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는 지족선사에게 관세음보살이었을까?
법전스님 동안거결재법어에서
선종에 ‘파자소암’공안이 있다. 지난 2000년 도림 법전스님이 동안거결재법어와 함께 파자소암공안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 내용이 ‘월간해인’에 실려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검진삼천조관(盡三千條貫)하여도
갱무정죄가단(無情罪可斷)이로다.
삼천조항의 법규를 다 뒤져도
정과 죄를 판단할 길이 없도다.
옛날에 한 노파가 암자의 스님을 20년 동안 시봉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노파는 공양을 날라주던 딸에게 말했습니다.
“스님을 껴안고는 ‘이럴 때는 어떠십니까?’라고 물어보고 그 대답을 나에게 전해다오.”
딸은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하였습니다. 공양을 마친 후 그릇을 거두고는 가만히 스님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시킨대로 물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떠십니까?”
“고목枯木이 의한암倚寒巖하니 삼동三冬에 무난기無暖氣로다.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도 따사로운 느낌이 없도다.”
딸은 돌아와서 그대로 어머니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노파는 “내가 20년 동안 겨우 속인을 공양시켰구나.” 하고는 벌떡 일어나 그 스님을 내쫓고는 암자에다가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이것이 종문에 전해오는 유명한 파자소암婆子燒庵 공안입니다.
늙은 할망구가 암자를 불사르고 중을 쫓아낸 법문인데 피상적으로 볼 때는, 그 스님네가 공空에 빠지고 고요한데 머물러서 여자에게 음심淫心을 내지 않는 것만 알았지 참으로 살아서 자재自在한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 노파가 ‘속인’이라고 꾸짖으면서 내쫓았다고 보통 생각합니다.
만약 참으로 그렇게 본다면 그 노파가 암자를 불사르고 그 중을 쫓아낸 뜻도 영 모르거니와, 또 그 스님네가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도 따사로운 느낌이 없도다.’ 라고 한 뜻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그 참뜻은 저 깊은데 있습니다. 누구든지 공부를 해서 그 노파가 암자를 불지르고 그 중을 쫓아낸 뜻을 확실히 알면, 일체법과 모든 공안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전체를 다 통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공안은 그렇게 아주 깊은 법문이라 선종에서도 중대하게 관찰하는 것이니, 피상적 관찰로써는 그 법문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마른 나무가 차디 찬 바위에 기댔을 뿐이니, 월간해인 2000년 5월 219호)
늙은 할머니가 암자를 불태웠다는 파자소암 공안은 유명하다. 화두참구를 위한 공안이기 때문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노파가 불지른 뜻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번뇌를 보리로 승화시키지 못하였다고
파자소암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금강신문’에 따르면 참선수행이 지향하는 목표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감이나 정상적 감각활동, 의식적 판단을 통한 행동을 무조건 제거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아가씨를 덥석 끌어안아서도 안되고 밀쳐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딜레마가 바로 선(禪)이 실천적으로 풀어야 하는 ‘화두’라 하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한다.
바짝 마른 대나무 조각같이 건조한 수행은 결국 물을 떠난 파도요, 번뇌를 여의어 버린 보리다. 번뇌가 곧 보리임을 철견하는 게 선수행이다. 번뇌를 보리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인위적인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로 번뇌를 회피한 선객의 20년 수행은 아무 의미가 없다.
노파의 분노는 곧 아가씨의 교태를 자연스런 감정과 극기된 수행면목을 조화시켜 흘러보내지 못하고 고목사회(枯木死灰)로 극복한 데 대한 탄식이다. 선정(禪定)의 오매일여나 제8 아뢰야식 멸진은 불씨 꺼진 재처럼 생명을 단절한 낙공(落空)의 경지가 아니다. 잿속처럼 고요하되 화로속 깊이서 훈기가 솟아나는 불씨를 간직한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
(婆子燒庵〈파자소암:노파가 암자를 불태우다〉, 금강신문, 2011년 5월 4일)
노파가 암자를 불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금강신문에 따르면 ‘번뇌를 보리로 승화’시키지 못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번뇌와 보리(깨달음)을 분별하려는 이분법적 태도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이는 “훈기가 솟아나는 불씨를 간직한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수행승이 처녀를 안아 주었어야 한다는 논리로 받아 들인다.
보살행을 실천하지 않았다고
파자소암에 대하여 검색해 보면 노파의 행위에 대하여 ‘우호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행승의 ‘얼음장’ 같은 태도에 비판한다. 이런 비판의 절정이 불교신문에 실려 있다.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가 작성하였다는 기사는 다음과 같다.
노파가 암자를 불태운 소식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한다면 수행과 계행이라는 쇠창살 안에 갇혀있는 선객의 死禪을 대승 보살행을 펼치는 현실참여의 動禪으로 끌어 올린것이다. 따라서 노파는 선승의 견성을 이끈 은인이다. 그러나 암자의 선객은 이러한 노파의 호의에 보답은 커녕 배신을 한다. 즉 노파를 대신한 딸 아이의 見性 검증에 두차례 다 패착한다.
((공안의 세계) 某 노파-파자소암(婆子燒庵), 중앙일보 종교전문 대 기자, 불교신문, 1997.07.22)
암자를 태운 것에 대하여 ‘수행과 계행이라는 쇠창살 안에 갇혀있는 선승’이라 비판하고 있다. 이는 보살행을 실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기자는 수행승에 대하여 ‘枯木琦寒岩’라 하였다. 이는 생명 없는 고목에 불씨 꺼진 나무재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따위 死禪은 한낱 부처를 흉내 내는 가부좌의 모방이며 앵무새의 지저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라 하였다.
여자를 안아 주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노파가 딸아이에 대하여 ‘육보시’하라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렇게 얼음장 같이 차가운 수행승에 대하여 “밥만 축내며 부처님을 기만한 사기꾼이다.”라 하였다.
기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보살행이다. 그래서 “현실제도로 회향되지 않는 선수행은 박물관 진열장속의 골동품에 불과하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법전스님이 법어를 내린 뜻은 결국 ‘보살행’이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이념에 충실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인의 손이라도 잡아 주었어야 함을 말한다.
파자소암과 유사한 이야기
파자소암과 유사한 이야기가 초기경전에도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전사에 대한 비유의 경1’ 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파자소암공안과 어떻게 다를까? 비슷한 상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에게 무엇이 전쟁의 승리인가?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한적한 곳이나 나무 밑이나 빈 집에 있는데, 여인이 가까이와서 그의 곁에 앉고 그의 곁에 눕고 그를 끌어 안는다. 여인이 가까이와서 그의 곁에 앉고 그의 곁에 눕고 그를 끌어 안으면, 그는 그것을 풀어 버리고 거기서 벗어나 바람직한 곳으로 간다.”
(전사에 대한 비유의 경1, 앙굿따라니까야 A5.75, 전재성님역)
이 내용은 ‘전사에 대한 비유의 경1’에서 다섯 번째 전사에 대한 비유이다. 수행승을 전사로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파자소암이야기와 다르다. 그래서 여인이 가까이 와서 그의 곁에 누워 껴안아도 이를 뿌리치고 다른 곳으로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여인의 유혹에 넘어 간 이야기도 있다. 네 번째 수행승에 대한 케이스이다. 이는 경에서 “수행승이 한적한 곳이나 나무 밑이나 빈 집에 있는데, 여인이 가까이와서 그의 곁에 앉고 그의 곁에 눕고 그를 끌어 안는다. 여인이 가까이와서 그의 곁에 앉고 그의 곁에 눕고 그를 끌어 안으면, 그는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채 배움이 허약해져셔 성적교섭을 행한다.” (A5.75) 라고 되어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행위를 원하는 것일까? 파자소암 이야기에서 이구 동성으로 보살행을 실천하라고 하였는데 이런 것도 보살행일까?
경에 따르면 여인의 유혹에 넘어간 수행승은 전쟁에서 패한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반면 여인의 유혹을 물리친 수행승은 승리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여인의 손목이라도 잡아 주라는 보살행은 가당치 않은 것이다.
생불(生佛) 지족선사가
파자소암에서 수행승은 얼음장 같은 태도를 취한다.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하여 보살행을 하지 않았다 하여 이구동성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지족선사와 황진이 이야기를 보면 정반대이다. 왜 반대인가? 지족선사는 보살행을 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은 것으로 되어 있다. 왜 이와 같이 말하는가? 어느 스님이 쓴 칼럼으로 알 수 있다. 내용중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지족 선사는 출세간은 배웠으나 세간을 배우지 못했다. 이는 한 시대를 이끌어갈 정신적 지도자로서는절름발이에 지나지않는다. 그렇다고 불교인 누구나가 파계하고 여자를 알아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적어도 지족 선사처럼 계를 파하고 곧바로 그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능하다고 본다. 지족은 말한다.
“나는 황진이를 통하여 세간의 허상을 분명히 알았다. 부처님께서 인생의 복잡성을 말씀하신 의도를 관념론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안 것이다. 황진이는 나의 위대한 스승이다. 부처님께서 인간의 실상을 이론적으로 가르쳐준 스승이었다면 그녀는 나에게 실제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칼럼·사설] 지족(知足)선사의 시사(試師) 황진이 , 동봉, 월간불광)
지족선사는 송도에서 ‘생불(生佛)’로 알려졌다. 그러나 십년공부가 하루 밤사이에 모두 수포로 돌아 갔다.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D스님에 따르면 지속선사가 황진이를 통하여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에 대하여 세간의 허상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족선사 입을 빌어 “황진이는 나의 위대한 스승이다.”라 하였다.
스님의 글을 보면 화엄경 ‘입법계품’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스승이 아닌 자가 없다는 것이다. 53선지식 중에는 창녀 ‘바수밀다’도 등장한다. 창녀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이다.
입법계품에서 바수밀다 편을 보면 “어떤 중생이 나를 끌어 안으면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을 거두어주면서 떠나지 않는 삼매를 얻으며, 어떤 중생이 내 입술만 한 번 맞추어도 탐욕이 사라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의 복덕을 늘게 하는 삼매를 얻는다.” (화엄경 입법계품, 바수밀다편) 라고 되어 있다. 입법계품에 따르면 애욕에 가득 찬 어떤 중생이 창녀인 자신을 안거나 입을 맞추면 애욕이 사라지는 삼매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구도여행을 떠난 선재동자는 창녀를 스승으로 하여 배운 것이다.
황진이가 떼준 생불딱지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 갔다. 십년동안 선수행하며 생불이라 불리우던 선사가 황진이와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 세상이 바뀌었다. 그래서 황진이를 스승으로 하여 크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황진이는 입법계품에 나오는 창녀 바수밀다와 같은 위치라 볼 수 있다. 이 대목에 대하여 D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족의 십 년 동안 피나는 구도가 어찌 선재의 구도만 못하겠는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살아 있는 부처' 로서 추앙받을 수 있었겠는가. 지족은 마지막 스승을 아직 만나지 못했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부처' 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던것이다.
이 딱지가 황진이로 인해 떨어져버린 것이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더 내디디게 된 것이다. 지족 선사는 세상사람들이 자기에게 ‘살아있는 부처’ 로서 추앙하는 데에 빠져 있었다. 지족이 아무리 세간의 숭앙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교만에 길들려져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구도자, 보살은 교만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지족선사는 말한다.
“나는 황진이를 통해 나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질 수 있었다. 십 년 동안의 피나는 정진으로 분단생사(分段生死)는 벗어났으나 아직 변역생사(變易生死)는 그대로 있었다. 큰 파도는 사라졌으나 잔잔한 물결은 아직 그대로였다. 그런데 황진이는 내게서 변역생사마저 앗아갔으며 잔물결조차 지워주었다.
나는 색자재(色自在)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하물며, 심자재(心自在)랴. 그런데 여자를 알고부터 나는 색자재는 물론 심자재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황진이를 황진이로 본것이 아니었다. 나는 황진이를 그냥 하나의 여자로 본것이다. 아니 피가 끓는 한 인간으로 본 것이다. 황진이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현신한 관음 바로 그분이다.”
([칼럼·사설] 지족(知足)선사의 시사(試師) 황진이 , 동봉, 월간불광)
황진이(KBS, 2006)
지족선사는 ‘생불’이라는 딱지를 떼었다. 황진이가 떼어준 것이다. 10년 동안 정진하면서 생불이라는 칭호를 받고 추앙 받았으나 황진이와 하룻밤 보내고 나서 생불이라는 딱지를 떼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족선사는 딱지를 떼준 황진이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지족선사는 “황진이는 나를 시험하기 위해 현신한 관음 바로 그분이다.”라 하였다. 황진이가 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해준 황진이에게 관세음보살의 화신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런 지족선사는 파계하였다.
수행자를 내버려 두지 않는 여인들
여인들은 수행자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홀로 사는 독신비구를 사람들은 내버려 두지 않는다. 특히 도력이 높다고 알려진 스님이 있다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마치 예쁜 꽃이 있다면 꺽어 버리고 말듯이, 도력 높은 수행자들은 여인들의 타겟이 될 수 있다. 이는 지족선사와 황진이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숫따니빠따에서도 아낙네가 성자를 유혹한다고 하였다. 땔감을 구하러 숲에 들어간 아낙네가 성자를 보았을 때 유혹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가령 숲 속에 있더라도 불의 화염 같은 높고 낮은 것들이 나타나고, 아낙네는 해탈자를 유혹합니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오.(stn703)”라 하였다. 여인들은 성자를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수행자가 유혹당하지 않는 케이스도 많이 있다. 태전선사(太顚禪師, 732~824)이야기가 그것이다.
“뭐 별거 없더라”
술과 문장으로 세월을 보내던 한유(韓愈, 韓退之, 768~824)가 조주에 훌륭한 선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에 선사를 타락시키고자 ‘홍련’이라는 여인을 백일기도 명목으로 보냈다. 홍련은 “그까짓 중하나 꼬시는데 무슨 100일씩이나 걸리나” 라고 우습게 여겼다. 그래서 꽃단장하고 태전선사가 계시는 축륭봉으로 올라갔다.
홍련은 태전선사에게 100일 기도를 드리러 왔다고 말씀 드리고 유혹하려 했지만, 100일이 다 되도록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는 태전선사의 수행에 감화 되었다. 마지막 날이 되자 겁이 난 홍련은 태전선사에게 예절을 갖추어 삼배를 드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사실은 제가 이곳의 자사인 한유의 명으로 큰스님을 타락시키고자 왔는데, 오늘까지 타락시키지 못하면 저를 죽이겠다 하였습니다. 큰스님, 제가 어찌하면 좋겠나이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태전선사는 홍련에게 하얀 속치마를 내어 펼치라 하고는 게송을 써 주며, “이곳 자사가 문장이 뛰어나다고 하니, 이 글을 보여주면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홍련은 감사한 마음으로 예를 올려 작별하고 조주자사인 한유에게로 가서 태전선사의 게송이 적힌 치마를 펼쳐 보이니, 한유는 한 번 읽고는 감탄하였다.
한유가 태전선사에게 가니, 선사가 묻기를 “어떠한 불교경전을 읽어보았습니까?” “뭐 특별히 읽어 본 경전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태전선사는 “문장(학문)으로 이름 높은 자사께서 어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불교를 비난하셨습니까?”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한유는 자신의 잘못됨을 뉘우치고 태전선사에게 귀의하여,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어서 불교에 관한 문장도 많이 썼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태전선사가 홍련의 치마에 써준 글씨는 무엇이었을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十年不下鷲融峰 십년불하축융봉
觀色觀空卽色空 관색관공즉색공
如何曹溪一適水 여하조계일적수
肯墮紅蓮一葉中 긍타홍련일엽중
십년 동안 축융봉을 내려가지 않고
색을 관하고 공을 관하니, 색이고 공일 뿐이었네.
어찌 조계의 한 방울 물을
홍련의 한 잎새에 떨어 뜨리겠는가.
태전선사는 홍련의 유혹에 넘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조계의 한 방울 물’도 ‘홍련의 한 잎새’에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계의 한 방울 물은 남자의 ‘정액(精液)’을 비유한 것이다.
이 게송은 무엇을 말할까? 십 년을 꼼짝 않고 수행하여, 색(色)을 관하고 공(空)을 관해보니,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더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뭐 별거 없더라”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선종의 정법을 닦아서 세속의 집착이 없는 내가 “어찌 색(色)과 공(空)을 ‘분별’하고 ‘집착’하여 청정한 법신(法身) 더럽히겠는가”라는 내용이다.
악마가 보낸 세 명의 딸에 대하여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초기경전 도처에 깔려 있다. 대표적으로 부처님을 들 수 있다. 숫따니빠따에 ‘마간디야에 대한 설법의 경(Sn4.9)’이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악마가 보낸 세 명의 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Disvāna taṇhaṃ aratiṃ ragañcā
Nāhosi chando api methunasmiṃ,
Kimevidaṃ muttakarisapuṇaṇaṃ
Pādāpi naṃ samaphusituṃ na icchi
[세존]
“땅하와 아라띠와 라가를 보고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오줌과 똥으로 가득 찬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두 발조차 그것을 건드리길 원하지 않습니다.” (stn835)
부처님을 유혹하려는 세 여인의 이름은 땅하(taṇha), 아라띠(arati). 라가(raga)이다. 이는 각각 갈애, 불쾌, 탐욕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세 여인에 대하여 “오줌(muttā)과 똥(Karīsa)으로 가득 찬 것들”이라 하였다.
감각적 욕망이 완전히 소멸된 자에게 있어서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으로, 또는 매혹적인 모습으로 유혹해도 역겨울 것이다. 여인이 감각적 쾌락을 자극할지 모르지만 오염원이 소멸된 자에게 있어서는 ‘불쾌’할 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오줌과 똥과 같이 ‘역겨운 것’이라 하였을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려면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전사의 비유에 대한 경2’에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appassādā āvuso kāmā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ūpāyāsā, ādīnavo ettha bhīyyo. Aṭṭhikaṅkhalūpamā kāmā vuttā
“벗이여,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고 재난이 거기에 넘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살점 없는 뼈다귀와 같아 괴로움이 많고 고뇌가 많고 재난이 거기에 넘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사에 대한 비유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5.76, 전재성님역)
이말은 부처님제자가 한 말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비유를 들어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첫 번째 비유를 든 것이 ‘살점 없는 뼈다귀(Aṭṭhikaṅkhalūpamā)’이다. Aṭṭhikaṅkhalūpamā에서 aṭṭhikaṅkala는 ‘the skeleton’의 뜻이다. Skeleton은 해골, 뼈, 골격의 뜻이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감각적 욕망에 대하여 ‘살점 없는 뼈다귀와 같아’라 하였고, 초불연의 대림스님은 ‘해골무더기와 같아’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silmile of the skeleton’이라 하였다.
개뼈다귀 같은 감각적 욕망
감각적 욕망에 대하여 ‘살점 없는 뼈다귀’라 한 것이 와 닿는다. 이는 일묵스님의 동영상법문에서 극명하게 확인된다. 이에 대하여 ‘개뼈다귀와 같은 감각적 욕망, 알라갓두빠마경 (뱀에 대한 비유의 경, M22)(2012-11-1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일묵스님의 ‘개뼈다귀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하늘에 황금비가 내려도 중생들은 만족하지 않는다고 그래요. 황금비가 내리면 왜 다이아몬드비가 안내리냐 이러겠죠? 그죠? 그래서 만족을 모르는 것이 탐욕의 특징이구요. 또 비유로서 탐욕의 성질을 뭐라고 비유를 하냐하면 뼈다귀 같다 해요. 개뼈다귀. 왜 뼈다귀같다고 이야기하냐 하면 개가 뼈다귀를 먹으려고 하면, 막상 먹으려고 하면 먹을 건 없어요. 그죠? 거기서 고깃덩어리 몇 개 남아있지도 않으니까, 먹을 건 없는데, 그 뼈다귀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아서 사람이 이걸 떠나지를 못하는 거에요.
그런 것처럼 보통 우리 범부들의 마음도, 사실 감각적 욕망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추구를 해보면, 막상 거기서 얻어지는 행복이 그렇게 크지를 않습니다. 하고 나면 항상 허전하고, 뭔가 더 많은 것을 얻으려하고, 갈증만 나지, 막상 그것으로 인해서 만족이 일어나거나,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편안해 지거나 이러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거를 떠나지를 못해요. 계속 주위를 맴돌면서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비유를 해서 뼈다귀같다. 이렇게 표현을 한 거죠.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 왜?, 보통 성냄은 사람들이 다 누구나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성냄이 일어나면 괴롭거든요. 일단 자기가. 괴롭고. 그 성냄으로 인해서 고통이 따라오니까, 성냄은 버리려고 하는 마음이 쉽게 나는데, 탐욕이라는 것은 이 탐욕 자체가 달콤해요. 아까 말했듯이, 뭔가 개뼈다귀처럼 먹을게 있다고 생각해요.
개뼈다귀처럼 약간 달콤한 것도 있고, 그런데 막상 먹어보면 그것은 우리에게 계속 갈증만 일으키지 실제로 우리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요소는 없단 말이에요. 탐욕이라고 하는 감각적 욕망, 이거는 이 자체가 즐거움으로 느껴지거든요. 왜냐하면 달콤한게 있으니까. 즐거움으로 느껴지는데, 막상 이것이 나중에 가지고 오는 결과는 이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고통이라든가 여러 가지 고통이 따라옵니다. 사실은 이것은 이런 비유도 있습니다. 마치 독과 같다, 그래요. 달콤한 맛을 가진 독과 같다고 얘기를 하는데. 이것이 뭔가 달콤해서 추구를 하는데, 막상 그것은 우리에게 큰 손해를 일으킨다 이거죠. 그래서 감각적 욕망은 굉장히 행복으로 포장된 괴로움이라는 거에요.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5회 5장애요소와 무명 (19:57), 일묵스님 불교TV )
일묵스님의 불교tv강좌에서 녹취한 것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하여 개뼈다귀와 같다고 하였다. 왜 개뼈다귀라 하였을까? 그것은 보기에 먹음짐해 보이지만 막상 먹을 것이 없음을 말한다. 마치 ‘뼈다귀해장국’ 같은 것이다.
뼈다귀해장국을 먹을 때
뼈다귀 해장국에 뼈다귀가 있다. 살점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발라 먹고 나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다. 그럴 경우 뼈다귀를 분해한다. 분해해서 속에 있는 살점을 꺼내 먹지만 양이 차지 않는다.
개에게 뼈다귀를 주면 개는 꼬리를 흔든다. 그러나 사람이 발라먹고 난 뼈다귀에 살점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개는 뼈다귀를 이리저리 굴리며 살코기를 찾고자 한다. 이것이 감각적 욕망이라 하였다.
개뼈다귀는 보기에 그럴싸하다. 그러나 막상 먹을 것이 없다. 감각적 욕망도 살점없는 뼈다귀 같은 것이다. 그래서 감각적욕망이라는 것이 계속 갈증만 일으킬 뿐이지 실제로 우리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비유
앙굿따라니까야 ‘전사에 대한 비유의 경2’에서는 살점 없는 뼈다귀의 비유 외에 9가지 비유가 있다. 이와 같은 비유는 맛지마니까야 ‘뽀딸리야의 경(M54)’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일부에 대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비유(M54)
No |
비유 |
비유설명 |
1 |
살점 없는 뼈다귀 |
“장자여, 한 마리의 개가 굶주림과 허기에 지쳐서 푸줏간 앞에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 개에게 숙련된 도살자 내지 그 제자가 완전히 잘 도려내어져서 근육 한 점 없이 피만 묻은 해골을 던져주면,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개는 그 완전히 잘 도려내어져서 근육 한 점 없이 피만 묻은 해골을 씹으며, 그 굶주림과 허기에 지친 것을 채울 수 있습니까?” |
2 |
고깃덩어리 |
“장자여, 한 마리의 독수리나 까마귀나 매가 고기조각을 물고 나른다고 합시다. 그런데 다른 독수리들이나 까마귀들이나 매들이 뒤쫓아 날아가서 부리로 쪼고, 낚아챈다면,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마리의 독수리나 까마귀나 매가 그 고기조각을 재빨리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정도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겠습니까?” |
3 |
건초 횃불 |
“장자여, 한 사람이 불타는 건초횃불을 가지고 바람을 향해서 간다고 합시다.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불타는 건초횃불을 놓아 버리지 않아서, 그 불타는 건초횃불이 그 사람의 손을 태우거나 팔을 태우거나 다른 신체부위를 태운다면,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정도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겠습니까?” |
4 |
숯불구덩이 |
“장자여, 불꽃도 연기도 없이 이글거리는 숯으로 가득 찬, 사람 키보다 깊은 숯불구덩이가 있다고 합시다.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바라지 않고,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하는 한 사람이 왔는데, 힘센 두 사람이 그를 두 손으로 붙잡아 숯불구덩이로 끌고 간다고 합시다.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몸을 이리저리 비틀지 않겠습니까?” |
5 |
꿈속의 영상 |
“장자여, 한 사람이 아름다운 정원, 아름다운 숲, 아름다운 초원, 아름다운 호수를 꿈을 꾸면서 보다가 꿈이 깨면,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
6 |
빌린 재산 |
“장자여, 한 사람이 빌린 재물 즉 사치스러운 수레, 뛰어난 보석이 박힌 귀고리를 차용해서, 그들 빌린 재물로 분장하고 치장하여 시장으로 나갔는데, 그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참으로 이 사람은 부자이다. 모든 부자는 이처럼 재물을 즐긴다.’고 말하는데, 그 주인들이 그것을 볼 때마다, 그 때마다 자기의 재물들을 찾아간다고 합시다.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이 낙심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이 외에도 앙굿따라니까에는 나무의 열매, 도살하는 도마, 창끝, 뱀의 머리 등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초기경전에서는 선정에 들 것을 말하고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한적한 숲이나 나무 아래나 빈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가부좌를 하고 몸을 곧게 세우고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다음 단계는 오장애를 극복하는 것이다. 즉, 탐욕, 악의,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오장애가 극복 되었을 때 선정에 드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음의 해탈’을 이루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의 해탈을 이루어 ‘청정한 삶’이 완성되었을 때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전사가 흙먼지가 이는 모습도 견디어 내고 깃발의 모습도 견디어 내고 함성도 견디어 내고 싸움도 견디어 내어, 그 전쟁에서 승리자”(A5.75) 가 되는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과 거꾸로
한국불교에서 파자소암이야기를 보면 부처님 가르침과 거꾸로인 것처럼 보인다. 수행하고 있는 스님에게 딸을 보내어 시험에 들게 하였는데 잘 견디어 낸 스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다. 그런 행위라면 부처님에게 칭찬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비난 받는다. 그러면서 안아 주어야 한다느니 하며 보살행을 이야기한다. 이는 지족선사와 황진이 이야기에서 증폭된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지족선사를 파계시킨 황진이에 대하여 생불딱지를 떼어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 하였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악마의 딸들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여인의 유혹에 넘어 가는 것에 대하여 ‘긍적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 ‘보살행’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대승경전 화엄경 입법계품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창녀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여 선지식으로 추앙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불자들은 스님들의 계행에 대하여 관대한 것 같다. 이는 스님들이 ‘막행막식’하는 원인이라 볼 수도 있다.
중국의 태전선사는 여인의 유혹을 물리쳤다. 부처님도 악마의 딸들의 유혹을 물리쳤다. 이렇게 물리친 이유는 무엇일까? 수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장애를 극복하고 해탈을 이루었기 때문에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시험에 들게 하려는 ‘오염원’에 대하여 역겹고 불쾌하게 여긴 것이다. 그럼에도 선종에서는 “황진이는 지족 선사를 시험하기 위해 현신한 관음보살”운운하고 있다.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있다. 애를 써서 이루었던 일이 한순간의 실수로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지족선사와 황진이의 이야기에서 유래 된 것이라 한다. 생불이라 추앙 받던 지족선사의 십년공부가 하루 밤 사이에 수포로 돌아 간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나온 속담이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 한다. 과연 황진이는 지족선사에게 관세음보살이었을까?
한국불교에서 파자소암이야기는 ‘공안’으로 회자 되고 있다. 또 ‘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의 원형 지족선사와 황진이이야기가 있다. 두 이야기 모두 ‘보살행’을 강조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과는 ‘거꾸로’인 것처럼 보인다.
2015-12-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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