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노래가 바로 이 노래 이었구나!”금지곡 스텐카라친(Stenka Razin)
어느 인터넷카페에서
스텐카라친(Stenka Razin), 잠자고 있는 기억을 깨웠다. 어느 카페에서 이름도 생소한 ‘스텐카라친’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처음 들어 보는 제목이라 흥미를 끌었다. 읽어 보니 러시아민요라 한다. 스마트폰으로 본 사연은 이렇다.
광복 직 후 나의 고향 옆집엔 일본인이 살다가 8.15 해방으로 패망하여 본국으로 떠나고 난 빈 집에, 만주에서 키 큰 일가족(친구 금정란네 가족)이 귀국해 왔다.
그애 금정란의 이모는 긴 가죽 장화를 신은 키가 큰 미인으로 갖고 온 큰 오르간으로 우리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던 게 바로 스텐카 라친 이었다. 목소리도 크고 우렁찬 이모는 무용도 잘 가르쳐주었다.노래에 맞춰 오르간 반주에 따라 무용으로 시멘트 바닥의 공간을 빙빙 돌며 즐겁게 뜻도 모르는 노래를 불렀다.
가사 중에 배 위에서, 등의 가사에서는 노젓는 흉내를 짓기도 하며 페르샤의 공주 에서는 치마가 휘휘 펄럭이도록 빙글르르 돌며 화려한 포즈를 지었다.참 즐거운 무용이었다. 끝에가서 노래의 절정일대는 두손을 옆으로 모두 이어잡고 안으로 모여들며 홉핑스텝을 하였다가 어깨동무를 둥글게 하여 원으로 한 쪽 방향으로만 스담프 스담프 런닝스텝으로 뜀뛰어 돌았는데 후에 생각해 보면 마치 러시아나코사크 민족들의 민속춤 흉내였었던 것 같다.
뒤로 흩어져 나와서는 각자가 마음껏 발레포즈로 돌다가 어지러워 그대로 쓰러져 엎드리면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며 못 일어나는 아이를 페르샤 공주라 불러 주었다. 공주라는 말이 좋아 나는 일부러 앞드려 오 ~래 있기도 했는데 언제나 잘 했다고 커다란 손바닥 만한 쵸코레트를 선물로 주었다..
해방 후 1학년을 계속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금정란은 키도 크고 음성도 이북 억양이지만 크고 똑똑하여 공부도 아주 잘 해서 급장을 하기도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후 얼마 못 있고 그 가족은 밤사이에 어디론가 갑자기 떠나가고 우리이웃에서 사라지고 소식이 두절 되었다. 남은 친척들도 아무도 없는 뜨내기 가족인것 같았다.
성인이 되어 6.35 등의 역사적 사건들을 당하고 이해하면서 그들은 남한에 침투하여 공산당을 조직할 간부급 러시아(로스께)당원들이란걸 어른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금정란 집 엄마 화장대 설합속엔 금반지와 네모 모양 금덩어리들이 몇개씩 들어있어 보여 주며 자랑을 했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싸주신 선물이라 하여서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할머니께 말씀드렸더니 그집에 놀러를 못가게 혼내시었던 기억이 난다. 그 집에선 늘 쇠고기로 쓰끼야끼 음식냄새가 이웃에 퍼지고 흰 쌀밥만을 잘 먹고 살았는데 항상 젊은 청년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서 만세도 가끔 부르며 노래도 힘차게 불러댔다.
그들이 떠난 후에도 이웃에 살던 내 친구들은 함께 스텐카 라친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 노래에 맞추어 고무줄 놀이도 하며 가사중에 [배위에서]가 나오면 그 자리에 동작 멈추고 노젓는 흉내를 내었고,다시 [페르샤의 ~공주] 가사에서는 그자리에서 치마를 잡고 빙~그르르 돌아 춤추었다. 고무줄 놀이에 그 때의 춤을 넣어 놀이를 했었다. 금정란은 이 나이에 어느하늘 아래에서 열심히 스텐카라친의 노래에 피웠던 추억을 떠 올리기라도 하는지...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참 즐겁고 신기한 구경거리들로 재미있어 잊혀지지 않는 어린 날의 추억이다.
오래전 민족 성지 답사 발해를 찾아서 집안땅 용정, 두만강변 등지로 갔을때 그 하늘 바라보며 어린날의 곱슬머리 금정란 친구 얼굴을 떠올려 보며 북녁 어디엔가 살고 있을가? 하고 유년의 추억은 아름다움인걸 잠시 생각하였다...'넘쳐넘쳐 흘러가는 저 볼가강물 위에~'저절로 소리가 흘러나온다 .
- Ellicott City에서 도명-
(출처: 스텐카 라친 [안나 게르만])
누군가 올린 사연을 읽어 보니 유년시절의 추억을 아스란히 회상하고 있다. 그것은 노래 스테카라친에대한 추억이다. 노래가사에 맞추어 러시아식 댄스를 춘 것이 오늘날에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지막히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넘쳐넘쳐 흘러가는 저 볼가강물 위에~”를 들으며 옛날을 회상하였다는 것이다.
스테카라친은 금지곡
러시아민요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민요 ‘카츄사(Katsusa)’에 대하여 ‘카츄사 각국어 버전과 러시아 포크댄스, 남부군에서 본 달밤의 괴기한 피아골축제(2014-12-1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도 있다. 올린 글에서 수 많은 각국어 버전을 올려 놓았다.
우리나라에는 수 많은 러시아민요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스테카라친은 매우 생소하였다. 그런데 소개글을 보니 ‘금지곡’이라 하였다. 70년대 소위 운동권이 불렀다는 것이다. 특히 가수 이연실이 번안해서 불렀다고 하였다.
스테카라친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노래를 듣기 위하여 검색하였으나 다음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구글검색결과 찾을 수 있었다. 이연실이 부른 ‘외국민요-스텐카라친 -러시아 민요-이연실 노래’ 노래를 들어 보았다.
스테카라친을 들어 보니 멜로디가 익숙하다. 어디선가 들어 보던 것이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가 비장한 느낌이다. 계속 들어 보니 ‘볼가강’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사촌형이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옛날에 들어 보는 노래가 이제 기억나는 것을 보니 여전히 금지곡임에 틀림 없다.
사촌형과 한방을 사용하였는데
사촌형이 있다. 사촌형은 노래를 잘 불렀다. 틈만 나면 노래를 불렀는데 그 중에 들었던 멜로디와 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방에서 벽을 기대고 나지막히 노래를 불렀는데 “볼가강은 흐르고”라든가 “페르샤의 공주가” 등의 가사가 잊혀 지지 않는다. 하도 많이 들어서인지 멜로디와 가사를 기억할 정도이다.
그 때 당시 형은 대학교 1학년 이었고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때 당시 형은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왔었다. 상경하면 누구나 그렇듯이 친척집 신세를 지는데 형도 그랬다. 작은 아버지 집에서 일년을 보낸 것이다. 그래서 형과 한방을 사용하였다.
형은 서울대학교를 다녔다. 지방에서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한 형은 수재이었다. 이미 지방 명문중학교를 수석으로 들어갔을 정도로 머리가 총명하였고 집안에서 기대하는 인재이었다. 그래서 모두 법대 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문리대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가 1973년의 일이다.
중학교 1학년 때 큰 변화가 생겼다. 갑자기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온 형과 한방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형은 갖가지 책을 가져 왔다. ‘사상계’라든가 ‘문학과 지성’과 같은 잡지책을 많이 가져다 놓았다. 심심해서 그런 책을 읽어 보았다. 중학교 1학년이 읽기에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감은 잡았다.
형은 종종 ‘대학신문’을 가져 왔다. 서울대학교신문을 ‘대학신문’이라 한다. 가지고 온 신문 중에 4.19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현시점에서 4.19를 조명해 보자는 기사이었다. 그러고 보니 1973년은 4.19가 일어난지 13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이 일어난 해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기사는 마치 논문처럼 어렵고 길었다.
형은 종종 시집도 가져 왔다. 시집 중에 ‘황토’가 있었다. 김지하시집이었다. 책의 표지에는 김지하의 얼굴이 좌우로 갈리어 반은 흑으로 반은 회색으로 되어 있어서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책을 읽어 보았다. ‘시뻘건 황토길’이라든가 ‘가도가도 황토길’과 같은 문구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때 당시 형은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어른들과 토론하는 것을 보면 자세히 설명해 줄 정도이었다. 그런 형에게 어른들은 늘 몸조심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렇게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하고 토론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른 형은 ‘큰 무게’로 다가왔다. 나도 저 나이에 저 정도까지 될 수 있을까 하는 ‘중압감’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형은 그 때 당시 나이가 ‘스무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넘지 못할 큰 산처럼 느껴졌다.
스텐카라친은 어떤 노래인가?
형은 노래를 잘 불렀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가수를 해도 될 정도로 목소리가 맑기도 때로는 굵기도 하였다. 특징은 배에서 울려 나오는 배울음 소리이었다. 그런 노래 중의 하나가 ‘볼가강은 흐르고’ ‘페르샤의 공주가’ 라는 가사의 노래이었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으로 이연실의 노래를 들으니 그 때 당시 형이 부르던 바로 그 노래 이었음을 지금 비로소 알았다. 이연실이 부른 스테카라친의 가사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물 위에
스텐카라친 배 위에서
노래 소리 들린다.
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은 띄운 그 입술에
노래 소리 드높다.
동편 저 쪽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리다.
다시 못올 그 옛날에
볼가강이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라친,
장하도다, 그 모습
(스테카라친)
(스테카라친)
스테카라친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일까? 설명문에 따르면 스텐카라친은 1668년에서 1670년 봄까지 계속되었던 러시아 농민반란의 지도자이었다. 농민군은 한때 챠리친, 아스트라한, 사라토프 등 주요한 지방을 점령하였지만 서구식으로 훈련받은 정부군의 반격으로 3년만에 패배하였고 스텐카라친도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스텐카라친 노래가 비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극적 사랑에 있다. 스텐카라친은 페르시아로부터 납치한 아름다운 공주를 놓고 고민하였다. 동료들의 단결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랑하는 공주를 볼가강에 집어 던진 것이다.
그 이후로 스텐카라친은 러시아 민중의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다. 또 그를 기리는 수많은 민요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초 독립군들이 즐겨 부른 노래중 하나였고 70년대 소위 운동권과 가수 이연실이 번안해 불렀다.
“아, 그 노래가 바로 이 노래 이었구나!”
스텐카라친은 금지곡이었다. 이는 러시아민요로서 운동권에서 많이 불렸기 때문일 것이다. 또 러시아의 ‘Red Army Chorus(붉은 군대 합창단)’에서 군가로 불리웠을 정도이기 때문에 금한 것이라 본다. 그래서 청소년기는 물론 이후에도 들어 볼 수 없었다. 다만 형이 방한켠에서 나지막히 부르던 노래가사 일부와 멜로디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카페 글을 보니 그 동안 잠자고 있었던 기억을 일깨웠다. 그러면서 “아, 그 노래가 바로 이 노래 이었구나!”라며 이제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렇게 알게 되기 까지 수 십년이 걸렸다. 스테카라친은 여전히 금지곡일까?
2015-12-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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