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수불스님은 시대의 흐름에 맞서는가, 현응스님을 위한 변명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5. 14:39

 

수불스님은 시대의 흐름에 맞서는가, 현응스님을 위한 변명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불교에 대하여 일가견이 있다는 수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해 왔다. 그리고 이야기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야기할 것이다.

 

수불스님은 왜 발끈하였을까?

 

최근 수불스님이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미디어붓다에 실린 글 수불스님, 현응스님 담론 정면 비판(2015-12-31)에 따르면 현응스님 스스로가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고백과 같다.”라 하였다. 또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깨달음에 대하여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불스님은 왜 이렇게 혹독하게 말하는 것일까? 이는 현응스님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이라고 말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 말에 발끈하여 수불스님이 장문의 반론글을 쓴 것이다.  

 

깨달음은 정말 이해의 영역일까? 이에 대하여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이 작성한 문구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심지어 글의 말미에는 평생 번뇌 망상에 끄달리다가 섣달 그믐날 밤에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 하는가 하면, 또한 장님이 다른 사람들을 끌고 절벽으로 다가가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현응스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터무니 없음을 너머 한국불교를 망치려한다는 뉘앙스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불스님의 주장대로 현응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주장이 헛된 망상과 같은 것일까?

 

현응스님의 글을 읽고서 어느 정도 수긍을 한다. 다만 깨달음도 진화한다는 주장은 제외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응스님을 위한 변명을 하고자 한다.

 

현응스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현응스님을 한번 만나 뵌 적이 있다. 지난 2012 1월 추운 겨울날 조계종 총무원 불학연구소를 방문하였다. 허정스님이 불학연구소장으로 취임하고 한달 가량 지났을 때이다. 허정스님이 차나 한잔 하자고 해서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교육원장 현응스님도 있었다. 그때 당시 현응스님이 허정스님의 블로그를 보고 불학연구소장으로 발탁했다고 하였다.

 

고위직 스님들을 만난 적이 없다. 조계종교육원장이라면 삼원체제에서 서열이 총무원장 다음으로 높다고 본다. 그런데 현응스님은 이미 진흙속의연꽃이라는 존재를 알고 있었다. 블로그에서 글을 많이 접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블로그에 누가 들어 왔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간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사람 중에는 불교인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님들도 종종 방문한다는 사실이다. 현응스님 역시 오래 전 부터 블로그를 보아 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매우 반갑게 맞아 주었다.

 

현응스님이 자리를 함께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이전에 현응스님이 쓴 글에 대하여 비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 초기불교가 허망하다고? 현응스님의 ‘기본불교와 대승불교’를 읽고(2010-10-3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현응스님이 불교평론에 기고한 글을 읽고 초기불교입장에서 반박한 것이다. 그런데 현응스님이 이 글을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나자 반박글에 대하여 해명 비슷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런 설명을 한참 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은 저서 깨달음과 역사를 선물로 주었다.

 

잘근잘근 씹듯이

 

교계신문 미디어붓다에 실려 있는 수불스님을 글을 보면 현응스님에 대하여 혹독하게비판하고 있다.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데 목차를 보면 무려 12개 에 걸쳐 소제목이 붙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속된말로 잘근잘근씹듯이 비판하고 있다. 이런 내용에 대하여 모두 표현할 수 없다. 이 글은 현응스님을 위한 변명이기 때문에 수불스님을 비판한다. 그리고 현응스님을 옹호하고자 한다.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이 마음이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현응스님 스스로가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고백과 같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이란 직접 깨닫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불스님은 현응스님 본인이 마음을 깨닫지 못했으니까, 깨달음의 내용이 추상적이며 구체적이지 않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라 하였다. 결국 현응스님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깨닫지 못한자가 아무리 말을 해도 진실된 말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마치 깨닫지 못한자의 말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누가 깨달은 자인가?

 

현응스님이 깨달은 자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수불스님은 깨달은 자일까? 마음의 영역은 알 수 없다. 정신세계는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이러쿵 저러쿵 말 할 수 없다. 다만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밖에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가 얼마나 탐욕이 남아 있는지, 얼마나 성냄이 남아 있는 지등으로 정신세계를 판단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어느 경우에서든지 탐욕이 없고 또한 성냄이 없다면 깨달았다고 볼 수 있다. 번뇌가 소멸된 자를 깨달은 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고 한다.”(S43.12)라 하였다. 여기서 무위라는 말 대신에 궁극, 무루, 진리, 피안, 극묘, 적멸, 불사, 열반 등이 적용될 수 있다. 공통적으로 탐진치의 소멸이다. 그래서 탐진치가 소멸된 상태를 깨달음으로 본다.

 

탐진치가 소멸된 자가 깨달은 자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을 보면 깨달은 자, 즉 붓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자라 하였다.

 

 

Abhiññeyya abhiññāta,  

bhāvetabbañca bhāvita;   

Pahātabba pahīna me,    

tasmā buddhosmi brāhmaa.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stn558)

 

 

이 게송은 숫따니빠따 셀라의 경(Sn3.7)’과 맛지마니까야 브라흐마유의 경(M91)’에 실려 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pariññeyyā)’은 일반적으로 ‘교학’을 말하고, ‘닦아야 할 것(bhāvetabbā)’은 ‘수행’을 말한다. ‘버려야 할 것(pahātabbā)’은 오염원을 버린다는 뜻이다. 오염원 소멸 되었을 때 청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교학과 수행으로 통찰지를 증득하였을 때 ‘깨달은 자(buddha)’가 된다고 하였다.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분별망상이라고

 

초기경전에 따르면 깨달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학과 수행이라는 양날개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수불스님은 교학에 대한 이해는 필요 없다고 하였다. 또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사교입선으로 설명하였다.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의 교학적 깨달음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래서 현응스님이 한마디로 부처님이 각자(覺者)라 할 때 그 깨달음은연기관(緣起觀)의 이해를 확립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서 해결하는 것이라 하겠다.”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알음알이는 무명을 더 크게 만들 뿐이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학을 잘 이해하면 할수록 실제 수행의 발심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이다. ‘잘 이해하는 것으로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자기마음조차 조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분별망상의 일이기 때문이다. 갈애(渴愛) 때문에 고()가 일어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갈애를 해소할 수 없으면, 양심상 그 앎 때문에 오히려 더 괴로워진다.

 

(수불스님, 현응스님 담론 정면 비판, 미디어붓다 2015-12-31)

 

 

수불스님은 교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별망상이라 하였다. 갈애만 일으켜 더욱 더 괴로움만 증장시킬 뿐이라 하였다. 그래서 현응스님은 연기법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말하지만, 깨닫기 전에는 연기법의 진면목을 바로 알기 어렵다.”라고 말하면서 중도를 말한다. 그런 중도는 사무치고 사무쳐서 끝내 통해야 하는 것이지, 이해로서는 도저히 그 실상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라고 하였다. 실참수행을 해야만 깨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면서 금강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의 문구를 이용하여 반박한다.

 

한편은 이해만 하면 깨닫는 것이라 하고, 또 한편에서는 오로지 수행을 통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대체 누구 말이 맞을까? 분명한 사실은 교학과 수행 양날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stn558) 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간화선야말로 인류가 발견한..”

 

수불스님이 이렇게 발끈한 이유는 무엇일까? 현응스님이 간화선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말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수불스님은 유상의 전도몽상을 깨게 하는 가르침으로 간화선만큼 효과적인 수행법은 없다. 간화선은 가장 정확하고, 빠르며, 쉽고, 현대적인 수행법이다.”라고 간화선에 대한 변명을 하였다. 또한 간화선 수행법이 면면히 전해 온 것에 대하여 한국의 자랑이요 인류를 위해서도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화선야말로 인류가 발견한 전법도생의 최고의 방법론이라는 것이 선조스님들의 고구정녕한 당부요 소중한 유훈이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중흥과 현대화의 지름길은 간화선을 현대에 맞게 훌륭히 되살려내는 데 있다 하겠다.


후손이 못나서 선조의 훌륭한 가르침인 간화선 수행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분발하여 간화선 본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이를 위해 간화선 수행 실패자들은 말을 삼가고 더 이상 구업을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올바른 길은 간화선의 대중화와 세계화다. 이를 위해 수좌스님들을 중심으로 학자들과 사부대중들이 합심하여 실질적인 간화선 부흥을 이룩하도록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

 

(수불스님, 현응스님 담론 정면 비판, 미디어붓다 2015-12-31)

 

 

수불스님은 간화선 지상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래서 불법의 정수는 간화선밖에 없지 않은가?”라 하며 인류 최고의 정신문화유산인 간화선법을 가지고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과 현실상황을 반성해야한다고 말한다.

 

수불스님 반박하기를

 

현응스님은 깨달음에 대하여 이해의 영역으로 보았다. 그래서 만일 깨달음을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그러한 깨달음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깨달음을 위해 선방에서 10, 20, 30, 평생을 앉아 있는 것에 대한 간접비판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비판에 수불스님이 도저히 참지 못한듯 하다. 그래서 깨달음이 이해영역이라는 것에 대하여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통하여 반박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불조의 가르침 :
마치 사람이 남의 보물을 헤아리면서 자기에게는 반푼의 돈도 없는 것처럼, 법을 수행하지 않고 많이 듣고 이해하기만 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 《화엄경》


사량분별이 도를 가로막는 것이 분명함을 참으로 알아야 한다. - 《대혜보각선사서》


어떤 부류의 눈먼 중들은 교승(敎乘) 속에서 뜻으로 헤아리고 따져서 말뜻을 따라 견해를 이루어서는, 마치 똥덩어리를 입속에 넣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토해내듯이 한다. - 《임제록》

 

(수불스님, 현응스님 담론 정면 비판, 미디어붓다 2015-12-31)

 

 

 

 

수불스님은 불조의 가르침이라 하여 수 많은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깨달음을 이해 차원으로 보는 것은 분별망상이라는 것이다. 모두 알음알이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 ‘실상은 환히 드러나 있어서 찾고 닦으려 할수록 어긋난다혹은입 열면 벌써 틀리고, 생각이 움직이면 바로 어긋난다[開口卽錯 動念卽乖]’”라는 법문을 예로 들고 있다. 실참수행을 해야만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수불스님이 말하는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현응스님은 깨닫지 못한 자라고

 

수불스님은 장문의 글에서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란 무엇일까? 이는 현응스님이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대개 묵시적으로 깨달음이란마음을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라고 본다. (…) 그러나 이렇게 정의하는 깨달음은 내용이 추상적이며 구체적인 것은 아니다. 마음을 깨닫는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마음을 깨닫는다 할 때의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한 반론이라 볼 수 있다.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일까?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일까? 전자는 현응스님이 주장한 것이고 후자는 수불스님이 주장한 것이다. 결국 이해마음의 문제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불스님은 마음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 말은 현응스님 스스로가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고백과 같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마음이란 직접 깨닫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르니까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다. 현응스님 본인이 마음을 깨닫지 못했으니까, 깨달음의 내용이 추상적이며 구체적이지 않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이란 없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면, 그 말 자체가 모순이다. 깨닫지 못했는데 깨달음의 내용인 마음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안단 말인가? 꿈속에 있는 사람은 꿈 깬 생시를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본인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겠다고 해서 마음을 부정한다면, 하늘에다 침 뱉는 꼴이다. ‘마음을 부정하는 그것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일거수일투족을 마음이 한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의심에서 수행이 시작된다. 의심은 우리를 진리로 나아가게 한다.


사리가 이렇게 분명하거늘, 본인이 깨닫지 못해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해서, 마음을 깨달아 증명하고 전등해주신 기라성 같은 선조스님들을 부정하고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불스님, 현응스님 담론 정면 비판, 미디어붓다 2015-12-31)

 

 

수불스님은 현응스님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현응스님은 깨달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깨달은 자가 아닌 자가 아무리 말을 해도 그것은 입만 벙긋하면 어긋나는 개구즉착과도 같다는 것이다.

 

수불스님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수불스님은 마음을 깨닫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대체 그 마음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수불스님은 대승경전과 조사어록에는마음을 깨닫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라고 말하면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종지를 말한다. 결국 마음을 깨닫는 것은 견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부처가 된다(成佛)’는 것이다.

 

수불스님이 주장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견성성불이다. 이는 선종의 종지 직지인심. 견성성불. 사교입선으로 달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의 모두에 한국불교 조계종의 종헌을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수불스님은 종헌에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조계종단의 종지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종지로 한다.” (종헌 제2) 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교육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현응스님이 직무를 다 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시대의 역할을 다한 불교와 수행법으로

 

수불스님은 승가교육을 총괄하고 있는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행보가 못 마땅하게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마치 발끈 하듯이 장문으로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점차 기울고 있다. 초기불교가 보급되고 부처님당시의 수행법이 가면 갈수록 보급되고 있는 이 시대에 위기감을 느낀 것이라 볼 수 있다.

 

수불스님의 주장을 보면 마치 시대를 거스르는 것 같다. 시대는 부처님 원음을 필요로 하고 급속도로 보급되어 가고 있는 마당에 이미 시대의 역할을 다한 불교와 수행법으로 막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과 같다. 반면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은 시대와 함께 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잘 얻기 위해(잘 이해하기 위해) 설법과 질의응답, 토론, 경전과 어록 열람, 불교를 풍부하게 할 다양한 독서 등이 현대적인 수행방법이기도 하다.”라 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눈 있고 귀 있는 자들은 불교에 대하여 깨달음에 대하여 한마디씩 한다. 그런데 잘 보면 신구세대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신시대와 구시대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막고자 한다. 마치 일본 도쿠가와막부 말기 결성된 신선조(新選祖)’를 보는 것 같다.

 

시대의 흐름 앞에 무릎 꿇은 신선조(新選祖)

 

신선조는 토쿠가와막부 말기에 결성된 무사조직이다. 수도인 쿄오토()의 치안을 담당하던 사설무사집단으로서 막부에서 고용된 낭사들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검 한자루에 청춘과 인생을 건 떠돌이 무사들로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연습을 하였다. 진검승부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연습을 실전처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련된 무사들은 적수가 없었다. 이는 무사도를 어기면 할복이라는 철의 결속의 결과이기도 하다.

 

낭사들의 신선조는 몰락해 가는 토쿠가와 막부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철의 결속을 자랑하며 적수가 없던 그들도 시대의 흐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시대의 흐름은 다름 아닌 변화에 대한 갈망이다. 250년간 지속된 막부로서는 미국, 영국 등 외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막부 편에 있었던 사츠마번죠슈번등의 하급무사들이 흐름을 주도 하였다. 막부를 타도 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시작이다.

 

신선조는 시대의 흐름을 막고자 결성된 낭사조직이었다. 돈을 주고 고용한 자들로 요즘 말로 하면 사설치안대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가공할 무술로 막부를 타도하려는 지사들을 발본색원하여 처단 하였다. 그럼에도 변화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시대의 흐름에 맞서고자 하였으나 결국 시대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수불스님은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맞서는가

 

수불스님의 반론 글을 보면서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맞서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불교에서 이미 초기불교가 가면 갈수록 거센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는데 마치 흐름을 저지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 전면에 수불스님이 앞장 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현응스님이 흐름을 주도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현응스님의 깨달음은 이해 하는 것이라는 담론에 대하여 깨달음은 마음을 깨닫는 것이라 하여 선종의 종지로서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두 개의 커다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초기불교와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대표 되는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한 새로운 흐름이다. 또 하나는 선종의 종지에 따라 간화선을 주창하며 중국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구기득권 세력이다. 이 두 세력이 맞부딪쳤을 때 파열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번 수불스님의 대반격이 좋은 예라 볼 수 있다.

 

현대는 광속으로 변하는 시대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글로벌화 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부처님의 원음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간화선만이 최고라는 선종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시대에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승가교육개혁을 단행하였다. 초기불교 교육을 강화 한 것이다.

 

현응스님은 조계종 종명까지 바꾸고자 하였다. 이는 한국불교 1700년 역사와 전통을 넘어 불교 역사 2600년 까지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현응스님은 깨달음을 잘 얻기 위해(잘 이해하기 위해) 설법과 질의응답, 토론, 경전과 어록 열람”이라 한 것이다. 이에 수구기득권 세력의 대표주자라 볼 수 있는 수불스님이 발끈하듯이 장문의 글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수불스님의 글을 보면 거침이 없다. 견해를 달리 하는 상대방에 대하여 평생 번뇌 망상에 끄달리다가 섣달 그믐날 밤에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든가, 장님이 다른 사람들을 끌고 절벽으로 다가가는 것처럼라는 극한 표현을 하였다. 마치 입에 칼을 물고 찌르는 것 같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저지하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가면 갈수록 막기 힘들 것이다. 과연 수불스님을 비롯한 선종스님들은 시대의 거센 흐름을 막아 낼 수 있을까?

 

 

2016-01-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