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안온하게 두려움 없이, 육방예경과 사무량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2. 13:22

 

안온하게 두려움 없이, 육방예경과 사무량심

 

 

 

부처님의 재가자에 대한 설법을 대표하는 경이 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D31)’이다. 경을 보면 재가자가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는 우정에 대한 가르침도 있다. 그렇다면 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육방예경으로 나타난다. 동서남북상하 이렇게 여섯 방향으로 예경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Kathañca gahapatiputta ariyasāvako chaddisāpaicchādī hoti? Chayimā gahapatiputta disā veditabbā: puratthimā disā mātāpitaro veditabbā. Dakkhiā disā ācariyā veditabbā. Pacchimā disā puttadārā veditabbā. Uttarā disā mittāmaccā veditabbā. Heṭṭhimā disā dāsakammakarā veditabbā. Uparimā disā samaabrāhmaā veditabbā.

 

[세존]

“장자의 아들이여, 어떻게 고귀한 제자에게 여섯 가지 방향이 수호됩니까? 장자의 아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① 동쪽 방향은 부모라고 알아야 하고 

② 남쪽 방향은 스승이라고 알아야 하고

③ 서쪽 방향은 처자식이라고 알아야 하고

④ 북쪽 방향은 친구와 동료라고 알아야 하고

⑤ 아래 방향은 하인과 고용인이라고 알아야 하고

⑥ 위 방향은 수행자와 성직자라고 알아야 합니다.”

 

(Sīgālasutta-싱갈라까에 대한 훈계의 경, 디가니까야 D31, 전재성님역)

 

 

동쪽에 절하며 예경하는 것에 대하여 부모라고 하였다. 이는 앞선 원조자가 부모이기 때문이다. 부모 다음은 스승이다. 스승은 공양받아아야 할 자이기 때문이다. 처자는 배후에서 추종하는 자이기 때문이고, 친구와 동료는 친구와 동료에 의지해서 특수한 고통을 초월하기 때문이고, 노예와 하인은 발에 의해서 확립되기 때문이고, 수행자와 성직자는 덕행에 의해서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렇게 육방은 나름대로 예경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표로 만들어 보면

 

이어지는 경을 보면 육방예경이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마치 법조문처럼 표현된 내용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방향

 

  

동쪽

부모를 섬김

① 나는 양육되었으므로 그분들을 봉양하리라.

② 나는 그분들에게 의무를 다하리라.

③ 나는 가문의 전통을 이으리라.

④ 나는 상속을 잘 승계하리라.

 

부모가 자식을 돌봄

① 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② 선한 것을 확립하게 하고

③ 기술을 배우게 하고

④ 어울리는 아내와 맺어두고

⑤ 적당한 때에 유산을 물려줍니다.

남쪽

스승을 섬김

① 일어나 맞이하고

② 시중들고

③ 열의를 보이고

④ 봉사하고

⑤ 성실하게 기술을 습득합니다.

 

스승이 제자를 돌봄

① 잘 훈련받도록 훈련하고

② 잘 이해하도록 이해시키고

③ 기술을 모두 배우도록 가르치고

④ 친구와 동료를 잘 소개시켜 주고

⑤ 모든 방향에서 안전을 강구해줍니다.

서쪽

아내를 섬김

① 존중하고

② 멸시하지 말고

③ 신의를 저버리지 말고

④ 권한을 부여하고

⑤ 장신구를 제공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돌봄

① 맡은 일을 잘 처리하고

② 주변사람들에게 친절하고

③ 신의를 저버리지 말고

④ 재물을 잘 보관하고

⑤ 모든 해야 할 일에 유능하고 게으르지 않습니다.

북쪽

친구와 동료를 섬김

① 보시하고

② 사랑스러운 말을 하고

③ 유익한 행위를 하고

④ 협동하여 행하고

⑤ 정직한 말을 합니다.

 

친구와 동료가

훌륭한 가문의 아들을 돌봄

① 술 취했을 때에 보살펴주고

② 술 취했을 때에 재물을 지켜주고

③ 두려울 때에 피난처가 되어주고

④ 재난에 처했을 때 버리지 않고

⑤ 그의 자손들을 존중합니다.

아래

하인이나 일꾼을 섬김

 능력에 맞게 일을 안배하고

② 음식과 임금을 지불하고

③ 병이 들면 보살펴주고

④ 아주 맛있는 것은 함께 나누고

⑤ 적당한 때에 휴식을 취하게 합니다.

 

하인이나 일꾼이

주인을 돌봄

① 먼저 일어나고

② 늦게 자고

③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④ 일을 잘 처리하고

⑤ 명성을 날리게 하고 칭송합니다.

수행자나 성직자를 섬김

① 자애로운 신체적 행위로 대하고

② 자애로운 언어적 행위로 대하고

③ 자애로운 정신적 행위로 대하고

④ 문을 열어 맞이하고

⑤ 음식을 보시해야 합니다.

 

수행자나 성직자가 훌륭한 가문의 아들을 돌봄

① 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② 선한 것에 들게 하고

③ 선한 마음으로 돌보아주고

④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주고

⑤ 이미 배운 것을 정화시키고

⑥ 천상에 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동쪽방향에서 ⑤ 적당한 때에 유산을 물려줍니다. 라는 항목이 있다. 여기서 적당한 때란 어느 때를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상시적시로 설명한다.

 

어떻게 재산관리 할 것인가

 

상시는 항상 주는 행위를 말한다. 용돈이나 사업자금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일어서기 위해, 발전하기 위해 이것을 가져라.” “이것을 너의 비용으로 삼아라.” “이것을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에 돈거래가 아니라 아낌 없이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적시는 적절한 때 주는 행위를 말한다. 공부할 때 주는 것과 결혼할 때 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최후의 순간에 죽음의 침상에 누워서 이것으로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하라.”고 주는 것이라 하였다.

 

장자가 자신이 모은 재산을 살아 생전에 자식에게 모두 주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착하고 건전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아낌 없이 지원하지만 늙어 죽을 때 까지는 일정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말한다.

 

자식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때

 

이렇게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돌보는 것에 대하여 동쪽방향 예경이라 하였다. 이를 경에서는 이렇게 해서 동쪽방향은 안온하게 두려움 없이 수호됩니다. (Evamassa esā puratthimā disā paicchannā hoti khemā appaibhayā)”(D31) 라 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만일 자식이 악행을 해도 부모가 어릴 때부터 불침번으로 부터 교정하지 않았다면, 그 자식은 부모에게 적당한 자가 아니라 두려움이 올 것이다.”(Smv.953) 라 하였다. 자식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럴 경우 동쪽방향이 수호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만일 부모가 악행을 했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모는 자식에게 적당한 자가 아니라 두려움이 올 것이다.”라 하였다. 부모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양자가 악행을 하면 두 가지 두려움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하지만 양자가 올바로 행한다면 일체의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는 스승에 의해 만들어진 자

 

남쪽방향은 스승으로부터 학예를 배우는 것에서 수호 된다고 하였다. 제자가 스스승으부터 배워 명망을 날린다면 양자가 좋은 것이다. 특히 스승의 명예가 높아 간다. 왜 그럴까? ‘그는 스승에 의해 만들어진 자라는 칭호가 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하느님 세계만큼의 이익이 생겨도 그것은 스승의 재산이 된다.”(Smv.954-955) 라고 하였다.

 

스푼을 손에 쥐어 주고

 

서쪽방향에서 아내를 섬김에 있어서 ④ 권한을 부여하고라는 항목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여성들은 큰 등나무와 같은 장신구를 얻어도 식사를 관장할 수 없다면 분노한다. 스푼을 손에 쥐어 주고 좋을 대로 하시오라고 식당을 맡기면 모든 권한이 부여된 것이다.” (Smv.955) 라 하였다. 집안의 살림살이 일체를 아내에게 권한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⑤ 장신구를 제공합니다.’라는 항목이 있다. 이는 자신의 부에 알맞은 장신구를 제공한다.”라 하였다. 능력껏 액세서리 등을 챙겨 주는 것이다.

 

직원을 대할 때

 

아래방향의 경우 오늘날 직원을 대하는 것과 같다. 하인이나 일꾼을 섬기는 데 있어서  능력에 맞게 일을 안배하고항목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젊은이가 할 일을 노인에게, 노인이 할 일을 젊은이에게 맡겨서는 안된다. 여성이 해야 할 일을 남성에게, 남성이 해야 할 일을 여성에게 맡겨서도 안된다. 각각의 능력에 맞게 일을 안배한다.” (Smv.955) 라고 하였다.

 

계행을 갖춘자가 집문앞에 오면

 

윗방향은 수행자와 성직자에 대하여 두려움 없이 수호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수행자와 성직자를 대함에 있어서 신구의 삼행에 따른 자애로운 행위를 하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문을 열어 맞이하고 반드시 음식을 보시해야 함을 말한다. 여기서 ④ 문을 열어 맞이하고라는 항목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모든 문을 열어 놓고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보시하지 않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면, 문을 잠가 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다.”라 하였다. 문이 열려 있지만 보시하지 않는 집은 문을 꼭꼭 잠가 놓은 것과 같다는 것이다. 반면에 문은 꼭꼭 잠가져 있지만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꼬박꼬박 보시하는 집은 사실상 문이 열려져 있는 집과 같다고 하였다. 따라서 계행을 갖춘자가 집문앞에 오면 지금은 없다.’고 말하지 말고 주어야 하며 또 문을 열고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전 중에 죽이나 음식을 보시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승속간의 장벽에 대하여

 

육방예경과 관련하여 마성스님의 글을 보았다. 그것은 승속간의 장벽이 너무 높다라는 글이다. 마성스님은 글에서 육방예경 항목을 언급하며 그 중에 여섯 번째 수행자나 성직자를 섬김수행자나 성직자가 훌륭한 가문의 아들을 돌봄항목에 대하여 출가자와 재가자의 관계[僧俗關係]’라 하여 글을 썼다. 그렇다면 마성스님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승속관계는 어떤 것일까? 그 중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 중에서 승속(僧俗)의 관계에 한정하여 말하면, 승속 간에 높은 장벽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출가와 재가의 엄격한 신분 구분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승려중심의 불교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1947년 시작된 봉암사결사 이후부터 한국불교의 풍속도는 급격히 달라졌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가 출가자 중심의 불교로 바뀌게 된 것은 봉암사결사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승려에게 삼배의 예를 올리는 관습도 없었다. 그것을 강조한 분이 성철스님이다.

 

봉암사결사 이전에는 승려와 신도의 복식에도 별로 차이가 없었다. 한복과 승복은 별로 차이가 없다. 다만 승복은 먹물을 들여 회색이었다는 차이뿐이다. 옛 장삼은 선비들의 도포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다만 승려는 의식을 집전할 때 붉은 색의 홍가사(紅袈裟)를 수했기 때문에 구별되었을 뿐이다. 봉암사결사 이후 변한 불교의 풍속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승속 간에 너무 격식을 따지게 되었다. 사찰의 예절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신도들은 반드시 스님께 삼배를 올려야 하는 것으로 변해갔다. 그 때문에 거사들이 사찰에 오는 자체가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나이 많은 노보살에게 반말하는 것은 다반사고, 갓 머리 깎은 사미승이 자신의 부모보다 나이 많은 신도로부터 삼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승려의 위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승속의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었다. 봉암사결사 이후 지금까지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인한 승려의 신분을 향상시키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팔천민(八賤民) 가운데 하나였던 승려 신분을 당시에는 향상시킬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신도 위에 군림하는 위치에까지 오게 되었다. 부처님이 비판했던 바라문교의 사제 신분과 바를 바 없다.

 

(마성 스님 , 승속간의 장벽이 너무 높다)

 

 

마성스님은 승속간의 관계에 대하여 일곱 가지로 설명하였다. 그 중에 첫 번째와 두번 째에 관한 것이다. 스님은 승속관계가 엄격한 상하위계 질서로 변질 된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를 해방후 봉암사결사 때부터 보고 있다. 그 이전에는 오늘날 보는 것처럼 삼배를 요구할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동료스님이나 재가신자들로부터 삼배를 받을 때가 가장 불편하다.”라 하였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이라면 삼배 받는 것을 당연시 한다. 그런데 마성스님은 이를 불편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들로부터 예배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자격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아마 한국불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계행일 것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스님은 그래서 평소 최소한의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합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라 하였다.

 

마성스님은 삼배 대신 합장 한번 하며 인사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실은 자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스님들일수록 삼배를 강요하는 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출가한 것이 무슨 벼슬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권위의식을 갖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과연 남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밥값을 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본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라 하였다. 한국불교의 현실을 부끄러워 하는 스님의 솔직한 고백이라 볼 수 있다.

 

모든 방향으로 자애의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

 

육방예경 항목을 보면 공통적으로 두려움 없이 안온하게 수호됩니다. (paicchannā hoti khemā appaibhayā)”라 하였다. 동쪽이라면 동쪽에서 올지 모르는 두려움, 즉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수호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모든 방향에서 두려움이 수호되고 안온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자애라 본다. 더 넓게 본다면 사무량심이다. 그래서 나를 중심으로 하여 부모-자식간의 자애의 마음을 낸다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안온하게 될 것이다. 이는 남쪽의 스승, 서쪽의 아내, 북쪽의 친구, 아래로 하인, 위로 수행자에 이르기 까지 모든 방향에 해당된다. 그래서 자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있다.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없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 채웁니다. (M127)

 

 

Metta

 

 

이 문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자애의 마음에 대한 정형구이다. 정형구를 보면 동, , , , , 아래가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육방예경과 방향이 일치한다. 그런데 더 있다. 그것은 옆과 모든 곳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육방 뿐만 아니라 모든 방향을 뜻하기 때문에 대상도 모든 존재들에게까지 확대 된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은 위로 신들의 세계에서부터 밑으로는 아비지옥에게 까지 확대 된다. 이렇게 모든 방향으로 자애의 마음을 가득 채웠을 때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모든 방향에서 수호되기 때문에 안온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 갈 수 있음을 말한다.

 

 

 

2016-01-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