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 대보살을 요청하는 한국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2. 8. 16:25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대보살을 요청하는 한국불교

 

 

대보살을 요청하는 한국불교

 

어느 때 지방에 인연 있는 사람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스님한 분과 도반 두 분이서 방문하였다. 그 여성 분은 홀로 살고 있었다. 지방공업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서울의 타워펠리스 같은 곳이다.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이제 갓 결혼한 딸 부부에게 넓직한 아파트를 줄 정도이었다.

 

그 사람은 나이가 비슷한 또래이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외제 수입차를 몰고 다니며 골프를 치고 갖가지 취미활동을 하며 지낸다. 더구나 철마다 해외여행을 다녀서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 한다. 그런 한편 스님을 마치 부처님처럼 모신다.

 

그 분은 때 되면 스님을 초청하여 영양가 있는 음식을 대접하는가 하면 절에 보시도 꾸준히 한다. 과연 그 법우님은 어떻게 하여 그 많은 돈을 모았을까? 그것이 참으로 궁금하였다. 그래서 알아보니 뜻밖의 말을 들었다. 술집을 해서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종종 스님을 극진히 모시는 여인을 볼 수 있다. 시주도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스님건강도 챙겨 준다. 재산이 있는 경우는 절을 지어 주기도 한다. ‘대보살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여유 있는 대보살은 패션감각도 있어서 차별화된 법복을 입기도 하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닌다. 이렇게 스님을 보살피고 승가를 외호하는 것은 불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 보였을 때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든다. 은근하게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대보살을 요청한다. 재력 있는 여성보살을 말한다. 신심있 는 대보살이 후원하였을 때 스님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작고 하기 전에 가진 재산을 남김 없이 스님에게 양도 하였을 때 노후보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은 대보살에게 정성을 다 하는 것 같다. 청소년포교는 하지 않아도 나이 든 재력 있는 대보살을 잘 섬기는 것 같은 인상이다.

 

그 절 던져 버렸어요

 

모임에 어느 법우님이 있다. 그 법우님은 수 년 전 절을 하나 인수 하였다. 순례법회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이다. 남해안 작은 도시에 법당과 용왕이 모셔져 있는 두 동의 작은 전각이라 하였다.

 

절을 구입하게 된 것은 어느 스님의 요청 때문이라 하였다. 처녀 시절부터 염불선으로 유명한 C스님을 따랐는데, C스님이 작고하고 난 다음 상좌스님과 절 구입과 관련하여 대화를 하였다고 한다. 법우님은 원래 서울에다 포교당을 건립하려 하였으나 상좌스님의 의견을 존중하여 남해안에 다 구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스님에게 절을 맡겼다고 하였다.

 

법우님은 청과물도매상을 하고 있다. 아마 어렵게 번 돈으로 절을 구입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구입한 절에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지만 스님에게 맡겼기 때문에 스님이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정적으로 들어 가는 비용은 자신이 부담한다고 하였다.

 

어느 때 순례법회 갔었을 때 그 법우님에게 물어 보았다. 절이 잘 되어 가는지 물어 보자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그 법우님 말하기를 그 절 던져 버렸어요라 하였다. 더 이상 물어 보지 않았다.

 

불자들이 절을 지어 승가에 보시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재력이 되는 경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 줄 수도 있지만 승가에 보시하면 엄청난 공덕을 쌓는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 스님에게 보시한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승가에 보시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안면 있는 스님에게 재산을 맡기거나 절을 지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절이나 재단이 스님소유가 된다. 그 결과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소유의 개인사찰이 공찰 보다 더 많아 졌고 또한 재단형식으로 재산관리를 하고 있다.

 

아나타삔디까는 사채업자?

 

재가자가 자신의 재산을 승가에 보시하였다는 이야기가 초기경전에 많이 전해져 온다. 대표적으로 아나타삔디까를 들 수 있다. 경의 주석에 따르면 상업으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또 어느 주석에 따르면 금융업으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나타삔디까가 금융업자이었다는 이야기는 초불연 각주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내용을 보면  ‘금융업을 하는 [사람]’은 seṭṭhi를 옮긴 것이다. Singh에 의하면 (pp.249-251) 셋티는 북인도의 큰 도시에 있었던 사채업자나 금융업자를 말한다고 한다. 원래는 대상이나 동업 조합의 수장들이 개인적으로 금융업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급고독 장자도 금융업자이었다.” (초불연 상윳따1 412번 각주, 각묵스님)라 되어 있다. 불자들이 알고 있는 아나타삔디까와는 이미지가 다른 것이다.

 

아나타삔디까는 정말 사채업자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공덕은 저세상에서 뭇삶들의 의지처, 불교다운 릴레이후원(2014-11-26)’라는 제목의 글에서 반론한 바 있다. 그래서 “seṭṭhi에 대한 또 다른 의미로 ‘Ashes; foreman of a guild; a cashier, treasurer; a wealthy merchant’라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seṭṭhi는 장사해서 큰 돈을 번 자산가를 말한다. 오늘날 백만장자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금융업자라 하여 마치 돈놀이하여 재산을 형성한 것처럼 번역하였다면 부적절하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아나타삔디까를 금융업자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라고 글을 올린 바 있다.

 

기녀 암바빨리 이야기

 

어떻게 돈을 벌었든지 자신의 재산을 청정한 승가에 보시한 공덕은 후대에 귀감이 되고 있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기녀 암바빨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녀가 자신의 재산을 승가에 보시하였다는 이야기는 율장대품과 디가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 율장대품 약품의 다발에 기녀 암발리빨리이야기가 있고,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역시 똑 같은 이야기가 보인다.

 

기녀는 기생을 일컫는 말이다. 이를 유녀라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창녀라고도 한다. 창녀, 유녀, 기녀라 불리 우는 여인은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 보는 기녀 바수밀다는 대승불교에서 53명의 선지식에 들어 간다는 사실이다.

 

구도여행을 따나는 선재동자는 창녀로부터 가르침을 배운다. 내용을 보면 “어떤 중생이 나를 끌어 안으면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을 거두어주면서 떠나지 않는 삼매를 얻으며, 어떤 중생이 내 입술만 한 번 맞추어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의 복덕을 늘게 하는 삼매를 얻는다. (화엄경 입법계품, 바수밀다편) 라고 되어 있다. 입법계품에 따르면 애욕에 가득 찬 어떤 중생이 창녀인 자신을 안거나 입을 맞추면 애욕이 사라지는 삼매를 얻는다는 것이다 

 

원림을 승가에 보시한 암바빨리

 

초기경전에서도 기녀이야기가 있다. 그렇다고 화엄경에서 보는 것처럼 기녀를 선지식 삼아 배웠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기녀가 돈을 모아 사원을 지어 승가에 보시했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이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기녀 암바빨리의 영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암바빨리]

“세존이시여, 저는 이 원림을 부처님을 비롯한 수행승의 참모임에 바칩니다.

 

세존께서는 원림을 받으셨다. 그리고 기녀 암바빨리를 가르침에 대한 말씀으로 교화하고 북돋우고 고무시키고 기쁘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나셨다.

 

(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기녀 암바빨리는 부처님이 베살리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부처님을 만나고자 부처님 있는 곳으로 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 대한 묘사를 보면 기녀 암바빨리가 얼마나 큰 부자이었는지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기녀 암바빨리는 아주 훌륭한 수레를 준비해서 그 아주 훌륭한 수레에 올라타고 아주 훌륭한 수레와 함께 베쌀리 시를 출발해서 자신의 승원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D16) 라고 되어 있다. 기녀 임에도 수레를 타고 다녔고 더구나 사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기녀 암바빨리는 베살리에서 큰 돈을 모았다. 이는 릿차비인들이 그렇다면, 암바빨리여, 그 공양금을 십만 금에 양도하시오.”(D16)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십만금이 얼마나 큰 금액인지 알 수 없으나 릿차비인들이 요구하는 공양금을 거절 할 정도이면 상당한 재산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암바빨리는 부처님을 만나 뵈었다. 부처님은 암바빨리를 위해 법문을 하였다. 이에 암바빨리는 독려 받고, 고무되고, 희열에 가득 찼다고 했다. 그러자 암바빨리는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수행승의 무리와 함께 내일 저의 공양을 받아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침묵으로 허락하였다.

 

암바빨리는 기녀임에도 부처님에게 공양을 하게 되었다. 이에 릿치비인들이 십만금을 줄 테니 공양을 양도하라고 했다. 그러나 암바빨리는 “귀공자들이여, 베쌀리 시를 영지와 함께 다 준다고 하여도 저는 이 공양을 양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D16) 라 하였다.

 

마침내 암바빨리는 부처님을 공양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경에서는 암바빨리는 부처님을 비롯한 수행승들에게 여러 가지 훌륭한 음식을 몸소 대접하여 그들을 기쁘게 했다.” (D16) 라 되어 있다. 몸을 파는 기녀가 부처님을 비롯한 거룩한 승가의 성자들에게 몸소 음식을 나누어 준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원림을 승가에 보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지바까 꼬마라밧짜

 

경에 따르면 기녀암바빨리는 십만금을 주어도 공양권을 팔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훌륭한 수레를 타고 다니고 자신의 승원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많은 돈을 벌었을까? 이에 대하여 위나야(율장)에서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율장 대품에 기녀 살라바띠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율장대품에 지바까 꼬마라밧짜이야기가 있다. 유명한 명의 지바까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경에 따르면 의사 지바까는 약에 사용되지 못할 푸성귀는 하나도 없다.” 라 하였다.  그런데 지바까의 출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매우 기구하다. 지바까는 버려진 아이이었기 때문이다.  

 

기녀 살라바띠는 하루 밤을 자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런데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여자가 임신하면 남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며 아이를 낳게 되자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 버려진 아이를 지나가던 왕자 아바야가 보고 데려다 길렀다. 이것이 지바까 꼬마라밧짜이야기의 시작이다.

 

하룻밤에 오십금을 번 암바빨리, 하룻밤에 백금을 번 살라바띠

 

부처님 당시 기녀는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율장대품에서 살라바띠이야기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살라바띠는 어떻게 기녀가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그때 당시 번영하였던 베살리와 베살리의 기녀 암바빨리에 대한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어느 대신이 볼일을 보러 베살리에 갔다가 기녀 암바빨리에 대한 이야기를 빔비사라왕에게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지도층인사]

폐하, 베쌀리 시가 번영하고 풍요로워 인구가 많고 사람이 붐비고 먹을 것이 많고, 거기에는 칠천칠백개의 전루와 칠천칠백개의 중각과 칠천칠백개의 공원과 칠천칠백개의 연못이 있습니다. 기녀 암바빨리가 아름답고 보기에 좋고 세련된 최상의 미모를 갖추고 춤과 노래와 연주에 능숙한데, 원하는 사람마다 모여들자, 하룻밤에 오십금을 벌고 있고, 그 때문에 베살리는 더욱 번창하고 있습니다. 폐하, 우리들도 기녀를 유치하면 좋겠습니다.”

 

(지바까 꼬마라밧짜, 율장대품 Vin,I.269, 전재성님역)

 

 

대신들은 베살리의 번영하는 모습을 보고서 기녀유치를 건의 하였다. 일종의 공창제도와 같은 것이다. 국가에서 최고의 미녀를 뽑아 육성한 것이다. 그래서 뽑힌 여인이 살라바띠이다.

 

기녀는 몸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경에 따르면 살라바띠에 대하여 춤과 노래와 연주에 능숙해졌다.” (Vin,I.269) 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식으로 따지면 기생이고, 일본식으로는 게이샤라 볼 수 있다.

 

살라바띠는 하루밤에 얼마를 벌었을까? 경에 따르면 원하는 사람마다 모여들자, 하룻밤에 그 대가로 일백금을 벌었다.” (Vin,I.269) 라 되어 있다. 이는 베살리에서 기녀 암바빨리가 하루밤에 오십금을 번 것 보다 두 배가 많은 금액이다.

 

살라바띠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런데 덜컥 임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몰래 낳아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나중에 유명한 의사 지바까라는 이야기이다.

 

보시하면 어떤 갚음이 기대될까?

 

기녀 암바빨리는 하룻밤을 잔 대가로 오십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훌륭하게 치장을 한 수레를 타고 다니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승원을 지었다. 더구나 부처님에게 공양을 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원림을 승가에 보시하였다. 이런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맛지마니까야에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M142)’이 있다. 경에 따르면 축생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백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 (M142)라 하였다. 개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도 보시공덕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막행막식하는 자에게 보시해도 갚음이 기대될까? 이에 대하여 부도덕한 일반 사람들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천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 라고 하였다. 어느 경우이든지 보시하면 상당한 과보가 기대 됨을 말한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보시는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난 밖의 사람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천억 배의 갚음이 기대된다. 흐름에 든 경지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분에게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갚음이 기대된다.

 

하물며 흐름에 든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물며 한 번 돌아오는 경지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물며 한 번 돌아오는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물며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물며 돌아오지 않는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물며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는 길에 들어선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물며 여래의 제자인 거룩한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물며 연기법을 깨달은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물며 이렇게 오신 분, 거룩한 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분에게 보시한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2, 전재성님역)

 

 

여기서 보시는 사대필수품을 말한다. 즉, 먹는 것, 입는 것, 와좌구, 의약품이다. 이 중 가장 일반적인 보시가 탁발음식이다. 경에 따르면 가장 수승한 보시가 부처님에게 보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몸을 팔았던 기녀 암바빨리는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보시하였기 때문에 최상의 보시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반승반속에게 보시하면

 

몸을 팔아서 번 돈을 승가에 보시해도 그 공덕은 매우 수승한 것이다. 그런데 더러운 돈을 반승반속의 비구에게 보시하면 어떻게 될까? 계행이 엉망인자에게 보시하였을때 공덕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보시하는 자도 비도덕적이고 나쁜 성품을 갖고 있고 보시 받는 자도 비도덕적이고 나쁜 성품을 갖고 있다면, 보시하는 자도 청정하지 못하지만 보시 받는 자도 청정하지 못한 보시가 이루어진다.” (M142) 라 하였다.

 

청정하지 못한 보시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자기에게 시물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큰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Visdm. 1.154) 라 하였다. 반승반속에게 보시하였을 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최악은 청정하지 못한 자가 청정하지 못한 자에게 보시는 하는 것이다. 몸을 팔아 번돈으로 반승반속에게 보시 하였을 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보시가 된다.

 

청정한자에게 보시하였을 때

 

청정하지 못한자가 청정한자에게 보시하면 그 결과는 어떨까? 몸을 팔아 모은 돈으로 청정한 비구에게 보시하거나 청정승단에 절을 지어서 기부하는 행위는 어떠할까?  이에 대하여 보시하는 자는 비도덕적이고 나쁜 성품을 갖고 있으나 보시 받는 자는 도덕적이고 좋은 성품을 갖고 있다면, 보시 받는 자는 청정하지만 보시하는 자는 청정하지 못한 보시가 이루어진다.”라 하였다. 보시 받는 자가 청정하다면 비록 보시하는 자가 청정하지 않더라도 청정한 보시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보시는 어떤 것일까? 이는 보시하는 자도 도덕적이고 좋은 성품을 갖고 있고 보시 받는 자도 도덕적이고 좋은 성품을 갖고 있다면, 보시하는 자도 청정하지만 보시 받는 자도 청정한 보시가 이루어진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보시하는 자도 청정하고, 보시 받는 자도 청정하였을 때 최상의 보시가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계행을 지키는 자가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보시하는 자의 덕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만드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가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고

여법하지 않게 얻어진 것을 불신의 마음으로 보시하면

보시 받는 자의 덕행이 보시를 청정하게 만드네.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가 계행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고

여법하지 않게 얻어진 것을 불신의 마음으로 보시하면

어느 쪽의 덕행도 보시를 청정하게 만들지 못하네.

 

계행을 지키는 자가 계행을 지키는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굉장한 과보를 가져온다고 나는 말한다.

 

탐욕을 떠난 자가 탐욕을 떠난 자에게

행위의 과보가 크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법하게 얻어진 것을 흔쾌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 보시는 세간적인 보시 가운데 최상이라고 나는 말한다.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2, 전재성님역)

 

 

금은이 허용되면 감각적 쾌락도

 

보시는 어디에 해야 하는가? 빅쿠가 소유하게 해서는 안된다. 빅쿠에게 금과 은을 주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누군가 금과 은을 허용할 수 있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S42.10) 라는 구절이 있다. 무소유의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빅쿠에게 금과 은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돈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스님들에게 돈을 주어서는 안된다. 만일 돈이나 재물, 재산을주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처님은 “만약 누군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를 수행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고 확실히 여겨도 좋습니다. (S42.10) 라 하였다.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한 수행자가 욕망을 추구한다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에서 사유재산을 갖고 있는 스님들은 부처님 제자라 볼 수 없다.

 

불자들은 어디에 보시해야 하는가?

 

불자들은 어디에 보시해야 하는가? 이는 맛지마니까야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양어머니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빅쿠니가 부처님에게 손수 만든 가사를 보시하고자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그대가 승단에 보시할 때에 곧 나와 승단을 공양하는 것이 됩니다.” 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승단에 보시하는 것이 부처님에게 보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 불자들이 승단에 보시하여 승단은 부유해도 스님들은 가난하게 살게 해야 함을 말한다.

 

불자들은 스님을 부처님 모시듯 한다. 특히 돈 많은 보살들이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런 보살들을 스님들은 깍듯이 대우하는 듯 하다. 많은 재산을 스님에게 기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인사찰을 가지고 있는 스님이나 재단 이사장을 하고 있는 스님들의 경우 대보살들로부터 기증 받은 것이 대부분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불교를 망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청빈한 승가공동체실현을 위하여

 

승단이 가난하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한국불교는 승단이 가난하다. 그러다 보니 요지에 포교당 하나 지을 수 없다. 하지만 스님은 부자라는 사실이다. 물론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한국불교에 스님은 부자이지만 승단은 가난하다는 말이 회자 되고 있다. 그런데 스님들 사이에서도 세속과 똑 같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천장사 주지 허정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고 하였다.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는 이 말은 대중공사의 목표이자 결론입니다. 무소유공동체인 승가가 2600년간 유지되어온 비결은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올해 대중공사에서 논의 해온 모든 주제를 함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청빈한 공동체’가 된다면 승려노후복지(9)가 실현 될 것이고, 사찰재정 투명화(3)가 이루어지며, 그로인해 종단불신(4)이 해소되고 불교의 사회화(10)와 지역불교가 활성화(11)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불멸후 100년경 첫 번째 승가분열이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금은(金銀)을 받는 소유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깊이 사유해 보아야할 대목입니다.

 

부처님시대에 출가자는 금은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토지와 임야와 사찰은 사방승가에 보시된 것으로 현재와 미래의 출가자들이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토지와 임야와 사찰같은 승가의 재산은 승려가 소유하거나 매매를 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승려의 사유재산이 묵인되어 승가는 각자도생하는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유재산을 많이 소유할수록 대화와 토론이 불필요해지며 승려끼리 빈부의 차이가 커지면 승가의 화합은 무너지게 됩니다. 배움과 경험에 따라 사람의 의견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소유의 정도에 따라 사람의 견해견해는 달라집니다. 외제 고급승용차를 타고 재산이 100억 이상을 갖고 있는 사판스님과 오로지 대중처소에 의지해 살아가는 300만원 이하의 재산을 가진 스님이 만나면 무슨 공통점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사회인과 마찬가지로 승려들의 사유재산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로비자금과 선거자금이 되어 지속적으로 세력형성 하는 데에 사용됩니다. 그런 부익부빈익빈의 승가는 승려들끼리 경쟁하게 만들고, 소유의 정도에 따라서 끼리끼리 어울리고, 공심(公心)으로 살아가는 승려를 무능한 바보로 취급하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운 시절에 승가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백인 대중공사는 우리가 찾아낸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을 묵인하는 승가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여서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길은 더욱 뚜렸해져서 대중은 올바른 승가의 길을 열어 보일 것입니다.

 

(허정스님, 백인 대중공사 방향 제안, 2015-11-26)

 

 

허정스님에 따르면 승가의 빈부격차에 지적하고 있다. 이는 사유재산을 인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 부터인가 승려의 사유재산이 묵인되어 승가는 각자도생하는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청빈한 공동체를 실현 하는 것이라 하였다.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

 

청정한 승가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에게 보시를 해서는 안된다. 승가에 보시를 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승가는 최소 네 명이 함께 생활하는 승가공동체를 말한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개별스님에게 보시를 하고 있다. 더구나 노년에 이른 노보살들이 자신의 전 재산을 스님에게 바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이런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보시는 스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시는 승단에 하는 것이다. 기녀 암바빨리가 부처님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공양을 하였지만 부처님에게 보시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승단에 보시하였다. 스님을 부처님처럼 모시며 사는 것은 좋지만 스님에게 재산을 준다든가 절 지어 주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보시는 스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승단에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스님에게 보시하는 자를 대보살이라 하였으나 진정한 대보살은 승단에 보시하는 자이다. 그래서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라는 말이 실현되어야 한다.

 

 

2015-12-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