간 견해
사견을 개인적인 생각 또는 빗나간 견해라 한다. 빠알리어로는 딧티(diṭṭhi)라 한다. 영어로는 ‘view, belief, speculative opinion’의 뜻이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딧티는 ‘it mostly refers to wrong and evil view or opinion’라 설명되어 있다. 대부분 악하고 불건전한 견해를 말한다. 반면 바른견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것은 모두 ‘딧티’라 볼 수 있다.
불교인 중에서도 사견을 믿는 자들이 많다. 특히 스님들 중에서도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을 말한다. 대승의 가르침이라도 원음에 어긋나면 딧티, 사견이 된다. 대표적으로 ‘참나’를 들 수 있다.
부처님은 참나, 즉 진아에 대하여 말씀 하신 적이 없다. 개아라 볼 수 있는 ‘아뜨만’을 부정하신 부처님께서 진짜 나라고 말하는 ‘참나’를 말할 리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 스님들은 법문할 때 참나, 진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참나, 진아와 유사한 말이 불성, 본래불, 주인공 등과 같은 말이다. 모두 여래장 계열 사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힌두교와 유사하고, 심지어 기독교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궁극적 실재’와 같은 맥락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빗나간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참나의 아바타라고
부처님은 무아를 설하였다. 그럼에도 개아가 있고 진아가 있다고 말한다면 외도라 볼 수 있다. 이는 유튜브동영상에서 확인 된다. 참나를 키워드로 하여 검색하여 보니 식생활전문강사 K님의 동영상강좌를 볼 수 있었다.
K님의 동영상 ‘참나와 에고의 합일1’따르면 우리는 참나의 아바타라 한다. 우리 안에 참나의 영혼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크라’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에고를 통해서 참나를 깨닫게 되고 공부하게 된다고.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우주를.. 내가 경험해야 하나님세계가 커진다고.”라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에고’와 ‘참나’이다. 에고는 자아를 말하고 참나는 진아를 말한다. 전형적인 ‘힌두교’ 교리에 대한 것이다.
참나를 찾는 명상수행프로그램
또 한편의 동영상을 보았다. ‘자운선가’ 동영상이다. 불교식이지만 불교는 아니다. 그런데 강연을 하는 것을 보면 ‘깨달음’이니 ‘알아차림’이니 하는 불교용어가 등장한다. 여성강사가 진행하는 ‘[자운선가]Meditation# 참나를 알려면 가짜 나를 먼저 알아야’를 보았다.
동영상에서 젊은 여성강사는 마음공부하는 것에 대하여 “참나를 찾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그러면서 이 길 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나를 만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강사는 “깨닫기 전에 참나를 절대 알 수 없다.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가짜나를 계속 버리는 것. 몸바탕을 근원을 이루는 참나가 탁 드러나요. 그렇게 해서 밖에 알 수 없는 거에요.”라 하였다.
참나를 만나는 구체적 방법은 알 수 없다. 개인상담이나 수련을 받아 보아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수련에 대하여 ‘고액’이라 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스터’가 상담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 혼자 찾는 것은 어렵고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린다.”라고 하였다.
여성강사는 말이 청산유수와 같다. 막힘이 없이 매우 빨리 말한다. 수련원에서 강연한 것을 올려 놓은 것이다. 참나를 찾는 명상수행프로그램이라 볼 수 있다.
선정에 들어야 참나를 만날 수 있다는데
참나와 관련하여 ‘홍익학당’ 윤홍식님의 동영상 ‘윤홍식의 철학힐링 - 참나와 함께 하는 삶’을 보았다. 유튜브에서 윤홍식님의 동영상이 천 개가 넘게 있다는데 그 중에 참나에 대한 것을 보았다. 윤홍식님은 “영혼이 에고 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생명체는 영혼을 자기가 관리 해야 합니다.”라 하였다. 영혼, 즉 에고 또는 자아가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에고를 인정해야 참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홍식님은 참나에 대하여 “여러분 영혼을 구제하려면 첫번째로 여러분 안에 때묻지 않은 나, 순수한 내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라 하였다. 그런 참나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참나를 알면 너무 좋거든요. 희로애락이 요동하다가 고요한 평온한 상락아정의 영원하고 걱정이 없고 물들지 않는 순수한 상태에 들어가니까 너무 좋아서 여기 멈추어 버립니다. 도피만 할 수 있지 영혼이 구제 안되요.”
윤홍식님이 생각하는 참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정상태에서 상태를 말한다. 이는 “불교는 선정에 들어야 참나를 만납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선정상태에서 아는 마음을 참나로 참나로 본 것이다.
그런데 윤홍식님의 참나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재와 같은 개념으로 본다. 그래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우주는 참나로부터 나왔다.”라든가 , 또 “우리 인생과 우주의 주재자인 참나를 지금 이순간 직접 대면하는 것이 바로 참나에 대한 최고의 기도이자 예배”라 하며 심지어 “이게 아버지를 뵙는 최고의 예배이고 경배이지요.”라 한다. 기독교 유일신교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참나체험 하는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고
참나를 키워드로 검색하여 보니 반드시 에고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에고는 자아로서 가짜 나라고 하며 참나는 진아로서 진짜 나라고 한다. 그래서 가짜 나를 버리고 진짜 나를 찾자고 한다. 전형적인 힌두교 교리이다. 그런데 힌두교 교리는 스님들의 법문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에 ‘성담스님’ 동영상이 널려 있다. 참나에 대한 것을 보니 “참나 체험은 아주 쉽습니다. 1분이 안걸립니다. 즉각체험가능합니다.”라 하였다. 참나 체험은 어떤 것일까?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몰라 해서 멈추었는데 여전히 딱 보고 있는 것이 있죠? 체험이 되세요? 몰라 했는데 여전히 보고 ‘아는’무언가가 딱 있다. 제가 1분만에 여러분을 참나를 체험을 못시킨다 그러면 땡이야 땡.”
성담스님은 참나체험 하는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의 행위를 지켜 보는 아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을 아는 마음을 또 아는 마음을 말한다. 이것을 참나라 한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선종계통의 스님들로 많이 듣는다.
지켜 보는 놈이 있다고
혜민스님은 각종 기고문과 자신의 블로그에서 ‘아는 놈’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래서 “그런데 생각이 막 떠올랐을때 우리 안에 무언가가 ‘아! 지금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안다.”라 하였다. 대상을 아는 마음을 또 아는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그러면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알아챘을까?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아는 것은 또 다른 생각인가? 아니면 생각 이전의 뭔가 다른 놈이 알아채는 것인가? 한번 가만히 들어다보자.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놈'이 무엇인가?무엇이 알아채나?”(부처자리, 휴심정 2012-12-26)라 하였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보는 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혜민스님은 그 놈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놈’이나 ‘그분’이나,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2011-12-16)’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청화스님이 언급한 요한복음
혜민스님이 말하는 그놈은 참나를 말한다. 이는 윤홍식님이 말하는 참나와 같은 개념이다. 지켜 보고 있는 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켜 보는 나는 불교나 기독교에나 모두 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종스님들은 기독교에는 신성이 있고 불교에는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나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청화스님 법문에서도 확인 되었다.
작고하신 청화스님의 법문이 유튜브에 ‘청화큰스님 MBC 일요특강 참나의발견정안’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스님은 동영상에서“우리인간성의 본질인 진여불성자리, 하나님자리가 분명히 확신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 공덕을 무엇으로도 대체 할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청화스님이 말하는 진여불성이란 참나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자리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진여불성, 참나, 하나님은 모두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신학자인 오강남교수는 불교평론에서 하느님과 참나는 같은 것이라 하였다.
청화스님은 진여불성과 하나님이 같은 개념이라 보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로 확인 된다.
“요한복음과 같은 대목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를 믿든 또는 다른 종교를 믿든 절대로 적대시 하면 안됩니다. 본래 둘이 아닌 것인데 나누고 본래 마귀가 아닌데 마귀라고 생각할 때는 그 때는 우리가 큰 허물을 범합니다.”
청화스님은 ‘요한복음’을 언급하였다. 왜 바이블 구절을 언급하였을까? 이는 바이블 구절에 참나와 관련하여 놀라운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진여불성, 참나, 하나님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요한복음 1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2.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지음을 받은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그분 없이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4.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엣 빛을 발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6.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7. 요한은 그 빛에 대해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8. 요한 자신은 그 빛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에게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온 것이었습니다.
9. 참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10. 참빛이 되신 말씀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는데도, 그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11. 그분은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13. 좋은 가문에 태어난 사람들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의 계획이나 바람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조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영광은 오직 아버지의 독생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15. 요한이 그분에 대해서 증언하며 외쳤습니다.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하시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바로 내가 말한 그분이다."
16. 그분의 충만하신 것에서 우리 모두는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17. 그것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18.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곁에 계시던 독생자이신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바이블 요한복음 1장에서 ‘그분’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빛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분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마치 진제스님이 말하는 “부모 몸에 들기 전에 어느 것이 참나인가?(父母未生煎 本來面目)”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분은 빛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어느 비구니 스님이 빛이 불성과 같다고 하였는데 일맥상통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청화스님은 진여불성을 설명하면서 “요한복음과 같은 대목이 굉장히 많습니다”라 하였다.
일묵스님의 대념처경 강좌에서
바이블의 그분이나 하나님, 대승불교의 진여불성이나 참나는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선종스님들은 기독교와 불교가 둘이 아니라고 한다. 기독교에는 사람 내부에 신성이 있고, 불교에는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둘이 아니라면 합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참나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것이 ‘에고’라는 말이다. 여기서 에고는 ‘영혼’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불교에서는 ‘자아’라 한다.
불교에서는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참나도 부정된다. 그렇다면 왜 대승과 선종스님들은 참나가 있다고 할까? 특히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보는 참나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의 유튜브동영상 대념처경을 보면 사견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참나는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나는 삿된 견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묵스님은 대념처경 강좌에서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사견은 ‘마음이 곧 자아이다.’라고 보는 거에요. 지금 이 사띠비구가 한 것이 그런 거구요. 이 마음 자체가 나다 이렇게 보는 것이 첫 번째 사견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조건에 의해서 생멸하는게 아니라 마음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지는 실체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일묵스님, 대념처경 11강)
일묵스님에 따르면 마음을 자아라고 보는 것은 ‘사견’이라 하였다. 이는 선종스님들이 마음을 자아라고 보거나 참나라 하는데 사견이라 볼 수 있다.
마음이 자아라는 등식은 부처님 당시 제자인 사띠비구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자아로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마음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 개념의 자아와 궁극적 실재라는 진아 개념이 성립된 것이다.
왜 참나라고 착각하는가?
사람들은 왜 참나가 있다고 보는 것일까? 윤홍식님 등을 비롯한 외도들의 동영상에서도 심지어 성담스님과 청화스님의 동영상에서도 지켜 보는 마음, 근원이 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통 수행하시다 보면 그런 분들이 있어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아는 마음이 또 뒤에 있는 거죠. 보통 지켜보는, 위빠사나에서는 지켜 보는 마음이라 표현합니다. 그러면 앞에서 마음이 막 변하는데 이것을 지켜 보는 마음이 있으니까 ‘아, 이게 바로 나구나’ ‘이게 바로 진아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묵스님, 대념처경 11강)
이 강좌는 일묵스님의 대념처경 중에서도 ‘심념처’에 대한 것이다. 심념처는 대상을 보는 마음을 또 보는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심념처에 대하여 ‘마음보는 수행’이라 한다. 그런데 지켜보는 마음에 대하여 진아 또는 참나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묵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 지켜 보는 마음도 아까 말했듯이 앞에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면 그 뒤에 마음이 이를 기억해서 아는, 역시 생멸하는 마음의 한 형태라 이거죠. 그게 어떤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 마음이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에 마치 변하지 않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지켜보는 마음 이런 것을 ‘나’라고 ‘진아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전형적인 사견의 한 형태입니다.
(일묵스님, 대념처경 11강)
지켜 보는 마음은 수행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앞의 마음을 뒤의 마음이 아는 것이다. 다름 아닌 ‘사띠’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도들이나 선종스님들은 이를 착각하여 본래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전형적인 사견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사견에 대한 이야기는 초기경전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아는 마음을 참나라고 착각하는 사견에 대하여 찾아 보았다. 초기경전 이곳 저곳에서 발견된다.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작은 경(M44)’에서 비싸카가 “개체가 있다는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담마딘나빅쿠니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viññāṇaṃ attato samanupassati,
viññāṇ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smiṃ vā attānaṃ.
“그는 의식을 자아로 여기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Cūḷavedalla sutta- 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님역)
색수상행식 오온 중에 의식(viññāṇ)에 대한 것이다. 의식에 대하여 모두 네 가지 사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오온에 모두 적용하면 20가지 사견이 된다. 이런 사견에 대하여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이라 한다. 개체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유신견을 가지면 성자가 될 수 없다. 만일 누군가 참나를 이야기한다면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하였어도 아무리 고위직이라 하여도 범부에 불과하다. 유신견이 타파 되지 않는 한 성자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이다. 일묵스님은 네 가지 사견에 대하여 예를 들어 가며 설명하였다.
마음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사견
첫 번째 사견은 “의식을 자아로 여긴다. (viññāṇaṃ attato samanupassati)”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 번째는 마음과 자아를 동일시 하는 거죠. 마음과 자아가 같은 것이다. 이건 비유를 하자면, 등이 있고 빛이 있어요. 등하고 빛을 구분할 수 있어요 없어요? 등이 있어야 빛이 나는 거고 빛은 또 부분이잖아요. 등과 빛이 같은 건데 작용이 다른 것이라 볼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 ‘마음과 자아가 동일한 것이다’ 마음이 곧 자아다’ 이렇게 보는 것이 첫 번째 사견으로 봅니다.”
(일묵스님, 대념처경 11강)
마음과 자아를 동일시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몸을 자아로 보는 것, 느낌을 자아로 보는 것, 지각을 자아로 보는 것, 형성을 자아로 보는 것도 해당된다. 그런데 ‘등불과 빛의 비유’를 들었다. 등불이 있어야 빛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있어야 자아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비유는 주석에 설명되어 있다.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나꿀리삐따경(S22.1)’ 주석에 따르면 마음과 자아를 동일시 하는 것에 대하여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는 물질과 자아를 구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마치 등불의 불꽃과 색깔을 구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36번 각주)라 하였다. 주석에서는 물질을 예로 들었지만 그대로 마음(식)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을 자아라고 관찰하고는 마음과 자아를 구별할 수 없다”라고 보는 사견을 말한다.
마음을 등불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자아를 빛으로 비유하였다. 등불이 있는 곳에빛이 있듯이 마음과 자아는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참나에 대하여 빛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 비구니 스님은 불교방송 진행할 때 치유의 기도라는 메시지를 방송 때 마다 낭송하였다. 이를 ‘정목스님의 ‘치유의 기도’와 불성(佛性)(2010-11-2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J스님은 기도문에서 “불성의 밝고 투명한 빛 속에 녹아 들게 하소서.”라 하였다. 불성을 빛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빛은 명상중에 나타나는 ‘니밋따’를 연상케 한다.
마음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사견이다. 이는 외도에게서도 볼 수 있고 참나 또는 불성을 말하는 선종스님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마치 등불과 빛의 관계처럼 마음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것은 사견이다. 이것이 첫 번째 사견이다.
자아가 마음을 소유한다는 사견
두 번째 사견은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긴다. (viññāṇavantaṃ vā attānaṃ)”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두 번째는 자아가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 비유를 들면, 나무에 새가 있는데 새의 그림자가 나오죠. 이 그림자는 이 새의 소유라고도 할 수 있죠. 자아가 있고 그 자아의 그림자처럼 자아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형태가 있다는 겁니다.”
(일묵스님, 대념처경 11강)
이 설명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는 물질이 아닌 것을 자아라고 간주하여 이것이 물질(몸)을 가지고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마치 나무가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36번 각주)라 하였다.
나무와 그림자의 비유는 무엇을 말할까? 마음을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그림자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나무가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
그림자는 늘 따라 다닌다. 햇볕이 날 때 아무리 도망가려 해도 그림자는 끝까지 따라 온다. 그래서 마음을 그림자로 본 것이다. 자아가 있으면 마음도 항상 따라 다님을 말한다. 이를 두 번째 사견이라 한다.
자아안에 마음이 있다는 사견
세 번째 사견은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긴다. (attani vā viññāṇaṃ)”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세 번째는 자아안에 마음이 있다고 보는 거죠. 자아라는 바탕에서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게 세번째 사견입니다. 이거는 꽃의 비유로 설명됩니다. 꽃에서 향기가 나잖아요. 향기는 꽃에서 드러나는 거잖아요. 그런 것처럼 마음이라는 것도 자아가 있어가지고 자아에서 마음이 드러나는 형태라 보는 거죠. 이것도 사견의 한 형태입니다.”
(일묵스님, 대념처경 11강)
자아안에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이를 꽃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꽃이 있으면 향기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주석에서는 “마치 꽃 안에 향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꽃을 자아로, 향을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가 있으면 마음 역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세 번째 사견이라 한다.
마음안에 자아가 있다는 사견
네 번째 사견은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viññāṇasmiṃ vā attānaṃ)”라는 말이다. 이는 세 번째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긴다.”와 정반대 되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일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네 번째는 마음이 자아는 아닌데 ‘마음안에 자아가 꼭꼭 숨어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우리마음에서 뭔가 번뇌를 들어내고 나면 그 안에 자아가 드러난다 이렇게 보는 것도 전형적인 사견의 한 형태다. 이걸 부처님은 뭐라고 비유했냐 하면, 경전에는 안나오고 주석서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상자가 있어요. 상자를 계속 열다 보면 무언가 보배 같은 구슬이 있다 이겁니다. 마음에 있는 번뇌를 버리다 보면 그 안에 자아라는 것이 숨어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네 번째 사견입니다.”
(일묵스님, 대념처경 11강)
마음 안에 자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자의 비유를 들고 있다. 주석에서는 “마음을 자아라 간주하고 이것이 물질안에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마치 보석이 상자안에 놓여 있는 것처럼” (36번 각주)이라 하였다.
비유를 보면 상자를 마음에 비유히고, 보석을 자아로 비유한 것이다. 마음의 상자를 열고 열다 보면 보배와 같은 자아가 나타남을 말한다. 이를 네 번째 사견이라 한다.
20가지 사견
일묵스님은 대념처경 강좌에서 네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모두 적용하면 20사견이 된다. 다른 말로 20가지 유신견이라 볼 수 있다. 20사견에 대하여 모두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2)
그는 느낌을 자아로 여기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3)
그는 지각을 자아로 여기고,
지각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4)
그는 형성을 자아로 여기고,
형성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5)
그는 의식을 자아로 여기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보름날 밤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09, 전재성님역)
초기경전에서 보는 20가지 사견은 맛지마니까야 ‘보름날 밤의 큰 경(M109) 뿐만 아니라, 상윳따니까야 ‘나꿀라삐따의 경(S22.1)’과 디가니까야 ‘대인연경(D15)’, 그리고 맛지마니까야 ‘교리문답의 경(M44)’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초기경전 도처에서 마음과 자아를 동일시 하는 사견, 즉 유신견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네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처럼 마음과 자아가 항상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구조를 몰라서
외도들은 자아가 있다고 한다. 더구나 아는 마음에 대하여 진아 또는 참나라 한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사견이다. 그래서 일묵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수행을 하다보면,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하다보면, 대상을 한걸음 물러서서 관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치 현상은 막 변하고 있는데 내가 뒤에서 지켜보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은 앞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또 변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런 변화의 과정에 있는 것이, 마치 마음이 워낙빨리 변하니까 두 가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데 이것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건 잘못된 견해이고 지켜 보는 마음 역시 조건 따라 일어나는 거다 이 말입니다.”
(일묵스님, 대념처경 11강)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그런 마음은 조건에 따라 생멸한다. 대상을 아는 마음을 또 아는 마음은 뒤이어 일어나는 마음이다. 그럼에도 진아론자들은 지켜 보는 별도의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혜민스님은 “그 놈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또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하지만 이는 마음의 메커니즘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오류로 보인다.
이 몸과 마음을 떠나 다른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몸과 마음 밖에서 자아와 진아를 발견하려 한다면 무화과에서 꽃을 찾으려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stn5) 라 하였다. 그럼에도 무언가 지켜 보는 나,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빈주먹’을 꽉 쥐고 있는 스승의 견해에 불과하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은 스승 밑에 있는 것은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
2015-12-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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