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바다가 눈물 한방울로, 이어령교수의 ‘축소지향인의 일본인’을 보고
글을 쓸 때 난감할 때가 있다. 그것은 명사와 명사를 연결할 때 ‘의’가 두 번 들어 갔을 때이다. 예를 들면 ‘오온은 존재의 체험의 작용적 요소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전재성님의 각주에서 볼 수 있다. 소유격 조사 ‘의’가 연속으로 붙은 ‘존재의 체험의 작용적 요소들’라 하였는데 부자연스럽다.
소유격 조사 ‘의’는 한 번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두 번 사용하면 어색해 보인다. 그렇다면 의를 세 번 사용하면 어떨까?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근 이어령교수의 ‘축소지향인의 일본인’을 구입하였다. 오래 전 일본어로 된 책을 구입해서 읽은 바 있다. 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친구와 대화하다가 책을 알게 되었다. 그 때 당시 책이 한국어로 출간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이었다. 친구는 책이야기를 하며 책에서 언급된 일본인들의 특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책을 구입하기로 하였다.
그때 당시 이미 베스트셀러이었던 한국어판 대신에 일본어 원어로 된 것을 구입하였다. 문고판으로서 글자가 세로로 되어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구입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서 읽어 갔다. 그리고 단어를 기입해 두었다. 기입된 글씨가 빼곡하여 마치 교과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단어장도 만들었다. 이렇게 약 1년간 두 세 번 보았다. 책을 교재 삼아 일본어 공부를 한 것이다. 이런 노력이어서일까? 일본어실력이 향상 되었다. 다음해 입사 하여 그룹에서 실시 하는 일본어 검정시험을 보았는데 3급을 획득 하였다.
이번에 두 번째로 책을 구입하였다. 그런데 그때 당시 책 보다 내용이 많이 보완 되어 있다. 30년 전에 출간 되었던 것보다는 사이즈가 두 배로 커졌다. 그리고 새롭게 추가된 내용도 많다. 그러나 기본적은 구성은 동일하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왜 소유격 조사 ‘노(の)’를 세 번이나 사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책을 처음 접하였을 때는 우리나라가 막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 이었다. 이전에는 전자회로가 트랜지스터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중 후반 일본에서는 전자산업이 매우 발달하여 ‘전자왕국’이라 불리웠다. 그래서 앞서 간 일본을 따라 가기에 바빴다. 그런 시절 입사하여 접한 것이 일본기술서적이었다.
사내 도서관에서 일본기술서적인 트랜지스터회로를 접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래서 이어령교수의 책을 교과서 삼아 일본어 공부를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술서적을 읽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어령교수의 책을 접하면서 인상적인 구절이 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새로 산 책에도 그 표현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축소지향의 문화가 사람이 아니라 나무에 나타나면 거목을 축소한 분재가 되고, 우주의 산하에 나타나면 그것을 축소한 독특한 돌정원[石庭]이 된다. 그러한 상상력과 발상법이 현대에는 트랜지스터로부터 시작하여 반도체를 낳는다.
(이어령교수, 축소지향인의 일본인)
이어령교수는 일본인의 특징에 대하여 ‘축소지향’이라 하였다. 무엇이든지 작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작게 만들어 성공한 것이 트랜지스터와 반도체라 하였다. 80년대 중반 일본의 경제가 전성기를 구가 할 때의 일이다.
책에서 트랜지스터와 반도체가 축소지향의 산물이라는 것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책을 끝까지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축소지향은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수 많은 사례를 들고 있지만 가장 감명 깊은 것이 다음과 같은 ‘하이쿠’이다.
동해의 작은 섬 갯벌 흰 모래밭에
내 눈물에 젖어 게와 노닐다.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
われ泣きぬれて
蟹とたはむる
하이쿠는 우리나라 시조의 1/3 밖에 되지 않는다. 대부분 17자로 표현된다. 이 하이쿠는 모두 24자로 되어 있다. 이렇게 짧은 문구로 우주와 마음을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첫 번째 구절을 보면 ‘東海の小島の磯の白砂に’라 하여 소유격 조사 노(の)가 세 번 연달아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다. 두 번 허용할 수 있지만 세 번 허용하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어의 경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축소지향을 소유격 조사 노를 연달아 사용함으로 인하여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우선 무한히 넓은 ‘동해’가 ‘노(の)’에 의해 ‘작은 섬[小島]’으로 축소되고 그 섬을 또 갯벌[磯]로, 갯벌은 또 백사장[白砂]으로 차례차례 수축되어 마지막에는 점에 불과한 게[蟹] 잔등이로까지 응축되고 만다. 동해가 게 잔등이에서 끝난 것도 아니다. ‘내 눈물에 젖어’라고 했으므로 그 넓은 동해 바닷물은 결국 눈물 한 방울로 축소되어 버리고 만 셈이다.
(이어령교수, 축소지향인의 일본인)
일본 하이쿠에서 노를 세 개나 연용하고 있다. 이를 직역한다면 “동해의 작은 섬의 갯벌의 흰 모래밭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어령교수는 소유격조사 ‘의’ 하나만 사용하여 “동해의 작은 섬 갯벌 흰 모래밭에”라 하였다.
소유격 조사 노를 세 번 연용한 것은 넓은 세계를 하나의 상자속에 담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는 큰 상자 안에 또 상자가 있어서 연속으로 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동해의 너른 바다를 시인의 눈물한방울에 담아 버린 것이다. 이런 축소지향의 정신으로 인하여 ‘전자대국’을 이루었다는 것이 이어령교수가 강조한 것 중의 하나이다.
소유격 조사를 한 번 사용하면 부드럽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경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맛지마니까야 두 번째 경이 ‘삽바사와숫따(Sabbāsavasutta, M2)인데, 이를 전재성님은 ‘모든 번뇌의 경’이라 하여 소유격 조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서를 보면 소유격 조사 없이 ‘모든 모든 번뇌 경’이라 하였다. 이렇게 소유격 조사가 있고 없음에 따라 부드럽거나 딱딱한 느낌이 든다.
소유격 조사는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두 개가 들어가면 부자연스러워 진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세 개를 써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유격 조사 노를 연달아 사용함으로 인하여 축소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동해바다가 눈물 한방울로’ 축소되는 효과를 가져 온 것이다. 오랜 만에 이어령 교수의 책을 열어 보았다.
2015-12-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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