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불교에 접목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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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용어중에 ‘로그인 하게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서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닷컴에 연재 되고 있는 강병균교수의 ‘환망공상’시리즈가 그것이다. 특히 업과 내세와 윤회에 대한 부정이 그렇다.
불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고 있는 것이 윤회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온다. 이렇게 많이 언급되는 것이 ‘삼사라(윤회)’이다. 이는 윤회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을 보면 윤회와 관련 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이라는 잣대로 가르침을 난도질 하였을 때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최근 불교닷컴에 기고된 강병균교수의 글 제목이 ‘윤회의 문제점’이다. 한 수학자의 눈으로 본 윤회관이라 볼 수 있다. 글에서 강병균 교수는 종교진화론을 이야기하였다. 생물이 진화 하듯이 종교도 진화한다는 것이다. 이에 “인류라는 집단생물체의 안위와 행복이 궁극적 목적”이라 하였다. 이런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많은 문제점을 내포 하고 있다.
용수가 부처님 보다 한 수 위?
종교가 진화하는 것이라 한다면 종교의 교리자체가 불완전한 것이고 또 미완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는 것 같다. 대승주의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공사상을 전개하고, 공사상에서 모순이 발견되자 유식사상으로, 유식사상은 여래장으로, 그리고 중국에 건너 온 불교가 마침내 선종이라는 중국식 불교로 정착 되었듯이 끊임 없이 발전해 온 것이라 하였다. 이를 불교의 진화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덜 완성된 것이 된다. 그래서일까 김성철 교수는 자신의 논문 ‘(禪)의 깨달음 그 정체와 문제점’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부처님은 몇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 그런데 그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은 모두 사구로 배열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세상과 자아가 상주하는지’ 여부에 대해 질문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 세상과 자아는 ①상주하는가, ②무상한가, ③상주하면서 무상한가, ④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가?’ 그리고 부처님은 이 네 가지 판단 가운데 그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고 침묵하셨다. 간화선에서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조주 스님의 ‘무’(無)라는 대답을 ①‘있다’거나 ②‘없다’거나 ④‘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이해하는 것이 모두 틀리듯이, ‘이 세상과 자아의 한계’에 대해 사구(四句) 가운데 그 어떤 판단으로 이해해도 모두 옳지 않은 것이다. 간화선 수행자는 사구분별의 출구를 모두 막고 은산철벽과 같은 화두를 대면하고 앉아 있는데, ‘중론’에서는 논리적 분석의 몽둥이로 우리의 사구분별 하나 하나를 모두 부수어 버린다. 그리고 무기설에서는 사구로 배열된 형이상학적 의문들에 대해 부처님이 은산철벽과 같이 침묵하신다.
(김성철교수, (禪)의 깨달음 그 정체와 문제점)
김성철교수의 글을 보면 마치 용수가 부처님 보다 더 위대한 분으로 묘사 되어 있는 듯 하다. 말룽끼야뿟따가 “이 세상은 유한한가?”등의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무기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무기하였다. 이렇게 무기한 것에 대하여 용수는 중론으로서 논파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용수가 부처님 보다 한 수 위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일까 후대 대승에서는 용수에 대하여 보살 칭호를 붙여 주고 ‘제2의 석가’라 하였다. 대승불교의 시조는 사살상 용수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을 무시하는 선종스님들
부처님에 대하여 무시하는 말을 선종스님들에게서 종종 듣는다. 스님들이 부처님을 지칭할 때 종종 하는 소리가 “석가모니가” 또는 “석가가”라는 말이다. 마치 동네친구 부르듯이“석가모니가”라 하고, 동네 옆집 사람 부르듯이 “석가가”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석가모니 그 사람이”라 하는가 하면 조계종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스님은 “석가 그대는”이라 하였다. 이렇게 선종스님들이 부처님 무시하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 것?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큰 원인 중의 하나라 본다.
古佛未生前 고불미생전
凝然一相圓 응연일상원
釋迦猶未會 석가유미회
迦葉豈能傳 가섭기능전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선가귀감)
서산대사가 지은 선가귀감에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 따르면 부처님도 몰랐던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홀로 밝은 동그라미(凝然一相圓)’라 한다. 여기서 홀로 밝다는 것은 ‘자재함’을 말한다. 동그라미는 ‘존재의 근원’을 말한다. 스스로 홀로 자재하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말이다.
게송에서는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라 하였다. 부처님도 깨닫지 못하였는데 전법제자인 가섭도 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은 아직 덜 깨달은 것이 된다.
진제스님이 기립박수 받은 이유는
몇 해전 진제스님이 종정이 되기 이전에 뉴욕에서 종교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하여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는 진제스님의 트레이드 마크라 볼 수 있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煎 本來面目)’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진제스님이 던진화두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가(What is my true self before my parents gave birth to me?)”이다. 그런데 이 말은 놀랍게도 바이블 요한복음 제1장에 실려 있는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라고 시작된다. 그분이 세상에 창조되기도 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분이란 무엇일까? 바로 이 부분이 선종스님들의 화두 ‘부모미생전본래면목’에 해당되고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에 해당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로 하는 듯이 요한복음 1장 15절을 보면 요한이 그분에 대해서 증언하며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보다 더 위대 하신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분이 바로 내가 말한 그분이다.”라 한 것이다. 진제스님이 기립박수를 받은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뭐? 근본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고?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윤회가 부정되고,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뒷방’신세이다. 부처님을 친구이름 부르듯이 “석가”라 한다.
어떤 스님은 기독교에는 ‘신성’이 있고 불교에는 ‘불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는 불교는 근본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지난 2011년 조계종 화쟁위원회 주관으로 추진하려 하였던 불교인을 위한 종교평화선언, 즉 소위 ‘아쇼카선언’ 초안에서는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 하였다. 다행히도 이 선언문은 불발되었다. 만약 선포 되었더라면 한국불교는 기독교에 흡수 되는 과정이 되었을 것이다.
과학이라는 종교
강병균교수의 환망공상시리즈를 보면 부처님무시하기로 일관하고 있다. 부처님이 팔만사천이라는 법문을 통하여 그토록 윤회에 대하여 말씀 하시고 벗어나는 방법을 말씀 하셨음에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재단하였다. 그래서 윤회에 대하여 “문제는 한때 유용했던 도구일지라도, 인간의 인지가 비약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도저히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다.”라 하였다. 부처님이 설한 윤회론을 폐기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한때는 에덴동산이라는 개념이 유효했지만,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화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선행을 하게 만들었지만, 도도한 과학의 발달은 진화론을 발견하여 에덴동산이라는 방편을 무력화하고 있다. 그게 20세기 말에 가톨릭의 진화론 수용으로 나타났다. 과학발전은, 이런 종교적인 방편의 무력화를 가져왔으나, 기후와 기아와 질병으로부터의 대폭적인 해방을 가져와 인류의 행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종교가 인류행복에 기여하려면 과학을 받아들여 교리를 개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구시대의 미신과 맹신으로 남을 것이다.
(강병균교수, 윤회(輪回)의 문제점,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76, 불교닷컴 2015-11-30)
강병균교수는 윤회에 대하여 마치 바이블에 실려 있는 에덴 동산에 비유하고 있다. 마치 윤회에 대하여 창조론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강병균교수는 창조론도 믿지 않고 윤회도 믿지 않는 ‘무신론자’임에 틀림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니 불자라 볼 수 없다. 다만 믿는 것이 있다면 과학이라는 종교, 즉 ‘과학교’일 것이다. 그래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인류가 기아와 질병 등으로부터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항모전, 함재기전, 탱크전
과학이 인간을 편리하게 해 준 것만은 분명하다. 과학의 시대에 수 많은 발명이 이루어져서 그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과학이 발전되면 행복도 저절로 가져다 주는 것일까? 강병균교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과학의 시대에 발명품으로 인하여 불행을 겪고 있는 측면을 간과 하고 있는 듯 하다.
요즘 유튜브를 즐겨 보고 있다. 틈만 나면 유튜브에 접속하여 이것 저것 보고 있는데 관심 있게 보는 것은 불교관련 동영상 강좌이다. 스님이나 재가법사의 강좌중에는 들을 만한 것이 있어서 마치 라디오 틀어 놓고 듣듯이 일하면서 한쪽 귀로 듣는다. 그런 유튜브에는 갖가지 정보도 많다. 최근 관심 있게 본 것은 ‘전쟁’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세계2차대전에 대한 동영상이다.
세계2차대전에 대하여 오래 전 TV에서 방영된 다큐프로가 유튜브에 많이 올려져 있다. 전쟁다큐를 보면 인류가 발명한 무기가 어떻게 인류를 불행으로 몰아 가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태평양에서 항모전, 항모에서 발진한 전투기에 의한 함재기전, 그리고 동유럽평원에서 이루어진 탱크전 등을 말한다.
전쟁관련 동영상을 접하였을 때 느낀 점은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대량살상무기도 함께 개발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전 전쟁에서 볼 수 없었던 대량살상이 다반사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 정점이 원자폭탄 투하이었다.
과학을 받아들여 교리를 개선해야 한다?
강병균교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이는 한쪽면만 본 것이다. 과학기술이 편리를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준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이 발전 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행복이 있었다. 어쩌면 그 시대가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이 인류를 해방시켰다고 말하면서 “과학을 받아들여 교리를 개선해야 한다.”라며 강변한다. 더구나 윤회포기와 같은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구시대의 미신과 맹신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천명하였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불자들은 얼마나 동의할까?
과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대단히 경솔하고 유치한 발상이다. 초등학교 학생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더구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아 교리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고 과학적 이론에 따르라는 것이다.
강교수는 자신의 소개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이라고 하였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라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렇다면 혜암종정은 어떤 사람일까? 유튜브시대에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어느 스님의 동영상법문에서 알 수 있다. 그 스님은 혜암스님에 대하여 “전에 혜암스님 있잖아요. 일평생 참선한 사람 아녜요. 원당암에 있는 사람. 종정도 이년 하다 죽은 사람. 그 사람들이 다 엉터리여. ‘공부하다 죽어 버러라’그런다는 거. 그 사람들 머리를 잘 깍아요. 머리가 빈들빈들해. 열심히 사는데 굉장히 과격하고. 지금 보면 어찌 공부했길레 그런가 하고. 그때는 모르겠다라구요. 그런데 이런 공부를 하고 나니까 ‘아, 세상을 이렇게 살다 가버리는구나’우리는 종정이니 어른이니 그러잖습니까? 공부가 안 나온거에요.”(육조사_현웅스님_2015년 8월 13일 목요강설 법문) 라 하였다.
과학을 불교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과학을 불교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 하려면 초기경전을 읽어 보아야 한다. 그것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래야 정견이 생겨서 허튼소리를 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계속 사견을 이야기한다면 구업을 짓게 된다. 이는 십악에서 열 번째 항에 해당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존]
“잘못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보시도 없다. 제사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흘연히 태어나는 뭇삶도 없다.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곧바로 알고 깨달아 가르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고 전도된 견해를 갖습니다.
장자들이여, 이것들이 정신적으로 세 가지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라 잘못된 길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장자들이여, 이와 같이 가르침이 아닌 것을 따르고 바른 길이 아닌 것을 실천하는 것을 원인으로 어떤 뭇 삶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 (M41)
2015-12-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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