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 이중표교수의 불교강좌를 듣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3. 23:50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 이중표교수의 불교강좌를 듣고

 

 

연말과 연초에 이중표교수의 유튜브 동영상 강좌를 들었다. 그런 유튜브에는 수 많은 불교관련 강좌가 있다. 그 중에는 들을만한 것도 있고 가치 없는 것도 있다. 들을 만한 것을 발견하였을 때는 진흙탕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듯 하다. 그래서 여러 번 반복해서 듣는다. 그러나 대부분 쓰레기들이다.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이중표교수의 동영상강좌에 매료 되었다. 수십년간 불교를 연구한 학자의 내공이 느껴졌다. 더구나 강연 도중에 유머를 섞기도 하여 분위기가 부드럽고 적절한 비유를 들기도 하여 머리에 쏙쏙 들어 오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이교수의 강연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말룽끼야뿟따의 경(M63, M64)’이다. 그런데 경을 해석하는 이중표 교수의 안목이 탁월하였다. 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로 이제까지 모르고 있던 부처님의 무기에 대하여 명쾌하게 설명 하였기 때문이다.

 

독화살의 비유에서 독화살 맞은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제까지 당면한 괴로움과 생사문제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중표 교수는 사견에 대한 설명이라 하였다. 독화살을 사견이라 본 것이다. 그래서 독화살 맞은 것에 대하여 사견의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설명에 매료 되어 밤낮으로 들었다. 심지어 자동차를 타고 갈 때도 이어폰으로 들을 정도이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중표교수만의 독특한 해석법이 점차 확대 되었다. 그것은 전에 들어 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불교상식을 깨는 것이었다. 그래서 혼란이 오기 시작하였다.

 

제법 그럴 듯 하니까 여러분 들이 속아

 

현재 유튜브에는 이중표교수의 불교강좌이중표교수의 연기법이라는 이름으로 수 십편의 강좌가 올려져 있다. 그 중에는 수긍이 가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수긍할 수 없는 것은 이중표교수만의 독특한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것 중에 십이연기에서 (: bhava)’식연명색에 대한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십이연기에서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기고, 존재를 조건으루 태어남이 생겨나고라 설명된다. 여기서 존재는 바와(bhava: )를 말한다. 이와 같은 연기의 구조에 대하여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중표교수는 이를 부정한다. 여기서 바와는 새로운 존재가 태어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우유가 요구르트가 되듯이 현재 살아 있는 존재의 모습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중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 , 말하는데 생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을까이지, ‘내가 왜 태어났을까이런 얘기 하는게 아니에요. 그죠? 그런데 사람들은 왜 태어났을까그래가지고 부모 태를 빌어 낳겠지이렇게 생각해가지고 삼세 양중인과로 그러면 12연기가 윤회설이 되. 되가지고 막 부모가, 거기는 나오지도 않은 이야기를 막 무명 때문에 부모님이 같이 잠자리를 해 가지고 식이 모태에 들어가지고 성장해가지고 나와서 삼세양중인과로 삼세가 벌어졌다고 이런 이야기를 해 버리잖아요. 불경 어디를 봐도 그런 이야기는 없어. 니까야에는. 그런 이야기는 없는데 뒤에 사람들이 설명해. 그래 가지고 또 제법 그럴 듯 하니까 여러분 들이 속아 인제.”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2강(존재의 실상 01))

 

 

십이연기에서 (jati)’에 대한 설명이다. 생이 새로운 태어남, 즉 육체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삼세양중인과에 따른 윤회설은 불경 어디에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럴 듯 하니까 여러분 들이 속아라며 삼세양중인과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12연기를 윤회의 개념으로 보면 안된다고

 

이중표교수가 생각하는 12연기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생이다. 그래 윤회하면서 사람으로 태어나고 동물로 태어나고 이렇게 윤회하는 것이 생이다 이렇게 설명하려고 해요. 그게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12연기를 윤회의 개념으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단지 한 존재의 삶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요구르트 개념을 도입한다. 그래서 유와 생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에는 생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 없어요. 우유에서 요구르트로 변해 가는 과정에서 요구르트는 존재가 없으면 우유가 요구르트로 될 리가 없어요. 그렇다고 유유가 변하지 않는 건 아니죠? 그래서 우리는 가운데다 존재를 하나 더 만들어 봤어요.”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2강(존재의 실상 01))

 

 

우유가 요구르트가 되는 것은 새로운 태어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어나서 늙어 죽을 때 까지 자신의 변화 되는 모습과 같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중표교수의 강연에서는 윤회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일, 즉 내세와 윤회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아라한이니 수다원이니 하는 말들도 없다. 오로지 현생의 나 자신에다 12연기를 대입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중표교수는 유(바와)와 생(자띠)이 인과에 따른 새로운 태어남이 아니라 내가 변화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몸과 마음으로 보지도 않는다. 일체에 대하여 인식작용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인식작용은 오온에 있어서 물질도 인식되어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존재가 물질이냐 정신이냐 이런 식으로 세상을 봤던 거에요.”라 한다. 이는 왜냐하면 세계라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투사 된 것이니까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아비달마 이야기는 앞뒤가 안맞는다고

 

이교수는 십이연기를 인식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삼세양중인과는 부정된다. 그래서 아비달마불교에 대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말 불경을 읽어 보게 되면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불교가 대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요. 제가 참고서만 읽다가 이론서만 읽다가 불경을 직접 읽으면서 느낀 것은 왜 이렇게 부처님 말씀 하고 불교를 설명한 학자들이나 아비달마 이야기는 이렇게 앞뒤가 안맞냐내가 의지해야 될 것은 누구겠어요? 경이잖아요, . 그래서 나는 경전을 더 중요시 하잖아요. 그때부터 딴 사람을 못 믿기 시작했어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해 버리니까. 경을 읽다 보니까 경전만 치중해야 겠다 생각했지요.”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3강(존재와 생사 02))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부파불교 당시 형성된 아비달마 불교에 대하여 엉터리라 하였다. 이는 학자들이 설명하는 불교와 아비달마에 대하여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 하였다.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오로지 경만 믿는다고 하였다.

 

루터가 성경번역했듯이 저는 니까야를 번역할려고 해요

 

이교수는 오로지 경전에만 의지하여 자신만의 방식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했다고 하였다. 이는 논장과 주석서를 모두 부정하는 말이다. 그래서 최근 자신이 니까야를 직접 번역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미 디가니까야를 번역하였고 지금은 맛지마니까야를 번역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한 권씩 할 거에요. 그래가지고 사오년 뒤에는 니까야를 책 한권으로 엮어가지고 우리들이 부처님과 직접, 루터가 성경번역했듯이 저는 니까야를 번역할려고 해요.”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2강(존재의 실상 01)) 라 하였다.

 

이중표교수가 번역하였다는 디가니까야를 검색하여 보았다. 34개의 경중에 12개의 경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다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 취한 것이다. 경을 보니 ‘1. 범망경(梵網經) / 9 ,2. 사문과경(沙門果經) / 56 ,3. 꾸따단따경 / 100 ,4. ?타빠다경 / 123 ,5. 께왓다경 / 152 , 6. 대인연경(大因緣經) / 166 , 7.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 196, 8. 대념처경(大念處經) / 300 , 9. 전륜성왕사자후경(轉輪聖王獅子吼經) / 329 , 10. 태초경(太初經) / 352 , 11. 청정경(淸淨經) / 371 , 12. 씽갈라를 가르치신 경 / 401’라 되어 있다. 번역자의 뜻에 따라 경이 취사선택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나 상윳따니까야도 그럴 것이다. 여기에 이중표교수가 주석과 해설을 덧붙였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마치 바이블처럼 한권으로 책으로 사오년 이내에 나올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그럼에도 역자에 따라 경이 선택되고 버려 졌을 때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려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신화적이라 버리고, 초월적 내용이라 버리고,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버려서 한권으로 만들어 졌을 때 무미건조할 것임에 틀림 없다. 더구나 선별된 경에 대하여 이교수가 직접 주석과 해설을 덧 붙였다고 하는데 이는 논장과 얼마나 내용이 일치 할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직접 번역하였고나 한다고 하는데 과연 빠알리어를 번역하기 위한 언어적 소양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존재의 지속성을 뜻하는 비잉(being)

 

이중표 교수는 12연기에서 바와()에 대하여 존재의 지속성을 뜻하는 비잉(being)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설명은 타당성을 갖는다. 이에 대하여 뭐가 being이냐 하면 be가 계속되는 것이 비잉 being 이라합니다. 고잉(going)은 고(go)가 계속 되는 것이 고잉이지요? 계속된다는 것은 지속된다는 것을 말합니다.”라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becoming이라 해요. becoming이라는 말은 being이라는 말로 해결이 안되니까 아비달마적으로 해석을 할려고 하니까 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무엇으로 된다 이말이죠. 내가 죽어서 다른 존재로 된다. 그리고 rebirth라 해요. 재생. 바와()가 재생이라는 말은 언어학적으로 전혀 없습니다.

 

이말을 문자 그대로 풀이 하면 ‘bhu’라고 하는 동사가 있어요. 어근이. 이것이 바와띠라 하는 존재한다. be동사에요. be동사에 동명사에요. being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이 being을 정확하게 이해못하고 있으니까 being 존재 이렇게 막 갑니다.

 

뭐가 being이냐 하면 be가 계속되는 것이 비잉 being 이라합니다. 고잉(going)은 고(go)가 계속 되는 것이 고잉이지요? 계속된다는 것은 지속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시겠어요?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3강(존재와 생사 02))

 

 

이중표교수는 존재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이는 삼세양중인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바와()에 대하여 재생(rebirth)로 보는 것은 터무니 없다고 하였다. 이는 바와가 존재를 뜻하는 ‘bhu’라고 하는 동사의 어근을 갖기 때문에 존재의 지속성을 뜻하는 비잉(being)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비잉은 생과 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나라는 존재가 현생에서 지속됨을 말한다. 그래서 비잉이 없다면 생노사라는 말이 개념이 성립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안하겠죠? 그 말에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그런 식으로 불교설명 들어보신 적 있어요? 나도 못 봤는데 여러분은 보셨겠어요. 저는 불교전공하는 사람인데. (웃음)”라 하였다. 모두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기 위한 설명이다.

 

왜 존재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교수는 왜 존재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것일까? 칠판에 설명되어 있는 것을 옮겨 보면 무명---명색(식연명색, 명색연식)-육입-, , , , , , 노사라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존재의 지속성으로 설명되는 유에 대하여 오온이라 하였다.

 

 

 

 

 

이교수는 바와(, 비잉, 존재의 지속)에 대하여 오온이라고 하였다. 이런 말은 처음 듣는다. 아마 이런 해석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일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식과 명색에 대하여 식연명색명색연식으로 상호의존적 관계로 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또 복잡해져. 설명을 잘 못 해 놓으니까. 사실은 개념과 형태거든. 여러분들 의식속의 언어적 구조에요.  언어적 구조를 통해서만 우리는 눈으로 보고 듣고 있는 거죠. 그때 그 언어적 구조를 그것들의 거처가 되는 것()을 분별해 의식()이고, 이것과 이것이 (식연명색, 명색연식)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부처님이 깨달은 거죠. 이걸 지금까지는 몰랐던 거죠.

 

의식은 어떻게 해서 형성이 될까? 이 부분이 또 문제에요. 식과 명색이 두개 있어가지고 같이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은.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관계라는 것은 두 개의 존재가 서로 같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식이 삶에 의해서 형성되는 내용이에요. “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3강(존재와 생사 02))

 

 

참으로 독특한 이론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12연기에 대한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이론이다.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하는 것에 대하여 끊임 없는 삶의 반복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행에서 식으로, 그리고 식과 명색이 식연명색명색연식함으로써 수상사(受相思)’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매순간 윤회한다고

 

이는 오온에서의 색수상행식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삼세양중인과는 끼여들 틈이 없다. 그래서 십이연기가 오온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삶의 행이라는 것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노사)까지 행이라고 하는 거에요. 이런 것들이 식과 명색의 상호관계가 계속 반복되는 행위들에 근거해서 식에 의해서 노사가 벌어지구나. 이 사실을 지금까지 몰랐구나. 인제 알았으니까 그러한 행을 멈추고 잘 봐야 되겠다. 이런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잘 살아 가면 여러분들은 잘 아는 망상속에서 해방된다. 망상에서 해방되면 내가 태어나서 죽을 것이라는 걱정없이 산다. 이걸 정견, 무명을 없애고 올바로 이런 것들을 바라 보고 살면 그속에서 헛된 욕망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3강(존재와 생사 02))

 

 

이중표교수의 십이연기론에 따르면 오온에 대한 설명이고 동시에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행에서부터 노사까지가 일상에서 삶에서 매일 매순간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순간윤회라 하였다. 현재의 삶에서 이전에 이러난 일은 전생이고, 지금 순간은 현생이고, 미래는 앞으로 일어날 이라 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아 망상에서 해방되면 죽을 걱정하지 않아도 됨을 말한다. 그것이 열반이라 한다.

 

식연명색(識緣名色) 명색연식(名色緣識)

 

이중표교수의 십이연기 해석은 독특하다. 특히 식과 명색에 대하여 상호의존 하는 관계에 대하여 일상의 반복되는 삶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상윳따니까야 나가라경(S12.65)’를 근거로 들었다.

 

나가라경은 도시의 경이라 불리운다. 부처님이 보살로 있었을 때를 회상하며 설한 경이다. 그런데 이 경에서 십이연기는 다른 곳에 있는 내용과 약간 다르다. 다른 부위는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이 있으면 명색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일어난다.”라고 하였는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른바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무엇이 윤회하는가? 스타트렉의 공간이동과 불교의 윤회(2014-02-1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렇다면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은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서일까? 이어지는 부처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세존]

그때 수행승들이여, 내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전재성님역)

 

 

경에서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nāmaråpapaccayā viññāa, viññāapaccayā nāmaråpa)”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한문식으로 표현하면 ‘식연명색(識緣名色) 명색연식(名色緣識)’이 된다. 바로 이구절이 식이 재생연결식으로서의 ‘식’을 말한다. 이 재생연결식으로서 식 또한 조건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식에 대하여 순간윤회와 일생윤회로 설명할 수 있다.

 

순간윤회와 일생윤회

 

순간윤회는 일상생활에서 윤회를 말한다. 이중표교수가 말하는 존재의 지속에 따른 윤회와 같은 개념이다. 삶의 과정에서 윤회를 말한다. 이럴 경우 일반적인 십이연기가 적용된다. 즉 식과 명색의 관계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Viññāapaccayā nāmarūpa)”가 된다. 이는 한자어로 식연명색(識緣名色)’이 된다.

 

그런데 도시의 경에서와 같이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하는 경우 “1)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viññāe kho sati nāmaråpa hoti. Viññāapaccayā nāmaråpa )와 2)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nāmaråpe kho sati viññāa hoti. Nāmaråpapaccayā viññāa)” (S12:65) 가 된다. 이른바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식(名色緣識)’이다. 순간윤회의 경우 식연명색(識緣名色)이고, 일생윤회는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식(名色緣識)이 상호의존하여 동시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일생윤회에서 식과 명색이 왜 동시에 발생할까? 이는 일생윤회로서의 식은 명백히 ‘재생연결식’을 뜻한다. 특히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S12.65)”라 하였는데, 이는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 되돌아 오는 의식이란 재생의식(patisandhiviññāa)과 통찰지를 말한다. 재생의식은 조건으로부터 되돌아 오고 통찰지는 대상으로부터 되돌아 온다. 그것은 명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더 나아 가지 못한다. (Srp.II.125)”라고 설명되어 있다. 재생연결식은 조건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일생윤회 역시 연기작용임을 알 수 있다.

 

경에서는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 (S12.65)”라고 하였다. 바로 이 문구가 식이 재생연결식임을 뜻하고 또 이와 같은 과정이 일생윤회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는 한,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는 뜻이다. (Srp.II.115-116)”라고 설명 되어 있다.

 

후박나무님 지적하기를

 

초기경전과 주석서를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는 십이연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였다. 더구나 자신이 최초로 발견한듯이 바와를 존재의 지속성이라 하는가 하면,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성에 대하여 존재가 일상의 삶을 반복적으로 살아 가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이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 하고 있다. 연기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6입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이렇게 지적하였다.

 

 

12지연기에서 무명과 행과 식과 명색 멸하면 육입이 멸한다는 뜻은 과거의 갈애(무명,)가 멸하면 현세의 식과 명색과 육입이 생기지 않는 다는 뜻이다. 이 말은 또 현세의 갈애(무명,,,,)가 멸하면 내세의 생로병사(, 명색,육입,,)가 생기지 않는 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12지 연기가 삼세에 걸쳐 설명되는 논리라는 것을 알면 무명이 멸하면 ..육입이 멸한다는 것이 죽는다는 단멸론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중표 교수님은 이렇게 12연기를 이해하지 않고 “무명이 멸할 때 6입이 멸한다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말하며 ”6입을 [허망한 마음]이라고 이해할 때 6입이 멸한다는 것이 잘 이해 된다“16).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āyatana의 의미를 [7식주 2] [4무색처]에서 빌려와 4무색처에서 āyatana의 의미는 마음상태 이므로 6입에서의 āyatana도 마음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대인연경17)에서 보았듯이 7식주 2처는 그에 합당한 의식을 가진 중생들이 사는 장소(region)로 설명되고 있다. 그런 각각의 장소에서도 위빠사나가 가능하며 그러한 해탈을 혜해탈이라고 설명하는 경전이다.

 

12연기를 찰라 연기로만 보려는 시도는 6입과 명색과 생로병사를 단순히 마음상태로 간주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는 위에 거론한 쌍윳따 니까야의 [분별경]에 맞지 않을뿐더러 12지 연기와 6, 8지 연기의 차이점을 구분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근경식에서 시작하는 6지 연기(,,,,,)에서는 근과 경(내입처와 외입처)는 결코 소멸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느낌에서 생겨난 지금의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만을 줄기차게 설명한다.  

 

 三世12연기 라는 입장에서 6입의 소멸은 내세의 결과 즉 다음생의 6()을 받는 일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 해야 한다. 그러나 二世, 一世 6,8지 연기에서는 6입의 소멸은 언급조차 안되고 있다. 그러므로 단지 근///접촉/감수/갈애의 6지와 5지 연기에서는 감수와 갈애의 소멸만이 문제가 되지 근//식을 소멸해야 할 것으로 보거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근//식이 소멸되는 것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후박나무, 이중표교수의 6입에 대한 이해를 비판, 2007-10-11)

 

 

이중표교수의 6입에 대한 이해를 비판.docx

 

 

 

후박나무님은 논문형식으로 작성된 글에서 이중표교수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특히 “12연기를 찰라 연기로만 보려는 시도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보지 않고 단지 존재의 지속성에 따른 반복되는 삶으로 파악했음을 말한다. 12연기는 때에 따라 일생윤회와 찰라윤회로도 설명 될 수 있음에도 오로지 현생의 삶에 대한 윤회로만 본 것이다.

 

그런데 초기경에 따르면 12지 뿐만 아니라 11, 10, 8, 6지 등의 연기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12지 연기에서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 관계는 일생윤회를 설명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이를 현생의 삶의 반복에 대한 순간윤회로 설명하는 것은 모순이다. 순간윤회라면 6, 8지 연기 등으로도 설명이 가능함을 말한다.

 

색온도 허망한 마음이라고?

 

후박나무님이 이 글을 쓴 때가 2007년이다. 그 때 당시 후박나무님은 인도에 있었다. 인도 뿌네대학교에서 유학중에 있었다. 유학중에 작성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놓은 것이다. 이는 이중표교수의 불교관에 대한 우려 때문일 것이다. 그런 후박나무님은 현재 천장사주지직을 맡고 있는 허정스님이다.

 

후박나무님은 논문 같은 글에서 이중표교수의 불교관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이중표교수님은 이러한 āyatana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모순을 일으킨다.”라는 문구와 함께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문제를 거론 하였다

 

 

1.내입처와 외입처에서 시각의식(眼識) 청각의식(耳識)등이 생기고 이것을 촉이라고 말하는데 12처가 이미 마음이라면 근과 경이 합해져서 생기는 6(vinnana) 무엇이 다른가?

 

2.12연기의 첫 각지에서 이미 무명을 말하고 있는데 다시 6입이 [허망한 마음]이라고 말하니 이 둘은 어떻게 다른가?

 

3. āyatana는 감각접촉영역(phassāyatana)등의 접촉의 영역으로 잘 길들이고 수호하고 보호하고 제어해야 할 것으로 설명되는 경전이18) 있는데 어떻게 이것을 허망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4.늙음을 머리가 허옇게 됨, 수명이 줄어듬이라고 설명하고 태어남을  오온이 나타남(khandhāna pātubhāvo), 감각기관을 획득함(āyatanāna pailābho)이라고 설명하는 경전19)이 있는데 어떻게 6입과 생로병사를  [마음의 상태]로만 볼 수 있는가?

 

5. 아래와 같은 한문 경전20)에서는 무상정과 멸진정에서 나올 때 이몸과 6입과 목숨(因此身因六處緣命根 )을 의지해서 출정한다고 하는데 6입이 허망한 마음이라면 어떻게 멸진정에서 출정하는 사람이 허망한 마음이라는 6입을 의지해서 출정할 수 있는가

 

6. 4념처 수행의 법념처는 오온 ,육입 등을 관찰 대상으로 설명한다. 오온의 지수화풍 4대와 조도색으로 나누어 관찰하고 그 ,마음,음식,온도에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관찰해야 한다. 오온,육입을 단지 마음상태로 이해 하면 (rupa)은 모두 허망한 마음이 된다. 그렇게 되면 6입과 5온은 없애야 하는 것이 되는데 5온과 6입을 없애는 것이 불교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후박나무, 이중표교수의 6입에 대한 이해를 비판, 2007-10-11)

 

 

후박나무님이 지적한 핵심은 내입처와 외입처에 대하여 마음이라고 보는 것이다. 육근에 대하여 6내입처로 보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보았을 때 오온에서의 색온도 역시 마음으로 볼 것이다. 그래서 색온도 허망한 마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이다. 더구나 허망한 마음이라 하였는데 어떻게 멸진정에서 6입을 의지해서 출정할 수 있는지 묻는다.

 

일체유심조의 도리가 십이연기의 도리인 거에요

 

이중표 교수의 유튜브 불교강좌를 흥미 있게 들었다. 불교경전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여 설명하는 강좌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특히 정견과 사견에 따른 중도에 대한 설명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해석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부처님 가르침이 왜곡되는 것도 보았다. 십이연기를 단지 존재의 지속성에 따른 삶의 반복적 패턴으로 설명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래서일까 이제까지 부처님의 제자들이 노고로 작성된 주석서와 논장이 무시 되었다. 그리고 이중표교수만의 독특한 이론이 전개 되었다.

 

이중표 교수는 철저하게 경전위주로 해석한다고 하였다. 이는 아비담마논장이나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반야심경이나 화엄경 같은 대승경전은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화엄경에 대하여 이 화엄경이야말로 아함경을 가장 근본적인 입장에서 해석한 경이다 이렇게 읽었어요.”라 하였다. 아함경의 내용과 화엄경의 내용이 다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화엄경 심여공화사라는 말 아시죠.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갖가지로 오온을 그려낸다. 아함경에도 그 이야기가 나와요. 아함경에는 식이 오온을 분별해 내는 구조를 들 때 화가의 비유를 듭니다. 그 이야기를 그대로 화엄경에서 가져 가가지고 마음은 화가와 같네. 그냥 아함경 읽은 것을 그대로 표현만 달리 하고 있는 거에요. 같은 내용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의 근본이 되는 게송아닙니까? … 사실은 일체유심조의 도리가 십이연기의 도리인 거에요

 

요즘 우리 주변에 초기불교를 공부해가지고 오신 분들이 많에 계세요. 지금 한국불교에는 또 하나의 갈등이 있어요. 전통불교하고 미얀마 스리랑카에서 공부하고 온 초기불교하고제가 볼 때는 두 불교는 근본에 있어서 서로 다툴 것도 없고 싸울 것도 없고 한무리에요. 왜 우리는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서로 싸우고 분별해야 합니까? 부처님이 제일 경계했던 것이 뭐에요? 너희들은 물과 기름처럼 화합하라 근데 우리는 다 같이 불교공부하면서 너는 틀렸다 나는 맞았다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 대승이다 소승이다 서로 비난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중표교수의 불교강좌 5 [사성제와 연기법(십이연기) 02])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초기경전이나 대승경전이나 차이가 없다고 한다. 똑 같은 부처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교수는 반야심경의 문구를 들어 공의 도리를 설명하기도 한다. 또 용수의 중론에 있는 진제와 속제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또 화엄경에 대하여 표현만 다를 뿐 초기경전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체유심조의 도리가 십이연기의 도리인 거에요라 하였다.

 

후박나무님의 두 번째 비판 글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원음이 아니라는 것은 불교에 대하여 관심있는 불자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승경전은 엄밀히 본다면 논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치 부처님이 설한 것처럼 여시아문으로 시작 된다.

 

그런데 이중표교수는 아비담마 논장 등 초기경전 논서들은 철저하게 배격한다. 그러면서 논서나 다름 없는 대승경전을 곁들여서 초기불교를 설명한다. 이는 모순이다. 더구나 유식사상을 설명하듯이 부처님 가르침을 일체유심조라 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현상을 인식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왜냐하면 세계라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투사 된 것이니까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또 다른 글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대부분의 불교교리 소개서에서 오온은 물질과 정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오온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모두 비어 있음을 보게 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내용이 됩니다. 온 세상이 이렇게 텅 비어 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가 될 것입니다.-p.16-

 

“반야심경에서 , , , , , 할때도 그것은 육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입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p.216-

 

오온개공의 산스크리트 원문은 다음과 같다.

 

pañca-skandhā tām ca svabhāva-śūnyān paśyati

 

“다섯 무더기(五蘊)들이 있는데, 그것이 실체(自性)함을 확실히 보신다.

 

그러므로 五蘊皆空이란 五蘊 自性(svabhāva)이 없다(śūnyān)는 말이지 오온이 없다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온개공을 오온이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되고, 오온이 중생의 육체와 몸이라면 불교가 단멸론이 된다는 생각은 빗나간 상상이다.

 

반야심경은 이어서 是諸法空相으로 이어지면서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으로 이어지면서 오온,12,18계등의 온각 법수를 부정하는 표현이 이어지는 데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는 볼 수없는 표현들이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五蘊 自性(svabhāva)이 없다는 의미와 다른 것이 아니다. 단지 오온에 자성이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오온,12처는 있구나!”라는 법상을 깨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無眼耳鼻舌身意 하여도 눈,,,혀가 없어 진다는 식으로 이해 해서는 안 된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五蘊 自性(svabhāva)이 없다는 아함경과 니까야의 無我사상과 같은 의미이다.

 

결론적으로 이중표 교수가 반야심경의 眼耳鼻舌身意 육근(인드리야)이 아니라 12처이기 때문에 당연히 無眼耳鼻舌身意 되어야 한다는 설명은 오온개공을 오온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이것은 12처를 버려야할 허망한 마음이고 육근(인드리야)는 버려지지 않는 것으로 오해한 결과이기도 하다.

 

(후박나무, 이중표 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 비판. 2008-09-15)

  

 

이중표 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 비판.docx

 

 

후박나무님의 두 번째 비판 글이다. 이중표교수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인식작용으로 보았다. 그러다 보니 “반야심경에서 , , , , , 할때도 그것은 육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입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는 육근이 육경과 만나서 의식이 생겨나는 삼사화합에 대하여 달리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를 6내입처로 보는데 이는 인식작용에 따른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후박나무님은 “12처를 버려야할 허망한 마음이고 육근(인드리야)는 버려지지 않는 것으로 오해한 결과이기도 하다.”라 하였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의 원융인가

 

이중표교수는 향후 대승경전에 대한 강좌를 하겠다고 하였다. 가장 존경하는 용수의 중론을 강의 하고, 이어서 유식과 대승경전을 4년에 걸쳐서 차례로 강의할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중표교수는 대승불교신봉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하여 두 불교는 근본에 있어서 서로 다툴 것도 없고 싸울 것도 없고 한무리에요라 하였다.

 

두 불교가 근본에서 같은 것이라면 굳이 대승불교를 신봉할 필요가 있을까? 부처님 원음 하나만 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제일 경계하였다는 너희들은 물과 기름처럼 화합하라라는 말을 인용하여 대승이다 소승이다 서로 비난할 필요가 없잖아요?”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물과 기름처럼 화합하라라는 말은 대승과 초기불교의 원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승가의 화합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부처님도 장려 하신 담마토크(2015-07-0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부처님은 꼬삼비에서의 분쟁을 보고서 아누룻다에게 “아눗룻다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서로 화합하고 서로 감사하고 다투지 않고 우유와 물처럼 조화롭게 서로 사랑스런 눈빛으로 대하며 지내기를 바란다. (율장대품, 10장 꼬삼비다발)라 하셨다. 그럼에도 우유와 물에 대하여 대승과 초기불교의 원융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중표교수가 물과 기름의 화합을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대승을 기반으로 하여 초기불교를 보충하는 형식으로 보여진다. 그래서일까 초기불교의 핵심교리가 왜곡되고 논서가 무시된다.

 

부처님의 원음을 전하려면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가미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빠알리 삼장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니까야 뿐만 아니라 위나야(율장)와 아비담마(논장)도 목숨을 걸고 지켜 왔다. 그럼에도 아비담마논장에 대하여 모두 잘못된 것이라 하여 내친다면 부처님 제자로 볼 수 있을까?

 

왜 가르침을 왜곡하는가

 

이중표 교수는 초기불교를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였다. 열반에 대해서는 열반은 내일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자리에 있는 거에요.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거에요.”라 하였다. 과연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일까? 여러분들 지금 이자리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기분이 좋아요 안좋아요? (좋아요) 그럼 여러분들은 지금 이자리가 열반인거에요. 재미있잖아요? 행복하잖아요? ()”라 하였다. 자신의 강의를 들어서 마음의 기쁨이 일어났을 때 열반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초기경전과는 맞지 않는다. 일부 공감하는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의적 해석이 대부분이다.

 

초기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다 보면 부처님 가르침이 왜곡되기 쉽다. 색온에 대하여 물질이 아니라 단지 인식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오온과 십이처에 대하여 모두 인식된 것이라고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강의 중에 일체유심조의 도리가 십이연기의 도리인 거에요라고 말한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색온도 일체유심조라고?

 

이중표 교수는 화엄경의 일체유심조를 위하여 초기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같아 보인다. 그러나 색온은 분명히 물질이다. 물질의 다발인 색온은 물질의 불가분리의 집합체를 말한다. 이는 우리의 몸과 외부세계를 포함하는 신체적, 물질적, 사물적인 모든 것을 의미한다.

 

색온은 전통적으로 네 가지 광대한 존재(사대), 곧 땅, , 바람, 바람과 이 사대에서 파생된 물질을 말한다. 파생된 물질이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물질적 감각능력(오근)과 거기에 대응하는 외부적 대상(오경)인 형상, 소리, 냄새, , 감촉이 포함되어 있다. 또 이 파생물질에는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물질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물질의 집합체인 색온은 정신작용에 해당되는 수온과 상온과 행온과 식온과는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색온을 정신작용으로 간주하여 인식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사띠빳따나경(염처경, M10)을 보면 물질에 대한 관찰이 나온다. 신념처를 말한다. 그래서 수행승은 이 몸을 이와 같이 이 몸속에는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가 있다.’라고 세계로서, 놓여 있고 구성된 대로 관찰한다.”(M10) 라고 하였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경행을 할 때 발바닥의 감촉으로 딱딱함과 부드러움 등의 지대를 알아차리고, 따뜻함과 차가움 등의 화대를 관찰하고, 움직임을 통하여 풍대를 관찰한다. 이는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물질을 모두 인식된 것이라고 보았을 때 법의 성품을 제대로 관찰 할 수 있을까?

 

아마 이중표교수는 반야심경에서 무안이비실신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안이비설신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안이비설신의에 대하여 일체유심조식으로 설명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오온은 물론 12처에 대하여 모두 일체유심조로 보았을 때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주석서의 견해를 깡그리 무시하는

 

이중표교수는 12연기에 대하여 일상에서 오온의 작용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삼세양중인과를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이는 윤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용수의 중론을 이용하여 진제와 속제로 설명한다. 진리의 세계에서는 윤회는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진제와 속제로 분리하여 설명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이중표교수의 주장은 12연기에 대한 이해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초기경전에서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보는 경은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인연의 큰 경(D15),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 분별의 경(S12.2)을 들 수 있다.  이중에서 분별의 경(S12.2)’을 보면 존재(, 바와)에 대하여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존재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 가지 존재, 즉 감각적 욕망계의 존재, 미세한 물질계의 존재, 비물질계의 존재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존재라고 한다.” (S12.2) 라 하였다.

 

그런데 이 존재를 조건으로 하여 태어남()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이란 무엇인가? 낱낱의 뭇삶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뭇삶이 출생하고 탄생하고 강생하고 전생하고 모든 존재의 다발들이 생겨나고 감역을 얻는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일 태어남이라고 한다.” (S12.2) 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바와()를 조건으로 자띠()가 있다고 한 것은 분명히 새로운 태어남이다. 그래서 태어남(자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오온이 나타남(khandhāna pātubhāvo)’감각기관을 획득함(āyatanāna pailābho)’이라 하였다. 이렇게 명백하게 부처님이 말씀 하셨음에도 이중표 교수는 일상에서 오온의 반복적 삶의 패턴으로 보았다. 그리고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고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그리고 주석서의 견해를 깡그리무시하였다. 결과적으로 불교의 근간인 윤회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짬뽕시켜 놓았을 때

 

이중표 교수는 12연기에 대하여 오온과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다 보니 행에서부터 노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오온에서의 색수상행식과 다름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반복되는 일상의 삶과도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12연기의 가르침과 오온의 가르침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도 연기의 가르침에 대하여 니다나상윳따(S12)’라 하여 2권에서 별도로 다루고 있다. 3권에서는 칸다상윳따(S22)’라 하여 역시 별도로 다루고 있다. 4권에서는 살라야따나상윳따(S35)’라 하여 여섯 감역에 대하여 역시 별도로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이중표교수는 12연기와 오온, 여섯 감역을 한꺼번에 다루고 있다. 요즘말로 하면 짬뽕, 비빔밥식이다. 이렇게 핵심가르침을 하나로 짬뽕시켜 놓다 보니 여러가지 문제와 모순을 야기한다.

 

부처님은 12연기와 오온, 여섯 감역을 분리하여 설명하였다. 이렇게 분리하여 설명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연기의 경우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오온의 경우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여섯 감역은 일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별도로 설명되어 있는 가르침이 혼합되어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된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중표교수는 12연기에서 오온과 여섯 감역을 한꺼번에 다루고자 하였다. 그 결과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었다. 이렇게 짬뽕시켜 놓았을 때 12연기의 환멸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부처님이 12연기와 오온과 여섯 감역을 별도로 설명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이를 한데 묶어 짬뽕시켜 놓았을 때 별도의 설명을 해야 한다. 마치 한가지 거짓말을 하려면 열 가지 거짓말을 준비 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깨달은 무엇입니까?”라며 끊임 없이 물어 보며 이것 저것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주석의 견해는 무시되고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독특한 이론을 전개 시켜 나간다. 이렇게 문제와 모순이 발생해서일까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이라고 보는 일체유심조를 이야기하는가 보다.

 

왜 질의응답이 없을까?

 

이중표교수의 동영상강연을 보면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질의응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스님이 법문하듯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청중들은 그저 방청객에 지나지 않는다. 방송국에서 개그맨이 웃기면 따라 웃고 분위기를 맞추는 용도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자신의 이야기라 하지만 그것이 검증 받으려면 질의응답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질문이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하여 명쾌하게 답변해야 한다. 그럼에도 질의응답 없이 마치 원맨쇼 하듯이 일방적으로 전달만 하기만 한다. 

 

공부가 되지 않으면 그곳을 떠나라

 

유튜브에는 불교관련 동영상강좌가 널려 있다. 그 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판별 방법은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이냐에 따른다. 또 하나는 논장과 주석서에 근거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다. 빠알리니까야는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취향에 따라 경전을 선별하여 한권으로 만드는 행위는 가르침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더구나 가르침을 주석한 주석서와 논서를 무시하고 자신의 견해를 집어 넣는다면 이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대한 배신이다. 가르침을 훼손하려는 외도나 하는 짓이다.

 

누구나 한글만 깨치면 부처님 원음을 접할 수 있다. 더구나 상세한 주석이 되어 있어서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을 따르라고 한다면 외도이다. 가르침은 있는 그대로 접해야 한다. 

 

율장과 논장과 경장으로 이루어진 빠알리삼장은 인류의 고귀한 문화유산이다. 그럼에도 논장을 무시하고 경장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혼란을 준다면 그곳에서 떠나야 할 것이다. 부처님도 공부가 되지 않으면 그곳을 떠나라고 하였다.

 

 

 

2016-01-03

진흙속의연꽃

 

 

 

 

이중표 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 비판.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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