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어?” 존재를 윤회케 하는 네 가지 식사
농촌마을 체험프로그램
농촌마을에 체험프로그램이 있다. 전세버스로 체험프로에 참가 하게 되었다. 점심전에 도착 하여 가장 먼저 한 것이 ‘찐빵만들기’이다. 밀가루반죽과 팟고물이 준비 어 있어서 마치 송편만들듯이 만들면 된다. 아기주먹만하게 만들라고 한다. 한판 만들어지면 약 이삼십분간 찌는 과정을 거친다. 완성되면 어른 주먹만하게 된다. 이렇게 만든 것을 가져 가면 된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체험프로를 운영하는 마을 식당에서 푸짐한 한상이 차려 졌다. 지역에서 나는 싱싱한 배추와 수육이 있는 보쌈이다. 역시 먹어야 힘이 나는가 보다. 배불리 양껏 먹으니 모두들 든든해 하는 것 같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해야 할 일은 김장김치 담그기 프로이다. 먼저 준비된 무우를 채로 썬다. 도구를 이용하요 문지르면 일정크기의 무우채가 완성된다. 다음에는 버무리는 작업이다. 고춧가루, 멸치액젓, 새우 등 갖가지 재료를 넣고 버무린다. 시뻘겋고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무우채재료가 완성되면 이제는 배추에 바르고 집어 넣는 작업이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김치를 4키로씩 배분한다.
프로가 하나 더 남았다. 이번에는 밀가루반죽을 이용한 전부치기이다. 준비된 간이 연료장치와 프라이이 펜이 준비 되어 있어서 단지 부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완성된 전을 식당에서 먹는다. 이때 마을의 특산품 막걸리가 제공된다. 이렇게 마을체험프로그램은 처음부터 끝까지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먹는 것에서 끝난다. 더구나 스스로 만든 찐빵과 스스로 담근 김치까지 가득 안겨 주니 사람들은 흐뭇해 한다.
책을 선물하려 하였으나
연말이면 어느 단체나 조직에서든지 송년 모임이 있다. 작은 법우모임 역시 송년 모임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송년회 준비를 하고 있다. 연초 총무로 뽑혀서 할 바를 다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았다.
어느 모임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또 때로는 냉소적인 사람도 있고 비협조적 사람들도 있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모인 법우님들이지만 매우 보수적 성향도 있고 진보적 성향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대화방이 있어도 의사표현을 하지 않으니 속을 알 수 없다.
연말 송년회를 앞두고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어떤 선물이 좋을지 고민 끝에 책이 떠 올랐다. 불자라면 어느 정도 불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 전통의 법우모임에서 초기경전과 관련서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니까야를 한권으로 요약한 책이다.
책을 연말선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일부 법우님들에게 물어 보았다. 모두 반대 하였다. 현실적이지도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전처럼 조기선물을 하자고 하였다. 가락동에서 오랫동안 조기장사를 하고 있는 법우님이 있는데 연말송년회가 되면 법우님들에게 선물로 제공하고 있다. 물론 적립되어 있는 회비에서 구매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법우님들의 사업장에서 구매 하는 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대신 조기선물세트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먹는 것이 낙인 사람들
연말송년회 준비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먹는 것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큰 마음 먹고 기금에서 갹출하여 책을 한권씩 선물하려 하였으나 실용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모두 반대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책은 한번 사 놓으면 버리기 전에는 닳아 없어지지 않으나, 먹는 것은 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책보다 먹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사람들은 든든히 배불리 먹어야 포만감을 느낀다. 우리 말에 등 따습고 배부르면 남부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늘 먹거리를 찾아 다닌다. 요즘 대 유행하는 먹거리방송이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 매일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하고 때로 간식도 먹고 저녁에 회식 등 술자리도 갖는다. 이렇게 매일 매끼마다 먹고 마신다. 이렇게 일생 동안 먹어 치우는 음식의 양은 얼마나 될까? 아마 작은 산 하나 작은 연못 하나 정도 되는 엄청난 양일 것이다.
사람들은 먹는 것이 낙이다. 만일 먹거리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아마 폭동이 날지 모른다. 사흘 굶어 담 넘어 가지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먹는 문제는 생존과 직결된다. 그래서 단 하루라도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파서 견딜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긴 먹되 더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한다. 그래서 각종 레시피가 개발되고 이와 관련된 프로가 또한 유행이다.
기쁨을 먹고 사는 색계
먹는 것과 관련하여 재미 있는 동영상을 보았다. 범일스님이 진행하는 니까야강좌 ‘니까야 제16강 불교 우주론 1’이다. 유튜브에 실려 있는 동영상 강좌를 보면 삼계에 대하여 학생수준으로 나누었다. 욕계는 초등학교, 색계는 중등학교, 무색계는 고등학교로 비유 하였다. 해탈과 열반은 대학수준이다. 욕계의 경우 초등학교 1학년을 지옥, 2학년을 아귀, 3학년을 축생, 4학년을 아수라, 5학년을 인간, 6학년을 욕계천상으로 비유하였다. 한마디로 욕계는 요즘말로 ‘초딩’수준이라는 것이다.
욕계는 문자 그대로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욕망을 떠나서는 욕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욕계의 특징은 ‘고락’이라 하였다. 고통스러운 것과 줄거움이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 지옥과 같은 극단적 고통이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욕계천상처럼 극단적인 즐거움만 있는 곳이 있는 곳이 욕계이다. 인간은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맛 볼 수 중간지대라 볼 수 있다.
욕계의 특징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욕계는 암수가 있지만 색계는 암수가 없다. 이는 당연하다. 욕계는 욕망이 극대화된 곳이기 때문에 식욕과 더불어 성욕이 집지배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색계의 경우 선정수행의 공덕으로 태어나는 세계이기 때문에 욕망이 있을 수 없다.
선정상태에서는 오장애라 하여 감각적 욕망, 성냄등이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식욕이나 성욕이 일어 날 수 없다. 그래서 오로지 선정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과 기쁨과 행복, 그리고 평온만이 있다. 이런 색계에 암수구별이 있을 수 없다.
욕계에서는 욕망으로 음식을 먹는다. 색계에서는 기쁨을 먹고 산다. 이는 초기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언제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 세계가 생성되는 때가 있다. 세계가 생성될 때에 텅빈 하느님의 궁전이 나타난다. 그 때 어떤 뭇삶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서 죽어서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D1) 라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색계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먹는 다면 선정상태에서 얻는 기쁨을 음식으로 한다. 마치 너무 기쁘면 배고픈 것도 잊어 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욕계에서는 음식을 먹고 살지만 색계에서는 기쁨을 먹고 산다.
“야, 이 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
음식을 먹어야만 사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단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배고픔에 대한 고통을 느낀다. 그렇다고 배불리 양껏 먹는다고 욕망이 다 충족되는 것일까? 이 때 나오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하여 범일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음식을 먹고 살아요.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다보면 들어보면 재밋어요. ‘야, 이 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라고 막 싸우잖아요. 그렇게 싸워 본 사람 없어요?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먹는 거라고. 그렇죠? 그사람 주장은. 그게 부처님 교리에 다 있어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16강 불교 우주론 1)
범일스님 유튜브동영상 강좌에 따르면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다고 하였다. 밥이외 허기진 것이 있다고 하였다.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 견딜 수 없듯이 또 다른 먹거리를 먹지 않으면 허기져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부싸움 중에 “야, 이 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네 가지 음식이 있는데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베고픈 것이 또 있다는 뜻이다.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범일스님은 니까야에 이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네 가지 음식에 대한 것이다. 네 가지 음식이라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Katame cattāro? Kabaliṅkāro1 āhāro oḷ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ṇaṃ catutthaṃ. Ime kho bhikkhave, cattāro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첫째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 둘째 접촉의 자양분, 셋째 의도의 자양분, 넷째 의식의 자양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들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자양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네 가지 음식, 즉 자양분에 대하여 ‘물질의 자양분(Kabaliṅkāra āhārā), 접촉의 자양분(sukhumo phasso āhārā), 의도의 자양분(manosañcetanā āhārā), 의식의 자양분(viññāṇaṃ āhārā)이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자영분에 대하여 일반적 해석과 주석적 해석이 있다.
일반적 해석으로서의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여기서 물질의 자양분을 단식(段食) 이라 하는데 우리가 먹는 밥 등 음식을 말한다. ‘접촉의 자양분(sukhumo phasso āhārā)’은 촉식(觸食)이라 하여 오감으로 먹는 양식을 말한다. ‘의도의 자양분(manosañcetanā āhārā)’은 의사식(意思食)이라 하여 사고와 함께 하는 의지적 양식이라 한다. ‘의식의 자양분(viññāṇaṃ āhārā)’은 식식(識食)이라 하여 의식적 양식이라 한다.
주석에 따르면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단식(段食) 은 육체를 지탱하고, 사대인 물질을 유지시킨다. 촉식(觸食)은 느낌을 만들어 정신과 물질을 유지시킨다. 의사식(意思食)은 업을 생성하여 재생을 지탱한다. 식식(識食)은 정신과 물질을 만드는 재생의식으로서의 역할이다.
물질적인 음식의 조건과 정신적 음식의 조건
네 가지 자양분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존재의 지속을 유지하게 하는 특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S12:11) 라고 명백하게 규정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음식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먹고자 하는 ‘갈애’에 따른 것이며 이런 갈애는 결국 집착으로 발전되어 업으로서의 존재를 생성시켜 버리고 마는 결과가 된다. 이는 단식 뿐만 아니라 촉식, 의사식, 식식도 마찬 가지이다.
덩어리진 음식은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물질을 생기게 하는 요인이 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음식이 영양소가 되는데 이는 잇달아 여러 번 ‘팔원소’가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순수한 팔원소에 있는 영양소는 다시 그 다음의 순수한 팔원소를 생기게 한다. 이렇게 팔원소는 열 번이나 열 두 번 까지 생긴다.”라 하였다. 마치 자가분열 되는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포분열하듯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음식은 몸속에서 칠일 동안 몸을 지탱하게 해 준다고 하였다. 칠일 이상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면 자신의 몸을 태워 몸이 유지됨을 말한다. 건강이나 체중을 줄이기 위한 단식을 할 때 최소한 칠일 이상 해야 함을 말하는 것 같다.
아비담마논장에 따르면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물질적인 음식의 조건과 정신적음식의 조건으로 나눈다. 여기서 물질적인 음식의 조건은 우리들이 먹는 밥과 같은 음식으로서 우리 몸을 지탱하게 함과 동시에 존재를 끊임 없이 윤회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음식을 삼키는 순간부터 머무는 순간에 물질을 생기게 한다. 음식에서 생긴 물질의 무리(깔라빠) 가운데 있는 영양소는 그 다음의 순수한 팔원소(suddhatthaṃaka)를 생기게 하며, 그 순수한 팔원소에 있는 영양소는 다시 그 다음의 순수한 팔원소를 생기게 한다. 이렇게 팔원소는 열 번이나 열 두 번 까지 생긴다.”(아비담마 6장 13절) 라 하였다.
정신적음식의 조건은 단식을 제외한 촉식, 의사식, 식식을 말한다. 그런데 정신적인 음식도 물질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물질적 음식이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비담마에 따르면 업이나 마음 역시 물질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색계의 과보의 마음과 전오식을 제외한 75가지 마음은 잠재의식의 첫 번째 순간부터 마음에서 생긴물질을 생산한다. 그것은 일어나는 순간에 마음에서 생긴물질을 생산한다.” (아비담마 6장 11절) 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네 가지 음식은 갈애가 그 근원이다”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네 가지 자양분이 물질을 생겨나게 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렇게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존재를 유지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존재가 지탱하고 유지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윤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네 가지 음식은 갈애가 그 근원이다.’라고 하신 것은, 재생연결이 일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자기존재(몸)라 불리는 음식들은 이전의 갈애(즉, 재생을 있게 한 이전의 갈애)가 그 근원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재생연결의 순간에 중생들에게는 중생이라는 존재의 지속[상속, 흐름]을 통해서 생겨난 몸이라는 물질들 안에 영양소가 생겨난다. 이것이 갈애를 근원으로 한 업에서 생긴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다.
그러면 이러한 재생연결식과 함께하여 일어난 감각접촉과 마음의 의도와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뜻하는 알음알이(식)가 각각 갈애를 근원으로 하여 일어난 업에서 생긴 ‘감각접촉(촉식)’과 ‘마음의 의도(의사식)’와 ‘알음알이(식식)’라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SA.ii.28)
(초불연 각주 80, 상윳따2권,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주석을 근거로 하여 단식과 촉식, 의사식, 식식을 설명하였다. 결론적으로 모든 음식은 재생과 윤회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밥을 먹으면 몸이 지탱되고 물질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단식이 윤회의 원인이 되고, 오감에 따른 감각접촉인 촉식과 마음의 의도라 볼 수 있는 의사식과 분별하는 식식은 정신적 식사로서 역시 재생과 윤회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네 가지 식사에 대하여 “재생연결의 순간에 음식은 전생의 갈애를 근원으로 하여 생긴다.” (SA.ii.28) 라고 하였다.
“기름과 심지를 조건으로 등불이 켜지면”
네 가지 음식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아하라(āhara)’라 한다. 이를 전재성님은 ‘자양분’으로 번역하였고, 초불연에서는 ‘음식’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음식이 제공되는 한 생명이 유지 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물질적 음식이든 정신적 음식이든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연료가 된다. 이런 연료는 갈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먹고 싶은 갈애, 접촉하고 싶은 갈애, 의도를 가진 갈애, 지식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그래서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음식은 존재를 지탱하기 위한 연료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존재의 연료는 자가생산된다는 사실이다. 물질적 음식이 목구멍에 들어 오면 영양소로 변하면서 열번에서 열두번 자체적으로 물질을 생산해 낸다. 이는 단지 어머니의 음식에 의존하는 태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연료에 정신적식사도 있다라는 사실이다. 이는 의도를 가졌을 때 마음의 물질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같은 요소를 말한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은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강력한 땔감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존재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존재의 불꽃은 언제 꺼질까? 이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앗싸지여, 예를 들어 기름과 심지를 조건으로 등불이 켜지면 그 기름과 심지가 소모되어 연료가 떨어지면 불이 꺼지듯, 앗싸지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그가 몸이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끼면, ‘나는 몸이 한계에 달한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S22.88)”라고 설명하고 있다. 존재를 불꽃으로 보고 존재를 지탱케 하는 것을 연료로 본 것이다. 그런데 연료는 네 가지 음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음식, 즉 빠알리어로 아하라는 ‘우빠다나(집착)’과 같은 것이다. 결국 음식에 대한 집착이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것이다.
존재를 윤회케 하는 네 가지 식사
사람들은 매일 매끼마다 밥을 먹고 산다. 어떤 이는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어?”라 한다. 밥을 먹어서 육신을 지탱하긴 하지만 정신적으로 허기져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정신적 식사, 즉 촉식과 의사식과 식식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사는 윤회의 원인이 된다.
단식과 촉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욕계감옥’을 탈출 할 수 없다. 그래서 지나치게 음식에 집착하는 자에 대하여 축생에서 온지 얼마 안 되었다고 말하고, 또 축생으로 갈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초딩수순의 욕계사람들은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어?”라며 끊임 없이 먹어댄다. 그러나 욕망을 벗어버린 색계중생들은 선정상태의 기쁨을 음식으로 살아 간다.
네 가지 음식에 대한 집착의 원인은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에 따른다. 마치 기름과 심지를 조건으로 등불이 켜지는 것처럼 네 가지 식사로 끊임 없이 재생의 연료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stn338) 라며 음식절제를 이야기 하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껄떡 거리며 네 가지 식사를 한다. 한끼라도 먹지 않으면 배가 파 죽을 지경이다. 더구나 포만감이 생기면 이제 “야, 이 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라고 말한 다는 것이다. 존재를 윤회케 하는 식사를 매일 하고 있는 것이다.
2015-11-2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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