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교닷컴은 언터처블(Untouchable)? 자발적유료화에 동참하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2. 17. 12:03

 

불교닷컴은 언터처블(Untouchable)? 자발적유료화에 동참하며

 

 

언터처블(Untouchable)

 

언터처블(Untouchable), 이 말을 아는가?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라는 뜻이다. 불교닷컴 이석만 대표와 식사하면서 들은 말이다. 오랜만에 종로에 갈 일이 생겨서 두산위브빌딩에 있는 불교닷컴을 찾았다. 올라가니 전망이 좋았다. 바로 아래에는 고래등처럼 큰 조계사 대웅전이 보이고 저 멀리 북악산이 엄청나게 가까이 있다. 안면이 있는 서현욱기자와 인사를 하고 함께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이석만대표에게 식사대접을 하였다. 이대표에 따르면 현재 불교닷컴은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신세라 하였다.

 

 

 

 

 

21세기 현재를 살아 가는 한국에서도 언터처블이 있다. ‘불교닷컴이다. 아니 불교닷컴불교포커스두 언론매체이다. 왜 언터처블인가? 그것은 접촉하면 안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조계종 총무원에서 광고도 하지 말고 기고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만일 종단 사찰이나 관련기관, 그리고 스님들이 광고나 후원을 하거나 기고를 하면 불이익을 당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중앙일보가 삼성대하듯이

 

어느 스님은 카페에 이렇게 심경 고백을 하였다. H스님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 생각의 차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생각의 차이 때문에 상대방을 규제하려 한다면 그때부터 생각의 차이는 저주이며 제거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라 하였다. 언론을 규제하려는 자체가 비민주적이며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만일 해종언론이라 하여 모두 없애 버리고 우호적 매체만 살려 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비판기능은 실종되고 용비어천가만 부르게 될 것이다. 이는 중앙일보가 삼성에 대한 비판기사를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현재 조계종총무원은 해종언론이라 하여 두 곳을 타겟으로 하여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것은 경제적 압박은 물론 법적으로, 그리고 갖가지 방법으로 옥죄고 있다. 항복하든지 어떻게 하라는 식이다. 또 한편으로 해종언론에 우호적인 승가와 재가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말한마디도 실명으로 하지 못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승가나 재가나 한마디 발언도 희생을 각오하며 말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대명천지 21세기 민주사회에서 가능한 일일까? 한국불교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한국불교이기 때문에 불법과 탈법과 비법이 예사로 일어나는 것이다.

 

누가 해종행위를 하는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서 언론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양식있는 불자들은 울분과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나 종단 권력을 가지고 있는 스님들(이하 권승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런 불법행위가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최근 한겨레신문에서는 불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식이하의 작태에 대하여 고발하였다. 한겨레신문 2015 1214일자 동국대를 동국사로 여기는 조계종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조계종에 비판적인 세력을 종단 차원에서 탄압하고 있다.”라 하였다. 그리고 종단차원에서 해종언론대책위원회까지 꾸려 이들 매체에 대해 취재 지원 중단, 종단 출입 금지, 광고·후원 중단, 이미 게재된 광고 삭제, 간담회·인터뷰 금지 등 지침을 종단 산하 사찰에 내려보냈다.”라 하였다.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네티즌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거의 대부분 총무원의 언론탄압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심지어는 갖은 욕설과 비아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모습이 일반국민들에게 보여졌을 때 어떤 반응은 보일까? 불교에 대하여 부정적 생각을 할 것임에 틀림 없다. 시대착오적이고 구시대적 작태라 볼 것이다. 이렇게 한번 생각이 틀어지면 여간해서는 회복되기 힘들다. 대중매체에서까지 불교현안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부정적으로 보도할 정도라면 심각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해종행위를 하고 있는 곳은 조계종 총무원이 아닐까?

 

만일 총무원의 잣대로 본다면 한겨레신문도 해종언론임에 틀림없다.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에 언터처블조치를 내렸듯이 한겨레신문도 제재해야 할 것이다. 아니 극성스런 일베도 법적조치를 내려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유독 두 매체만 불가촉천민으로 규정한다면 불공정한 것이다.

 

권승들의 행태를 보면

 

종단권력을 가진 스님들은 왜 언론탄압을 할까? 아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혹시 영구집권을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70년대 유신시절처럼 장기집권을 위하여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렸던 것처럼, 권승들은 종단권력을 계속 거머쥐기 위하여 비판적 언론의 말살을 시도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2선에 만족하지 않고 3선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대명천지 21세기에 말도 안되는 상식 밖의 행위를 버젓이 자행하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요즘 권승들의 행태를 보면 누구나 비신사적이라 한다. 여기서 비신사적이라는 말은 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계행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식 밖의 일을 버젓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권승들의 행태에 대하여 ‘OO논리심지어 양OO같은 행태라고 비판한다. 출가자로서 해서는  안될 도박, 음주, 은처 등 상식밖의 일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시대적 산물인 언론탄압이 대표적이다.

 

스님들이 룰을 지키지 않다 보니 승가사회 전체가 타락하고 있다. 그래서 스님들이 술을 마시고 고기 등을 먹는 막행막식이 만연하고, 어른스님이나 어린스님 할 것 없이 토굴갖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상대를 원한다고도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는 뿌리가 썩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한국불교는 뿌리가 썩은 보리수와 같다는 것이다.

 

막행막식하며 사는 스님이 대다수라 한다. 그러다 보니 계행을 지키며 사는 스님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가 아니라 극소수이다. 소수라면 51% 49%의 구도에서도 49%를 소수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극소수라 하였을 때 10% 미만으로서 불과 1-2%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불자들은 계행을 지키는 극소수의 스님들을 부처님처럼 받들며 공양해야 한다.

 

인디언보호구역처럼

 

현재 한국불교는 외면받고 있다. 권력을 가진 스님들의 전횡에 모두 고개를 돌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자리를 차지 하는 것이 다. 이는 최근 동국대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권승들의 행태가 마치 인디언 보호구역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한국불교는 조상들이 물려준 막대한 토지와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찰을 차지하고 있으면 여러 가지 이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국고보조금이고 또 하나는 관람료이다. 그래서 인디언보호구역에서 사는 것과 하등 다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권력을 가진 스님들은 이런 이권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잘못에 대하여 지적하고 비판하는 언론을 용서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제재를 가하고 법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그리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자 한다. 동시에 동조하는 사람이나 단체에게 조차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기어이 똥통간으로

 

권불십년이라 하였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자도 때 되면 내려와야 한다. 천년만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 놓고 출가한 스님들이 권력을 탐하고 재산을 탐하고 더구나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였을 때 이는 부처님가르침에 대한 배신이다. 부처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출가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Seyyathāpi bhikkhave, mīhakā gūthādī, gūthapurā, puṇṇā guthassa, purato cassa mahāgūthapuñjo. Sā tena aññā mīhakā atimaññeyya: aha hi gūthādi, gūthapūrā, puṇṇā gūthassa, purato ca myāya mahāgūthapuñjo'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똥벌레가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그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면, 그 똥벌레는 나는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 똥으로 충만하고도 내 앞에 큰 똥덩이가 남아 있다.’고 다른 똥벌레들을 무시한다.”

 

(Mīhakasutta-똥벌레의 경, 상윳따니까야 S17.5, 전재성님역)

 

 

여기서 똥벌레(mīhakā)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추구하는 빅쿠를 말한다. 그런데 똥벌레는 똥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똥이 있는 곳으로 기어이 가고자하는 것이다. 아무리 깨끗한 방에 원앙금침을 깔아 주어도 기어이 똥통간으로 향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탁발나가서 양껏 얻어 먹고 다음날 식사에 초대받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서로 다른 번역을 보고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압도된 빅쿠가 있다. 그는 마음이 마음이 현혹되고 전도 된 채로 탁발을 나간다. 어느 마을에 나가 배불리 양껏 얻어 먹는다. 그리고 다음날 초대받았다고 자랑한다. 실컷 먹는 것으로 보아 마치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고, 마치 명예가 있어서 초대받은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그 수행승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압도되고 마음이 현혹되어 다른 수행승들을 무시한다.” (S17.5) 라 하였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다르다. 각묵스님은 그는 이득과 존경과 명성에 압도되고 전도된 마음을 가져, 계를 잘 지키는 다른 비구들을 무시한다.” (S17.5) 라 하였다. 가장 큰 차이는 다른 수행승들을 무시한다.”(전재성님역)라는 구절과 계를 잘 지키는 다른 비구들을 무시한다.”(각묵스님역)라는 구절이다. 전재성님은 다른 수행승들을 무시한다라고 하였는데, 각묵스님은 계를 잘 지키는사람을 덧붙여서 다른 비구들을 무시한다라고 하였다. 서로 다른 번역이다. 대체 누구 번역이 맞는 것일까?

 

서로 다른 번역에 대하여 빠알리 원문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So tena lābhasakkārasilokenābhibhuto pariyādinnacitto aññepesale bhikkhū atimaññati.”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aññepesale’이다. 빠알리어 ‘aññepesale’‘añña+pesala’로서 합성어이다. Añña‘other’의 뜻이고, pesala‘well behaved’의 뜻이다. 따라서 바르게 행위하는 다른이라는 뜻이 된다. 이는 ‘aññepesale bhikkhū’는 문구에서 바르게 행위하는 다른 빅쿠라는 뜻이 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른 수행승들을이라 하여 바르게 행위하는이라는 뜻을 빠뜨렸다. 각묵스님은 계를 잘 지키는 다른 비구들을이라 하여 원문에 없는 계를 지킨다는 말을 넣어 과도한 의역을 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other well-behaved bhikkhus’라 하여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였다.

 

오랫동안 불익과 고통을 당할 것

 

이득(lābha)과 명예(sakkāra)와 칭송(siloka)은 똥(gūtha)과 같은 것이다. 구더기가 똥통을 떠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출가한 스님이 권력을 탐하고 재산을 가지고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면 똥벌레와 다름 없는 것이다. 더구나 똥벌레들은 똥을 많이 먹고 똥을 많이 가진 것에 대하여 능력있는 것처럼 과시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다른 똥벌레를 무시한다. 마찬가지로 권력을 가진 스님들은 계행을 지키며 사는 스님들을 무시하는 듯하다. 청정한 삶을 사는 스님들을 종단권력에서 배제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미혹하고 전도된 마음을 가진 자들에 대하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랫동안 불익과 고통을 당할 것이다.”(S17.5) 라 하였다. 왜 그럴까? 이득과 명예와 칭송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 이라서 멍에를 여윈 위없는 안온을 얻는데 장애가 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세세생생 윤회하는 세계에서 고통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

 

자발적 유료화에 동참하고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는 언터처블이다.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불가촉천민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조계종에서는 두 매체에 대하여 해종악성매체로 규정하여 접속을 차단시키고 접촉자체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평등을 지향하는 불교에서 현대판 카스트제도를 부활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이는 인도에 사성계급이 있다면 한국불교에서는 오성계급이 있다고 하였다. 왜 오성계급인가? 오성계급이란 비구, 비구니, 재가종무원, 종단산하단체 직원, 자원봉사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재가불자들은 이 오성계급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적 지적에 조계종에서는 명예훼손 등 법적대응에 나선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조계종에서는 두 언론 매체에 대하여 불가촉천민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느 카스트에도 속하지 않은 가장 낮은 계급으로 만든 것이다. 마치 인도 카스트에서 가장 낮은 하리잔을 대하는 듯 하다. 하리잔과 접촉하면 오염된다고 보듯이 두 매체에 접촉하는 것조차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법적으로 옥죄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에 글을 쓰면 해종행위라고 한다. 스님이라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광고주라면 역시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고사작전을 하면 어떻게 될까?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그러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하였다. 불자들이 이 두 매체를 지켜나가려면 자발적 유료화에 동참하여야 한다. 그래서 두 매체를 살려 내야 한다. 매월 만원 이상이면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다. 오늘 자발적 유료화에 동참하였다.

 

 

 

2015-12-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