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에 진검승부하려는 자들, 부처님 지혜의 검으로 베어 버려야
한 번의 승부로
여기 어떤 무사가 있다. 수 년 동안 산중에서 무술을 닦았다. 스승이 말하길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하산’하라고 하였다. 이에 그 무사는 하산하여 마을로 내려 갔다. 그런데 이 무사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랜 세월동안 갈고 닦았는데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내 실력을 알아 보기 위해서 진검승부해 보면 어떨까?”라며 생각하고 마을에서 가장 센 자에게 결투를 신청하였다.
그 무사는 가장 센 자와 진검승부를 하였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헛점을 노렸다. 그러나 자세와 표정 등으로 헛점이 보이지 않을 리 없다. 마침내 서로 검을 주고 받았다. 날아 오는 검을 막고 공격하는 등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그러나 헛점을 보인 무사는 상대방의 일격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 상대방의 실력이 월등하였던 것이다.
수 년간의 무술수련이 단 한 번의 진검승부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자신의 능력을테스트해 보기 위해서 검을 뽑았으나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였다. 이렇게 불귀의 객이 되기 까지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드라마에서
한 때 드라마에 심취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하늘을 날아 다니는 등 황당무계한 중국무술영화나 드라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NHK에서 방영된 ‘대하시대드라마’를 말한다.
가장 인상깊게 보았던 일드(일본드라마)가 신선조(新選組, 2004), 아츠히메(篤姫, 2008), 료마전(龍馬伝, 2010) 이었다. 모두 50부작 가량되는 대하드라마로 1년간 방영되었다. 드라마를 보면 일본의 역사와 문화, 풍습 등을 알 수 있다. 책으로 보는 것이나 소설로 접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NHK에서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드라마를 인터넷시대에 자막이 제공되는 사이트를 통해서 본 것이다. 이들 드라마에서 유심히 본 것은 ‘진검승부’에 대한 것이다.
일본드라마에 진검승부장면이 종종 있다. 그런데 매우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중국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하늘을 난다든가 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장면이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실감난다. 그런데 진검승부를 하면 반드시 한쪽이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진검승부이다. 그런데 진검승부를 자신의 기분에 따라 하면 어떻게 될까? 상대방이 무례하게 굴었다고 하여 기분이 나빠서 결투를 신청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예를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서 보았다.
어느 사무라이가 자신을 모욕하였다고 하여 결투를 신청하였다. 그런데 이를 지켜 보던 어느 고수가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다”라 하였다.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하였을까? 그것은 말하는 태도와 기분, 감정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력도 모르고 상대방의 실력도 모른 상태에서 단지 감정에 휘둘려 진검승부를 하였을 때 결과는 참담한 것이다. 이미 죽음이 예견 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싸움을 지켜 보던 고수는 시합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연습은 실전과 같이
진검승부는 단 한번의 싸움으로 승부가 결정난다. 여기서 승부는 생과 사를 말한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싸움에서 이기면 살아 남는 것이고 지면 죽는 것이다. 이렇게 단 한번의 싸움에서 생과 사가 결정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싸운다.
삶과 죽음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실력이다. 실력이 조금이라도 나은 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 반면 실력이 못 미친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무사들은 실전을 위하여 피나는 연습을 한다.
일드를 보면 연습장면도 볼 수 있다. 드라마 ‘아츠히메(2008)’에서 사츠마번 무사들은 통나무치기를 ‘만번’ 한다. 원숭이 소리를 내가며 통나무치기를 만번할 때 연기가 날 정도라 하였다. 이렇게 단련된 검법이 ‘시현류(示現流)’로 알려져 있다. 또 드라마 ‘신선조(2004)’를 보면 실제 검보다 무거운 목검을 사용하여 연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검법을 ‘천연이심류(天然理心流)’라 한다. 드라마 ‘료마전(2010)’에서는 가장 일반적 검법이라 불리우는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가 소개 되어 있다.
시현류(示現流, 지겐류)
진검승부를 하면 한편은 살아 남고 한편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언제 어느때 진검승부를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무사들에게 있어서 연습은 실전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연습은 실전과 같이 맹렬하게 한다. 실전에서는 연습한 대로 적용한다.
검을 뺀다는 의미는?
기분에 따라 진검승부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실력을 자신이 잘 알기 때문에 자신 보다 실력이 나은 자와는 승부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자신보다 나은 자와 진검승부하면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잘 파악해야 한다. 상대방이 자신 보다 월등하다면 검을 빼지 않는 것이다.
진검승부할 때 어리석은 자가 있다. 상대방의 실력을 전혀 고려치 않고 검을 빼는 자를 말한다. 검을 빼었다면 휘둘러야 한다. 다행히도 상대방이 자신보다 실력이 하수라면 살아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상대방이 고수인 것을 알았다면 이미 때는 늦다. 단 몇 합으로 승부가 결정된다. 단 몇 초만에 베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명한 자라면 검을 함부로 빼지 않는다.
검을 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이길 가능성이 있을 때를 말한다.생사를 가르는 싸움에서 살아 남을 가능성 있을 때만 검을 빼는 것이다. 그 이외는 검을 빼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검을 빼었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법륜스님의 윤회관은?
진검승부는 무술세계에서만 있을까? 종교에서도 진검승부를 볼 수 있다. 교리와 교리가 맞부딪쳤을 때 진검승부 하는 것처럼 보인다. 불교내부에서도 진검승부가 보인다. 윤회론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과학적 사실을 들며 업과 윤회를 부정한다. 심지어 법륜스님처럼 불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명스님도 윤회를 부정하고 있다. 이렇게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수 차례 글을 올린 바 있다.
법륜스님과 관련해서는 ‘법륜스님의 윤회관, 빠알리 니까야에 근거한 법문을 하시라!(2013-03-04)’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법륜스님의 윤회관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부처님이 내생이 있느니 업느니 이런 얘기 하는 게 부처님이겠어요? 그러면 천당이 있느니 없으니 하는 거와 차이가 뭐가 있어요? 똑 같은 얘기지. 천당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고 그러면 증명을 하겠어요? 내생이 있다면 증명을 하겠어요? 없다는 것을 증명을 하겠어요? 이런 걸 뭐라 그런다? 믿음에 속한다. 알았습니까?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있는 줄 아는 거고.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는 줄 아는데. 있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없다고 믿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거요 이거는.”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82) 불교의 환생 법륜스님_즉문즉설(2010)) 라 하였다. 이와 같은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르다.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로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이렇게 문제제기한 것도 일종의 진검승부라 볼 수 있다. 칼집에서 검을 빼듯이 글로서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법륜스님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면서 힌두교의 교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다만 윤회가 있다면 지금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이전이면 전생이고, 이후면 내생이라 한다. 마치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법륜스님의 윤회관에 대하여 개인적 견해, 즉 사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법륜스님은 빠알리 니까야에 근거한 법문을 하시라!”라고 충고하였다.
어느 인터넷논객 말하기를
인터넷공간에서도 치열하게 진검승부가 벌어진다. 이른바 인터넷논객들에 의해서이다. 글 좀 쓸 줄 안다는 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말하는데 입에 칼을 문 것처럼 공격하기 때문에 ‘인터넷검객’들이라 볼 수도 있다.
자칭 인터넷논객들이 있다. 불교에 대하여 좀 안다는 자들이 해당된다. 그러나 주장을 보면 대부분 ‘사견’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논객은 이렇게 말한다.
“글을 읽어보면 이분이 깨달음이 되신분인지 아닌지 알게됩니다. 달마혈맥론에보면 본성을 보지못한 사람은 선지식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이 남을위해 설법을 할경우 바른법을 가르키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사람까지 마구니의 세계로 빠뜨린다는 내용이있어요. 연꽃님의 글을 보면서 본성을 보지 못한사람은 함부로 법에대해서는 얘길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선생님 설법은 이것만을 가르키죠. 먹고 자고 웃고 글쓰고 그모든것이 나오는곳 그자릴 보게되면 글을쓰고 남을 헐뜯고 화내고하는 모든게 허망한거라는걸 저절로 알게됩니다. 인연따라 그냥할뿐 번뇌나 집착이 없어집니다.
깨닫게되면 부처가 되는것인데 석가모니께 석가라고한다고 무슨허물이되나요. 그 자리에 들게되면 저절로 알아 집니다.석가모니와 내가 하나라는걸 관세음보살과내가하나라는걸 체험으로 알게돼죠. 부처가된사람은 부처행을 하는거고 관세음 보살이 된 사람은 관음행을하게됩니다. 자기라는 자아가 없어지니 저절로 육바라밀을 합니다. 관세음 염불을 하는목적은 본인이 관세음이 되는것입니다.
이것이란 그 본래자릴 가리키는거죠. 선생님은 단순한 설법같지만 체험자리에 들게되면 그깊이에 탄복하게됩니다. 그동안 집착하고 알고하던 그모든 망상을 깨주기때문에 빨리 바른법을 알게하죠.
좋은학원은 얼마나 많이 서울대를 보내느냐에 있다고 윤홍식씨가 얘기한게 생각나네요. 지금시대에 영성을 높이는일에 재가 승가를 따지는건 촌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외국에서도 마음을 깨달은 선지식들이 많이나타나 활동하고 있습니다. 오직모를뿐으로 세계에 불법을 전하신 숭산스님같으신분도계시지요. 조사선으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계시는 선생님을 그자리에 들어보지도 못하신분이 외도다 어떻다 하시는건 안타까운 일이군요.”
(S법우님)
이 글은 이전에 私見(사견)과 邪見(사견), 눈먼 봉사가 길을 인도하듯이(2015-12-09)’ 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 대한 댓글이다. 올린 글에 대한 반론이라 볼 수 있다. 또 자신의 스승을 변호하는 글이라 볼 수 있다.
글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외도에 대한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달마혈맥론’은 부처님은 가르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 ‘윤흥식’님을 언급하였는데 그 분은 불교도가 아니다. 인터넷 유튜브에 널려 있는 것이 윤흥식님의 동영상인데 그는 분명히 불교도가 아니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였다. 그럼에도 외도의 이야기를 빌어 ‘영성’운운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과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였을 S님의 스승이 늘 말하였듯이 “몽뎅이로 때려 주고 싶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석가모니께 석가라고한다고 무슨허물이되나요”
S님은 자신의 스승에 대하여 칭찬하고 있다. 그리고 스승이 깨달은 자라고 한다. 실제로 K법사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자신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있어도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는 없다.”라 한다. 이것이 바른 견해이다.
깨달으면 자유로운 것일까? 글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이는 K법사가 부처님에게 “석가모니가”라며 친구부르듯이 말하고, “석가가”라며 동네 아저씨 성을 부르듯이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외도나 하는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외도들이 “고따마여”라고 친구부르듯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S님은 “깨닫게되면 부처가 되는것인데 석가모니께 석가라고한다고 무슨허물이되나요”라 하였다. 깨닫기만 하면 부처님과 친구가 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이런 댓글에 어느 법우님이 “예전에 경허스님이 깨닫고 나서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섹스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관점에서 바라보면 섹스라는 탐욕이 남아있기 때문에 깨달은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탐욕이 남아 있는 한 깨달은 자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성냄이 남아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스승에게서 탐욕이나 성냄이 단 한번만이라도 발견된다면 그 스승을 떠나라고 하였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스승밑에 있어 보았자 오랜 세월 동안 고통과 불행으로 인도할 것이라 하였다.
석가도 깨닫지 못한 그것이 있다는데
한번 깨달으면 대자유인이 되는 것일까? 한국불교에서는 그렇게 보는 것 같다. 깨달은 도인들의 행위를 보면 막행막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선종계통의 스님들이나 재가법사들이 부처님을 지칭할 때 “석가모니가” 라 하는데 이는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아래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와 같은 교만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 보다 더 수승한 깨달음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라는 선가귀감의 게송에서 알 수 있다. 석가도 깨닫지 못한 그것이 있다는 것이다.
K법사는 인터넷 유튜브동영상 강좌에서 ‘이것’을 강조한다. 어느 동영상을 보아도 ‘이것뿐’이라 한다. 그런데 선종계통의 스님들도 ‘이것’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불자들에게 인기 있는 스타스님 혜민스님은 ‘그놈’이라 하였다. 선가귀감에서 말하는 ‘홀로밝은 동그라미’ ,즉 ‘일원상’을 말한다. 이 일원상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불성’ 또는 ‘자성’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도 깨닫지 못한 것은 ‘홀로밝은 동그라미’, ‘그놈’, ‘이것’, ‘불성’, ‘자성’, ‘본래불’, ‘참나’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우는 것을 알 수 없다. 이렇게 다양한 이름을 갖는 것에 대하여 모양과 형태가 없는 것이기에 이름붙이기 나름이라 하였다.
수행도 필요 없고 교리도 필요 없고
어떤 이가 “이것만 알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오직 ‘이것뿐이며 다른 것은 없다’고 말한다. 오로지 자신의 말한 것만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이 모두 부정된다. 마치 반야심경에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 등이 ‘무(無)’자와 ‘비(非)’자로 줄줄이 부정되는 것과 같다. 물론 공의 입장에서 본 것이긴 하지만 한국의 불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부터 배운다.
선종에서는 부처님가르침을 알려 주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이다. K법사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자신의 설법만 들으면 깨닫는다고 한다. 거기에 수행도 필요 없고 교리는 더더군다나 필요 없다. 그래서일까 좌선하는 스님들을 보면 “내 몽뎅이로 때려 주고 싶어”라 하였다. 한 마디로 쓸데 없는 짓 한다는 것이다.
교리에 대해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금강경 강의 할 때 여시아문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이’에서 다 끝난겁니다. 이것 뿐이야. 바로 이것 뿐이거든”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에서 ‘이’에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시아문 이후에 전개 되는 내용을 다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뿐’이라 하며 이것뿐 타령을 한다.
남진제 북송담
K법사에 따르면 교리를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한다. 모두 다 ‘분별망상’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선종계통 스님들은 공통적으로 그런 말을 한다.
남진제 북송담이라 한다. 남진제라는 진제스님은 “간화선은 붓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수행법”이라 말한 바 있다.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정보통신시대에 이 말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까?
북송담이라 불리는 송담스님은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이렇게 무상하고 믿을 수 없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3-24일자) 라 하였다. 그러면서 “그것을 깨달음으로서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된다.”라 하였다.
남진제북송담의 말을 보면 마치 외도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그러면서 북송담은 “소승이라는 것은 세속의 허망한 것과 집착심을 떼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설해진 방편설이지 불교의 구경법이 아닙니다.”라고 부처님 가르침을 일축하였다. 이와 같이 말하는 송담스님은 깨달았을까?
송담스님의 탈종이유에 대하여
송담스님은 조계종을 탈종하였다. 이유는 조계종과 수행풍토가 맞지 않아서라도 하였다. 부처님가르침을 부정하는 듯한 송담스님이 정말 수행풍토가 다르다고 탈종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
송담스님이 탈종한 직후 글을 올린 바 있다. 글의 제목을 스님이 아니라 승가에 보시해야 하는 이유(2014-09-17)’이다. 이 글은 재가활동하기 이전에 작성된 글이다. 글에서 ‘송담스님은 왜 조계종을 떠나려 할까?’라는 소제목으로 송담스님의 탈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다.
최근 교계뉴스를 보면 송담스님의 탈종이 커다란 이슈로 부각하였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선사인 송담스님은 왜 조계종을 떠나려 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재산을 지켜내기 위한 방편이다.
송담스님은 인천용화선원의 재단법인 법보선원 이사장이다. 교계뉴스에 따르면 인천 용화사는 1950년 정금강심 보살이 창건한 용해사를 1955년 전강 선사(1898~1975)가 조실로 추대되면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법보선원 용화사는 1975년 1월 13일 전강 선사 열반 후 송담 스님이 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981년 비구선원인 법보선원 불사, 1998년 용화선원 불교문화원‧용화어린이집 개원, 2000년 인제 용화선원 개원, 2001년 용화유치원 개원, 2010년 광주 용화선원을 개원했다.(불교닷컴 2014-09-15)”라고 전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천용화선원은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계종의 종헌종법에 따르면 스님들의 재산은 모두 조계종소속이 된다. 어느 스님이 당대에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가람을 만들고 재단을 만들어 그 가치가 엄청나게 크다고 하더라도 조계종 소속이라면 모두 종단의 재산으로 된다. 그러나 탈종을 하게 되면 종단으로 재산이 넘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재산을 지켜 내기 위한 탈종이 빈번히 발생한다. 그래서일까 현재 한국불교의 종단등록 현황을 보면 수백개에 달한다. 1960년대 정화운동에 따라 처음 종단이 생겨난 이래 분종을 거듭하여 지금은 듣도 보도 못한 수백개의 군소종단으로 난립되어 있다. 이들 종단 대부분이 재산을 지켜 내기 위한 것으로 보면 틀림 없다.
(진흙속의연꽃, 스님이 아니라 승가에 보시해야 하는 이유(2014-09-17))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송담스님의 탈종에 대하여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수행풍토가 맞지 않아서 탈종하였다면 진정성을 보여 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송담스님은 2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단의 재산을 종단에 등록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라면
재산을 지켜 내기 위한 탈종은 수도 없이 많다. 송담스님도 그런 사람중의 하나로 보인다. 그러나 송담스님을 따르는 재가단체의 리더는 수행풍토가 다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면서 종단의 개혁을 요구한다. 일부는 동의하지만 전부 동의하지 않는다.
송담스님은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라면 욕심내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재단을 유지 하고 있다면 욕심을 내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탈종에 대한 진정성도 의심받고 있다.
재단을 유지하고 있다면 탐진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초기경에 따르면 어느 스승이든지 탐욕이나 성냄, 어리석음이 발견되면 그 스승을 떠나라고 하였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것이다.
탐진치에 묶여 있는 스승을 따르면 오랜세월 고통과 불행이 따를 것이라 하였다. 현생을 넘어 내생까지 갈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수행풍토가 맞지 않아 탈종하였다는 말을 믿는 자들이 있다.
송담스님은 수행풍토가 맞지 않아 탈종하였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재산을 지켜내기 위한 것이라 본다. 송담스님이 탈종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 주려거든 지금이라도 2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종단에 등록 해야 할 것이다.
깨달은 밤부터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에 가는 길에 한길만 있을까? 아니면 여러 길이 있을까? 조사스님들에 따르면 여러 길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한길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 외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띠붓다까에서 알 수 있다. 마지막 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Yañ-ca bhikkhave rattiṃ Tathāgato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jjhati, yañ-ca rattiṃ anupādisesāya nibbānadhātuyā parinibbāyati, yaṃ etasmiṃ antare bhāsati lapati niddisati, sabbaṃ taṃ tatheva hoti no aññathā tasmā Tathāgato ti vuccati.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Lokāvabodhasutta-세계에 대한 이해의 경, 이띠붓따까 It1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았다’라 하였다. 여기서 ‘위없이’라는 말은 ‘anuttara’를 말한다. 위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음을 말한다. 더구나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 하였다. 그래서 ‘아눗따랑삼마삼보딩(anuttaraṃ Sammāsambodhiṃ)’이라 하였다. 금강경에 나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같다.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그럼에도 선종에서는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라는 선가귀감의 게송이 있고, 가장 인기 있다는 스타스님 혜민스님은 “그래서 부처도 알 수 없습니다”라 하여 부처님도 알 수 없는 ‘그놈’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라 하였다. 과연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불자들은 어느 가르침을 따라야 할까?
부처님은 처음 깨달음을 이룬 밤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 변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최초로 깨달음을 증득한 후 젊었을 때 설한 것이 다르고 노년이 되어 설한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세계(loka)란 무엇인가?
만일 설법내용이 다르다면 첫날 밤 깨달은 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될 수 없다. 이는 대승불교나 선종을 따르는 자들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이 미완성된 것이고 불완전한 것이라는 빌미를 줄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깨달음을 선포하기 전에 매우 신중하였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삼전십이행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면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의 성격상 이를 허용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유에 사유를 하고 검증에 검증을 거쳐 선포하였다. 이런 과정이 초전법륜경에서 삼전십이행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Loko bhikkhave Tathāgatena abhisambuddho, lokasmā Tathāgato visaññutto, lokasamudayo bhikkhave Tathāgatena abhisambuddho, lokasamudayo Tathāgatassa pahīno, lokanirodho bhikkhave Tathāgatena abhisambuddho, lokanirodho Tathāgatassa sacchikato, lokanirodhagāminī paṭipadā bhikkhave Tathāgatena abhisambuddhā, lokanirodhagāminī paṭipadā Tathāgatassa bhāvitā.
Yaṃ bhikkhave sadevakassa lokassa samārakassa sabrahmakassa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vicaritaṃ manasā, yasmā taṃ Tathāgatena abhisambuddhaṃ, tasmā Tathāgato ti vucc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계는 여래에 의해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아졌으며, 여래는 세계에서 벗어났다. 수행승들이여, 세계의 발생은 여래에 의해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아졌으며, 여래는 세계의 발생을 끊어버렸다. 수행승들이여, 세계의 소멸은 여래에 의해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아졌으며, 여래는 세계의 소멸을 실현했다. 수행승들이여,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여래에 의해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아졌으며, 여래는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았다.
수행승들이여,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보여지고, 들려지고, 감지되고, 의식되고, 파악되고, 탐구되고, 정신적으로 고찰 된 것은 여래에 의해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아졌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Lokāvabodhasutta-세계에 대한 이해의 경, 이띠붓따까 It1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계에서 벗어났다(lokasmā Tathāgato visaññutto)’ 고 하였다. 그리고 계의 발생을 끊어 버렸다(lokasamudayo Tathāgatassa pahīno)’ 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loka)’는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닌 ‘십이처’를 말한다.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부처님은 십이처에 대하여 ‘보여지고, 들려지고, 감지되고, 의식되고, 파악되고, 탐구되고, 정신적으로 고찰한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보여진 것은 형상의 영역에 속하고, 들려진 것은 소리의 영역에 속하고, 감지된 것은 맛의 영역과 감촉의 영역에 속한다. 의식된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 등의 상태의 대상에 속한다. 파악된 것은 탐구되거나 탐구되지 않거나 도달 된 것을 뜻하고, 탐구된 것은 파악되거나 파악되지 않거나 탐구 된 것을 뜻하고, 정신적으로 고찰된 것은 마음으로 숙고된 것을 뜻한다.”(ItA.II.185) 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십이처를 완전히 이해 하였음을 말한다. 십이처외에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인간뿐만 아니라 하늘, 심지어 악마를 대상으로 하여 진리를 선포한 것이다. 이런 진리의 선포에 대하여 외도들은 불완전한 것 또는 미완성된 것이라 하여 또 다른 진리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 그놈, 불성, 참나 등을 말한다.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 그리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래서 깨달은 밤부터 열반에 든 45년 동안 한결 같이 진리를 펼치셨다. 그래서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bhāsati lapati niddisati, sabbaṃ taṃ tatheva hoti no aññathā)” (It121) 라 하였다.
더하거나 뺄 것도 없다
바로 이것이다. 이는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 “이것뿐, 이것뿐이야, 이것뿐이거든”라며 말한다면 외도의 견해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구분교, 즉 경이나 게송 등 아홉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 모두 진리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 그 자체’인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주석에서 알 수 있다.
ItA.II.185에 따르면, 그 사이에 가르침 일체의 경과 게송 등의 아홉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의 부처님의 말씀은 의미상으로 형식상으로 비난의 여지가 없고,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이 없으며 일체의 형태를 갖추고, 탐욕의 광기, 성냄의 광기, 어리석음의 광기를 쳐 부수고, 터끝만큼도 잘못도 없이, 설해진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고,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568번 각주, 전재님)
부처님의 가르침 자체는 완전하다는 말이다.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가르침을 재단하였다. 아마 가르침을 이해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체법에서 출발하는데 일체라는 말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라 본다. 그래서 이몸과 마음을 떠나 다른 것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그것이 ‘이것’ ‘그놈’ ‘불성’ 등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견줄자가 없다
부처님은 “여래는 승리자이지 패배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It121) 또 “분명하게 보는 자재자이다. 그래서 여래라고 한다.” (It121) 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위로 최상의 존재에서부터 아래로 아비지옥에 이르기까지 횡으로 무한세계에 있는 일체의 뭇삶의 계행, 삼매, 지혜, 해탈,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을 통해 지배한다. 거기에는 비교할 자가 없고, 그와 비견될 자가 없고, 그와 동등한 자도 없고, 그와 일치하는 자도 없고, 그와 경쟁자도 없고, 그와 상대자도 없고, 그와 적대자도 없고, 그와 측량할 자도 없고, 위 없는 자, 가르침의 제왕, 신들 가운데 신, 신들의 제왕, 하느님 가운데 하느님으로 스스로 그 어떠한 것에도 정복되지 않는 자이다.” (ItA.II.191)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줄자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라따나경에서도 “이 세상과 내세의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Sn2.1)라 하였다. 그럼에도 세계를 모르는 자들, 십이처 밖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자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친구이름 부르듯이 “석가모니가”라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진검승부하려는 자들
진검승부를 하면 승부가 명확하게 갈린다. 실력차이에 따라 불과 수초만에 승부가 나기도 한다. 그런데 진검승부에서 진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뜻한다. 그래서 무사들은 함부로 진검승부를 하지 않는다. 이 말은 함부로 칼집에서 검을 뽑지 않음을 말한다.
상대방이 자신 보다 실력이 월등하였을 때 진검승부하면 어떻게 될까? 곧바로 죽음이다. 이는 상대방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신 보다 세다면 검을 뽑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실력이 없는 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아무나 대상으로 진검승부하고자 한다. 대게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가르침과 진검승부하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견줄만한 것이 없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과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래서 무상정등각이라 한다. 그런 무상정등각은 깨달음을 이룬 첫 번째 밤부터 열반에 들기까지 한결 같았다. 그런 가르침이 오늘날 볼 수 있는 경이나 게송 등 구분교형태로서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또 다른 곳에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이것’ ‘그놈’ ‘불성’이 있다고 하며 석가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 한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일체라 하였을 때 그 일체는 십이처를 말하는 것임에도 십이처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퇴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아시에서 불교의 역사를 보면 퇴보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대승과 선종에서 말하는 불교진화론과 다른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불교역사는 퇴보의 역사에 불과한 것이다.
퇴보를 거듭하고 있는 불교는 더 이상 부처님 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몰라서 그렇다. 안다고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이것’ ‘그놈’ ‘불성’이라 한다. 이런 논리로 부처님가르침과 대적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가르침으로 부처님 가르침과 진검승부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단칼에 베이고 말 것이다.
지혜의 검으로 베어 버려야
인터넷시대에 온갖 사견이 넘쳐 나고 있다. 불교라고 하지만 무늬만 불교이다. 부처님 가르침과 전혀 관련 없는 개인적인 견해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따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 아마 오랜세월 고통과 불행을 야기할 것임에 틀림 없다. 이는 선천적으로 눈먼 자를 역시 선천적으로 눈먼 자들이 줄이어 따라 가는 것과 같다.
이처럼 온갖 정보가 넘쳐 나는 인터넷시대에 온갖 사견이 넘쳐난다. 그런 사견을보면 마치 상대방에 대하여 모르는 상태에서 진검승부하자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견은 ‘파사현정(破邪顯正)’되어야 한다. 어떻게 파사현정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부수어야 한다. 오물장 같은 논리로 포장되어 있는 삿된 견해를 지혜의 검으로 베어 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진짜 검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혜의 검이다. 그래서 가르침으로 사견을 타파하는 것이다. 아니 그러기 전에 사견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왜 그런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외도와 견줄 수 없기 때문이다.
1.
“Sabbalokaṃ abhiññāya ~
sabbaloke yathātathaṃ,
Sabbalokavisaṃyutto ~
sabbaloke anūpayo.
[세존]
“일체의 세계를 곧바로 알고
일체의 세계에서 여실히 알아
일체의 세계에서 벗어나
일체의 세계에 의착하지 않는다.
2.
sabbaganthappamocano,
Phuṭṭhassa paramā santi ~
nibbānaṃ akutobhayaṃ.
현명한 자로서 일체에서 승리하고
일체의 계박을 풀고
그는 최상의 적멸,
두려움 없는 열반을 얻는다.
3.
anīgho chinnasaṃsayo,
Sabbakammakkhayaṃ patto ~
vimutto upadhisaṅkhaye.
번뇌가 부서지고 고뇌가 없고
의혹을 끊은 그 깨달은 님은
일체의 업의 소멸에 이르러
의착이 완전히 파괴되어 해탈했다.
4.
esa sīho anuttaro,
Sadevakassa lokassa ~
brahmacakkaṃ pavattayī.
그 분이 세존이신 깨달은 님,
바로 위없는 사자.
천상과 더불어 세계를 위해
하느님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5.
ye Buddhaṃ saraṇaṃ gatā,
Saṃgamma taṃ namassanti ~
mahantaṃ vītasāradaṃ.
이처럼 신들과 인간이
깨달은 님에게 피난처를 찾고
위대한 두려움 없는 자에게
무리지어 귀의한다.
6.
Danto damayataṃ seṭṭho ~
santo samayataṃ isi,
Mutto mocayataṃ aggo ~
tiṇṇo tārayataṃ varo.
길들여진 자로서 길들여진 자 가운데 최상자
고요한 자로서 고요한 자 가운데 선인.
해탈한 자로서 해탈한 자 가운데 위없는 자
건넌 자로서 건넌 자 가운데 최승자이다.
7.
Iti hetaṃ namassanti ~
mahantaṃ vītasāradaṃ,
Sadevakasmiṃ lokasmiṃ ~
natthi te paṭipuggalo
그러므로 이러한 위대한
두려움 없는 님에게 귀의하니,
천상을 포함한 세계에서
그와 비교될 만한 자는 없다.”
(Lokāvabodhasutta-세계에 대한 이해의 경, 이띠붓따까 It121, 전재성님역)
2015-12-13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구즉착 윤홍식님의 불교관련 동영상 (0) | 2015.12.15 |
---|---|
황진이는 지족선사에게 관세음보살이었을까? (0) | 2015.12.14 |
“승가는 부자여도 스님은 가난해야 한다” 대보살을 요청하는 한국불교 (0) | 2015.12.08 |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단멸론을 보충하는 유전자론 (0) | 2015.12.07 |
동해바다가 눈물 한방울로, 이어령교수의 ‘축소지향인의 일본인’을 보고 (0) | 2015.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