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 것인가 건널 것인가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반야심경 마지막 구절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이다. 이를 산스크리트어로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라 한다. 어느 절에서는 법회할 때 한문식 음역을 따르지 않고 산스크리트 원어를 그대로 발음하여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라고 독송하기도 한다. 이를 어떤 이는 “가세, 가세, 피안으로 가세, 함께 피안으로 가세, 저 열반의 언덕으로”라 한다. 정찬주 작가는 “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여 피안에 가신 분이여 피안에 온전히 가신 분이여 깨달음이여 행운이 있으라.”라 하였다. 공통적으로 ‘저 언덕으로 건너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볼 때 ‘이미 건너간 분’을 찬탄하는 뜻이 된다.
산스크리트어 ‘가떼(gate)’는 어떤 뜻일까?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gate 는 gata의 형태로서‘[pp. of gacchati] gone; moved; walked; passed; arrived at; having come to a condition’의 뜻이다. 가따(gata)는 ‘가다’라는 뜻인 ‘gacchati’ 과거분사형으로 ‘가버린 (gone)’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가떼(gate)’에 대하여 ‘가신 분이여’라고 번역하였을 것이다.
‘빠라가떼(pāragate)’에서 빠라(pāra)는 ‘the opposite shore; the other side’의 뜻이다. 따라서 빠라가떼(pāragate)는 과거분사 pāragata의 형태로서 ‘one who has gone to the end or the other shore(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가 된다.
빠라상가떼(pārasaṃgate)는 빠라가떼에서 상(saṃ)이 삽입된 복합어이다. 여기서 상(saṃ)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함께(With, together)’라는 뜻도 있고, ‘바르게(rightly)’라는 뜻도 있고 ‘머물다(to dwell)’는 뜻도 있고, ‘진정된다(to be appeased)’ 라는 의미도 있다. 상(saṃ)에 대하여 한자어로 표시하면 ‘共,集,合,正,同時’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빠라상가떼(pārasaṃgate)는 ‘함께 피안으로 가세’ 또는 ‘피안에 온전히 가신 분이여’가 된다. 그러나 주문은 번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여기는 대승불교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에는 무엇이
저 언덕이 있다면 이 언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기를 염원하는 것이 ‘반야심경 만트라’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만트라의 원형이 초기경전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언덕과 저 언덕으로 표현되는 수 많은 가르침이 이를 말해 준다. 그렇다면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반야심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른 대승경전에서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 반야심경 만트라의 원형으로 보이는 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경이 ‘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Oghataraṇasutta, S1.1)’이다. 경에서 하늘 사람이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너셨습니까?”라며 물어 본다. 이에 부처님은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흐름을 건넜습니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 (S1.1) 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올바른 수행을 통해서 힘들이지 않고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는 말이다.
“혼자서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
여기서 거센흐름(Ogha)은 폭류 또는 윤회의 바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고자 할 때 반드시 ‘거센 흐름’을 건너 가야 한다. 그러나 건너 가는 방법을 모르면 폭류에 휩쓸려 떠 내려 갈 것이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에서는 폭류를 어떻게 건너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 여럿 보인다. 그 중에 존자 우빠시바의 질문은 간절하다. 마치 ‘죽느냐 사느냐’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처럼 부처님에게 이렇게 묻는다.
Eko ahaṃ sakka mahantamoghaṃ (iccāyasmā upasivo)
Anissito no cisahāmi tārituṃ,
Ārammaṇaṃ brūhi samantacakkhu.
Yaṃ nissito oghamimaṃ tareyyaṃ.
[존자우빠씨바]
“싸끼야여, 저는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커다란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이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널리 보는 눈을 지닌 님이여.” (stn1069)
(Upasiva sutta-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5.7, 전재성님역)
숫따니빠따 ‘학인 우빠시바의 질문에 대한 경(Upasiva sutta)’은 제5품 ‘피안가는 길의 품(Pārāyanavagga)’에 실려 있다. 품의 제목이 말해 주듯이 저 언덕으로 건너 방법에 대한 길이다. 그런데 질문을 한 자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 바라문 우빠시바(upasiva)이다. 서시에 따르면 우빠시바는 베다성전에 통달한 바라문 ‘바바린’의 열 여섯 명의 제자 중의 하나이었다.
어떻게 해야 폭류를 건널 수 있을까?
우빠시바는 부처님에게 어떻게 하면 거센 흐름을 건너 저 언덕에 도달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본다. 그런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거센 물결을 건너 가기 위한 도구나 방법이 없이는 건널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폭류를 건널 수 있도록 “제가 의지해 이 거센 물결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Yaṃ nissito oghamimaṃ tareyyaṃ)”라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ākiñcaññaṃ pekkhamāno satimā (upasivāti bhagavā)
Natthīti nissāya tarassu oghaṃ,
Kāme pahāya virato kathāhi
Taṇhakkhayaṃ nattamahābhipassa
[세존]
“우빠씨바여, 새김을 확립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경지를 지각하면서,
나아가 ‘없다’에 의존하여 거센 물결을 건너십시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의혹에서 벗어나
갈애의 소멸을 밤낮으로 살펴보십시오.” (stn1070)
(Upasiva sutta-학인 우빠씨바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5.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가장 먼저 ‘사띠를 확립할 것(satimā)’을 말씀 하셨다. 이어서 ‘없다’에 의존하여 거센 물결을 건너라고 하였다. 왜 ‘없다(Natthī)’에 의존하라고 하였을까? 주석에 따르면 바라문은 ‘아무것도 없는 경지(무소유처정)’에 도달했지만 그 이상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가장 먼저 사띠 할 것을 말씀 하시고 이어서 갈애의 소멸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여기서 갈애의 소멸은 사성제에서의 고멸성제에 해당된다. 갈애의 소멸방법은 팔정도로 실현된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따르면 생사의 폭류를 건너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한다. 저 언덕은 다름 아닌 윤회가 끝나는 열반을 말한다.
어떻게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숫따니빠따에서는 폭류를 건너는 방법에 대하여 묻는 질문이 많이 등장한다. 그때 그때 마다 질문자가 처한 상태에 따라 건너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 해 준다. 야차 ‘헤마와따’와 야차 ‘알라와까’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야차 헤마와따]
“누가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
누가 큰 바다를를 건넙니까?
의지할 것도, 붙잡을 것도 없는
심연에 누가 가라앉지 않습니까?”(stn173)
[세존]
“언제나 계행을 갖추고, 지혜가 있고,
삼매에 들고, 성찰할 줄 알고,
새김을 확립한 님만이
건너기 어려운 거센 흐름을 건넙니다.”(stn174)
[야차 알라와까]
“사람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
어떻게 커다란 바다를 건넙니까?
어떻게 괴로움을 뛰어 넘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완전히 청정해질 수 있습니까?”(stn183)
[세존]
“사람은 믿음으로써 거센 흐름을 건너고,
방일하지 않음으로 커다란 바다를 건넙니다.
정진으로 괴로움을 뛰어넘고,
지혜로 완전히 청정해집니다.(stn184)
두 야차가 “어떻게 커다란 바다를 건넙니까?(kathaṃ su tarati aṇṇavaṃ)”라고 물어 보았다. 여기서 바다(aṇṇava)는 윤회(saṃsāra)를 말한다. 어떻게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견해에 따르면 “상윳따니까야 ‘한뿌리의 경(SN.I.32: S1.44)’에 나오는 ‘열두 소용돌이의 큰 바다’를 말한다.”(1725번 각주)라고 하였다.
찾아 보니 “한 뿌리, 두 회오리, 세 티끌, 다섯 돌맹이, 열두 소용돌이의 큰 바다, 선인은 그 지옥을 건넜네.”(S1.44)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열두 소용돌이의 큰 바다는 윤회의 바다를 말하는 것인 것 이는 다름 아닌 12처라 하였다. 즉, 내적인 여섯 가지 감각기관(내입처)과 외적인 여섯 가지 감각기관(외입처)의 12영역, 열두 가지 감각의 장(12처)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 윤회의 바다라 하였다.
여섯 개의 바다가 있는데
12처를 ‘일체’라 한다. 그런데 12처에 대하여 ‘윤회의 바다’라 하였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상윳따니까야 4권 157페이지에 ‘바다의 품 (Samuddavagga)’ 이 있다. ‘바다로의 경(Samuddasutta)’을 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Cakkhu bhikkhave purisassa samuddo, tassa rūpamayo vego. Yo taṃ rūpamayaṃ vegaṃ sa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atari cakkhu samuddaṃ saūmiṃ sāvaṭṭaṃ sagāhaṃ sarakkhasaṃ 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
[세존]
“수행승들이여, 시각이야말로 인간의 바다로서 그 거센 흐름은 형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 형상으로 이루어진 거센 흐름을 견디어 낸다면, 그는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나찰이 많은 시각의 바다를 건너 그것을 뛰어넘어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 고귀한 님이라고 한다.”
(Samuddasutta -바다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2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단지 ‘바다, 바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배우지 못한 일반인들이라 했다. 그러나 거룩한 이, 아라한에게는 바다가 아니라 단지 ‘커다란 물의 더미’나 ‘커다란 소용돌이’일 뿐이라 하였다. 이는 일반인들아 바라 보는 바다와 깨달은 이가 보는 바다는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를까?
부처님은 안이비설신의를 바다로 설명하였다. 가장 먼저 ‘시각의 바다(cakkhu samuddaṃ)’를 설명하였다. 그런데 시각의 바다에는 파도와 소용돌이가 일고 상어와 나찰이 득시글 거린다고 하였다. 주석에 따르면 파도와 소용돌이는 ‘분노와 번뇌’를 상징하고, 상어와 나찰은 ‘여인’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시각의 바다가 있다면 청각의 바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각의 바다, 청각의 바다, 후각의 바다, 미각의 바다, 촉각의 바다, 정신의 바다 이렇게 여섯 바다가 있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바다이고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바다이다.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 빠라가따(pāragata)
부처님은 윤회의 바다를 건넌 이에 대하여 ‘고귀한 님(brāhmaṇo)’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아라한’을 말한다. 그래서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 고귀한 님(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빠라가또(pāragato)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pāragata로서 ‘one who has gone to the end or the other shore’의 뜻인데 저 편 끝이나 다른 해변으로 건너 간 자를 말한다. 바로 이는 스크리트어 반야심경 만트라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에서 ‘pāragate’와 일치 한다.
아라한은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를 말한다. 오온을 가지고 살아 있지만 이미 저편 언덕으로 건너 간 자라는 뜻으로 과거분사형 ‘빠라가따(pāragata)’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이라 번역하였다.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를 뜻하는 빠라가따에 대한 가르침이 또 나온다. 상윳따니까 ‘뱀독의 품(Āsivisavagga)’에 있는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S35.238)’이 바로 그것이다. 경에서 빠라가따에 대한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Atha kho so bhikkhave puriso tiṇakaṭṭhasākhāpalāsaṃ saṃkaḍḍhitvā kullaṃ bandhitvā taṃ kullaṃ nissāya hatthehi ca pādehi ca vāyamamāno sotthinā pāraṃ gaccheyya, 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면, 건너서 저 언덕으로 가서 거룩한 이로서 땅 위에 섰을 것이다.
(Āsivisopamasutta-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8, 전재성님역)
빠라가따가 들어가 있는 구절은 “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이다. 이 구절은 앞서 언급된 “그것을 뛰어넘어 피안에 도달하여 대지 위에 선 고귀한 님”과 동일하다. 같은 빠알리 문구에 대하여 이 경에서는 “건너서 저 언덕으로 가서 거룩한 이”라 하였다. 중요한 것은 이미 건너 간 자로서 빠라가따(pāragata)이다.
붓다의 뗏목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는 윤회의 바다를 건너 간 자, 즉 아라한을 말한다. 그런데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나찰이 많은 시각의 바다, 청각의 바다 등 여섯 바다를 ‘뗏목(kulla: a raft)’으로 건넜다고 하였다. 여기서 뗏목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Kullanti kho bhikkhave, ariyassetaṃ aṭṭhaṅgikassa maggassa adhivacanaṃ, seyyathīdaṃ: sammādiṭṭhiyā sammāsaṅkappassa sammāvācāya sammākammantassa, sammāājīvassa, sammāvāyāmassa, sammāsatiyā, sammāsamādhissa.
[세존]
“수행승들이여, 뗏목이라는 것은 바로 여덟가지의 고귀한 길이다. 그것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Āsivisopamasutta-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8,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붓다의 뗏목은 다름 아닌 ‘팔정도’를 말한다. 이 언덕에서저 언덕으로 가는데 있어서 뗏목과 같은 탈 것이 필요하듯이, 윤회를 바다를 건너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Dhamma)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또한 진리(Dhamma)이다.
그런데 뗏목으로 윤회의 바다를 건넜다고 해서 태워버려야 할까? 금강경에서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法相應捨 何況非法)”라고 하였다. 이는 가르침마저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M22)’에 따르면 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왜 뗏목을 버려서는 안될까? 그것은 “수행승들이여, 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 (M22)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버려야 할 것은 가르침에 대한 ‘집착’이다. 그렇다고 가르침마저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만일 금강경에서처럼 ‘가르침마저 버려라(法相應捨)’라고 한다면 이는 ‘외도’의 가르침이다. 뗏목은 버리거나 불살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음 사람을 위해서 그 자리에 놓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 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 (M22)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누군가 뗏목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음 사람을 위하여 물 가까이 놓으라는 말이다.
뗏목을 불살라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뗏목을 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뗏목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구체적으로 저 윤회의 바다를 건너 가게 하는 팔정도를 말한다. 만일 누군가 윤회의 바다를 다 건너 갔다고 하여 뗏목을 불살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팔정도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 설법하였을 때도 팔정도를 말씀 하셨고 열반에 들기전 마지막 설법을 하였을 때도 팔정도를 설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쑤밧다여, 가르침과 계율에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없다면, 거기에는 수행자가 없고, 거기에는 두 번쨰 수행자도 없고, 거기에는 세 번째 수행자도 없고, 거기에는 네 번째 수행자도 없습니다. 쑤밧다여, 가르침과 계율에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있다면, 거기에는 수행자도 있고, 거기에는 두 번째 수행자도 있고, 거기에는 세 번째 수행자도 있고, 거기에는 네 번째 수행자도 있습니다. 쑤밧다여, 이 가르침과 계율에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있습니다.” (D16)라고 말씀 하셨다. 팔정도가 없으면 부처님 가르침도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붓다의 뗏목은 절대로 불살라서는 안될 일이다.
반야심경 만트라는 아라한찬가
붓다의 뗏목, 즉 팔정도로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이렇게 윤회의 바다를 건넌 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ti kho bhikkhave, arahato etaṃ adhivacana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
(Āsivisopamasutta-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8, 전재성님역)
이제야 모든 것이 명확하게 밝혀졌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 즉 빠라가따(pāragata)는 ‘아라한’이었던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명확하게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Tiṇṇo pāragato thale tiṭṭhati brāhmaṇoti)’에 대하여 ‘아라한(arahata)’이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반야심경 만뜨라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는 사실상 ‘아라한찬가’라 볼 수 있다.
반야심경 만트라 보다 초기경전이 시기적으로 먼저 성립하였다. 따라서 대승경전에서 보는 문구는 대부분 초기경전에서 근거한다. 그렇다고 하여 대승경전과 초기경전을 같다고 볼 수 없다. 누군가 대승경전이나 초기경전이나 같은 부처님 말씀이라 한다면 당연히 초기경전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반야만트라“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는 ‘아라한찬가’라고 볼 수 있다.
정신적으로 이미 저 언덕에 있는 자
아라한은 이미 윤회의 바다를 건너 버렸기 때문에 저 언덕에 가 있는 자이다. 다만 오온이 이 언덕에 있지만 ‘정신적으로’ 이미 저 언덕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육체적 죽음과 함께 오온이 멸하면 저 언덕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불환자는 어떨까? 불환자는 이 생에서 이미 불환자의 경지에 가 있는 자를 말한다. 따라서 이 생에서 죽으면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 색계 정거천에 태어나 수명대로 살고 복을 누리다가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일래자는 이 생에서 일래자의 경지를 실현한 자를 말한다. 따라서 죽음과 함께 인간이나 천상에 한번 더 태어나 아라한이 되어 저 언덕으로 가게 되어 있다. 예류자의 경우 일곱생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기로 예정 되어 있다. 그렇게 하려면 이 생에서 예류자의 경지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이는 대학입시 시험에 합격한 것과 같다. 시험에 합격한 자는 졸업과 동시에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이 떨어졌다면 졸업해도 대학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생에서 예류자가 되어 있어야 다음 생에서도 예류자로 태어날 수 있다. 이 생에서 이미 저 언덕으로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색계에 태어나려면
색계에 태어나려면 선정을 닦아야 한다. 그래서 선정수행을 한 공덕으로 색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아비담마 논장에서는 “여러 경지의 선을 닦은 수행자의 경우 그가 임종시에 들어 있는 가장 높은 선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아비담마길라잡이, 1권 470p)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청정도론에서는 “다른 사람은 선처에서 흙의 명상주제를 가진 禪 등을 통해서 고귀한 마음을 얻는다. 그가 죽을 때에 욕계의 유익한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 가운데 하나나, 혹은 흙의 명상 주제 등의 표상이나, 혹은 고귀한 마음이 마노의 문으로 나타난다.” (Vism.17.143) 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생에서 선정수행을 닦은 자는 임종시에 자신이 닦은 선정에 들면 그 선정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기 때문에 색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이생에서 선정체험을 한 자, 즉 이생에서 이미 색계라는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만이 다음 생에 저 언덕에 있게 됨을 말한다. 만일 이생에서 색계선정체험을 하지 않은 자는 다음 생에 절대로 색계에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욕계천상에 태어나려면
욕계천상에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흔히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 한다. 보시와 계율을 지키면 천상에 난다고 하였다. 이는 종교와 관련이 없다. 종교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을 살면 누구나 천상에 날 수 있음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천상이다.
그런데 보시도 하지 않고 오계도 지키지 않은 자가 천상에 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천상에 나기 위해서는 이미 이생에서 천상에 나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천상에서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감각적 욕망을 마음껏 누리고 살라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불법과 탈법으로 형성된 재산으로 마음껏 감각적 쾌락을 즐기며 사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 가기 힘들다는 말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고 오계를 지키며 청정한 삶을 살았을 때 누구나 천상에 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생에서 이미 저 언덕에 있는 천상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죽어서도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Idha modati pecca modati,
Katapuñño ubhayattha modati,
So modati so pamodati
Disvā kammavisuddham-attano.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 (dhp16)
이생에서 선행을 한자가 있다. 그럴 경우 두 세계에서 기뻐한다고 하였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말한다. 여기서 저 세상은 천상이다. 이는 법구경 16번 인연담 ‘여법한 재가신도와 관련된 이야기(Dhammikaupasakavatthu)’를 보면 알 수 있다.
인연담에 따르면 재가신도 담미까는 정기적으로 승가에 보시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처자를 거닐고, 계행을 지키고, 선한 원리를 따르고, 보시의 분배를 즐거워 했다.”라고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재가신도 담미까는 이생에서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재가신도 담미까는 이미 이생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 있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임종시에 “여섯 천상계에서 온갖 장식으로 치장한 천 마리의 씬두 산 준마가 이끄는 백 오십 요자나 길이의 여섯 수레가 다가왔다.”라 하였다.
머물러 있을 것인가 건너 갈 것인가?
반야심경 만트라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는 정찬주님 번역대로 “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여 피안에 가신 분이여 피안에 온전히 가신 분이여 깨달음이여 행운이 있으라.”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이는 산스크리트 ‘가따(gata)’가 과거분사형으로서 이미 건너 ‘갔다(gone)’는 뜻이다. 또 ‘빠라가따(pāragata)’ 역시 과거분사형으로 ‘피안에 온전히 가신 분’이 된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S35.238)’에서도 확인 된다.
부처님은 윤회의 바다를 건너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에 대하여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S35.238) 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은 다름 아닌 ‘빠라가따(pāragata)’를 말힌다. 그런데 아라한은 이생에서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 갔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생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만이 죽어서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열반은 죽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이몸과 마음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성취 되는 것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색계도 이생에서 선정체험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또 욕계천상도 이 생에서 천상과도 같은 삶, 즉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을 살아야만 건너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여기서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 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여기서
머물러 있을 것인가
저 언덕으로 건너 갈 것인가?”
2015-12-28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 이중표교수의 불교강좌를 듣고 (0) | 2016.01.03 |
---|---|
안온하게 두려움 없이, 육방예경과 사무량심 (0) | 2016.01.02 |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죠?”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0) | 2015.12.25 |
빗나간 견해 에고(ego:自我)와 참나(眞我) (0) | 2015.12.22 |
아침이 되면 꿈에서 깨듯이, 빠꾸다 깟짜야나의 7요소설 (0) | 2015.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