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하기에 좋은 목소리 여덟 가지
스마트폰시대이다. 손안의 작은 컴퓨터와 다름 없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만사 OK이다. 각종기능이 ‘앱’으로 저장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활용할 수 있다. 이렇게 인터넷과 모바일 그리고 앱으로 이루어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도 얻을 수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법문’이다.
요즘 법사들의 법문을 듣고 있다. 일터에서는 데스크탑으로 듣지만, 편안하게 쉴 때나 이동할 때는 스마트폰으로 듣는다. 유튜브에 실려 있는 다양한 법문들이다. 그런데 법문을 듣다 보면 매우 거슬리는 것도 많다. 법문내용도 거슬리지만 법사의 태도와 말투도 거슬린다.
원맨쇼 하듯이 하는 법문
여러 스타일의 법사들이 있다. S스님은 마치 원맨쇼 하듯이 자신을 과시한다. 마치 스타라도 된 듯 하다. 법문하면서 마음껏 끼를 발산한다. 교리를 설명하지만 내용은 잘 들어 오지 않는다. 다만 S스님의 행위와 말투와 얼굴표정에 집중된다.
S스님은 코메디언인지 스님인지 구별이 안간다. 법문도중에 우스개 소리를 밥먹듯이 하며 흰 이빨을 보이며 웃기도 한다. 아주 자유롭게 ‘내키는대로’ 말을 내 뱉는 스타일이다. 더구나 강한 억양의 사투리로 아주 독특한 ‘의성어’를 사용한다.
S스님의 말투를 보면 의성어 투성이다. 어떤 식인가? 예를 들어 ‘길게’라는 말을 할 때 목젖을 이용한 의성어로 “기이일~게” 라 한다. 이렇게 법문 중간중간 의성어를 자주 사용하다 보니 듣기가 매우 불편하다. 한번은 들을 수 있지만 두 번 듣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연설하듯이 하는 법문
Y스님이 있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듣기가 매우 거북하다. 내용은 들어 오지 않는다. 말하는 태도가 몹시 불편한 것이다. 마치 연설하듯이 법문한다. 힘을 주어 강조 할 때 정치인들이 선거유세를 하는 것 같다.
말을 할 때 마다 힘이 들어 가다 보니 그 힘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힘주는 말을 듣고 나면 불쾌하다. 그럼에도 법문 내내 힘주어 말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법문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두 번 들을 수 없다.
“한국말인데 통역을 해야 알아 들을 정도에요”
오래 전에 종정을 지냈던 S스님은 사투리가 매우 심하다. 너무 심해서 알아 듣기 힘들다. 억양이 강한 사투리를 내키는대로 말한다. 그러나 어록이 책으로 나온 것을 보면 사투리가 들어가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논리적이다. 그렇다면 S스님의 사투리는 어느 정도일까? 이에 대하여 혜국스님은 동국대정각원 토요법회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어른은 여러분이 인제 안모셨던 분들은 아주 말씀도 천천히 하시고 그럴 것 같지만 한국말인데 통역을 해야 알아 들을 정도에요.(웃음) 이걸 딱 들고 ‘$#@%%32**993냐(벼락같이 고함침)’. ‘이거 보이냐’ 이말이에요. ‘예, 보입니다 스님’ ‘%$#@9755^$$3%%고(벼락같이 고함침)’ 딱 이렇게 합니다. ‘눈으로 봅니다’그랬더니 딱 거두고 깜깜한데 ‘*%$^47347355$$&노’. 깜깜한데 이걸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우린 모르죠. ‘스님 안보입니다’ 하니까 ‘왜 안보이노’ 스님 깜깜해서 안보이는 것 아닙니까? 꿇어 앉아 발발 떨면서 얘기 하는 거에요.”
(혜국스님, 2013년 10월 08일 정각원 교직원 법회)
혜국스님이 정각원 법회에서 한 말을 보면 S스님의 사투리가 매우 심했을 알 수 있다. S스님이 “$#@$%55##92$*”라고 벼락치듯이 말하였을 때 알아 듣지 못함을 말한다. 그럴 경우 통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에 아는 사람만이 알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이미 작고한 유명스님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알아 듣기 힘들다. 특히 억양이 심한 사투리를 듣다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또 말이 매우 빠르다. 성격이 급해서일까 말을 할 때 주어와 동사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나중에 해야 할 말이 먼저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책을 보면 표준어로 이해하기 좋게 편집되어 있다. 이처럼 논리도 갖추어져 있지 않고 알아듣기도 힘들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법문은 한번은 들을 수 있지만 두 번 듣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호통치듯이 하는 법문
언젠가 부처님오신날 ‘ C사’에 간 적이 있었다. 아마 2000년 쯤의 일이라 본다. 안양, 의왕, 과천, 군포 이렇게 네 도시 120만명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사찰이어서일까 그날 청계사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다. 그때 당시 주지는 전에 불국사주지를 지냈던 ‘J스님’이었다. 오전 법회에서 스님은 법문을 하였다.
풍채가 좋아 보이는 스님은 의자에 앉아 대중들을 향해 법문을 하였다. 처음으로 듣는 법문이라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뭐라도 하나 건질것을 기대하고 들었으나 들은 것은 온통‘호통’뿐이었다. 이른바 ‘호통법문’을 말한다.
J스님은 주로 보시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신도들이 불전함에 넣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바라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넣어봐!”라며 반말하듯이 말한다. 마치 교장선생님이 조회할 때 훈계하듯이, 또는 조직에서 보수가 명령하듯이 말한다.
말끝마다 힘주어 말하는 스님
호통법문을 종종 볼 수 있다. 마치 국회의원이 선거철에 연설하듯이 연설톤으로 말끝마다 힘주어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 신도들을 훈계하듯이 나무라며 이야기한다. 그런 호통법문을 유튜브에서 보았다. 유튜브를 보면 ‘생명의 실상’이라 하여 유명스님들의 법문을 시리즈로 모아 놓은 것이 있다. 그 중에 Y스님의 법문이 있다.
Y스님의 호통법문은 어떤 것일까? 커다란 목소리로 마치 국회위원 연설하듯이 재가신도들의 신행행태에 대하여 나무란다. 그 중에 보시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제자, 부처님의 제자 하면서 무당 점쟁이들이 와 가지고 혓바닥으로 공갈하면 몇 백만원도 아깝지 않은 양반들이 부처님 앞에 와 가지고 불공 한다고하면 돈 몇 만원이 아까워 가지고 벌벌 떠는 그게 한국 부처님 제자딥다.
(Y스님 생명의 실상)
스님은 재가자의 보시행태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절에 와서는 찾아 먹을 것 다 찾아 먹으면서 무당이나 점쟁이 한테는 아낌없이 돈을 주는 행태를 말한다. 절에다는 큰 보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공 한다고 하면 돈 몇 만원이 아까워 가지고 벌벌 떠는 것이 신도들이라 하였다.
“기껏 내 놓는 돈이 천원 이천원”
스님들이 법문할 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빠뜨리지 않는 것이 있다. 특히 자신의 절에 다니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할 때 반드시 나오는 말이 ‘보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 신도들은 속으로 “또 돈 이야기 하는구나”라며 마음으로 경계한다.
Y스님도 보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무당집에다는 굿을 하는 명목으로 수 백만을 주는데 비하여 절집에다는 고작 몇 천원 보시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여기에 기쁜 마음으로 내 재산 전부를 다 바쳐도 이 불사한 사람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차라리 내가 택시 타고 가야 할 돈이 필요하고 그래도 법당에 내 놓을 돈은 없는게 한국신도들이에요. 곳곳에 무슨 불사 무슨 불사 하는데 기껏 내 놓는 돈이 천원 이천원.”라고 말한다.
“아들이 중 되러 갈라꼬 하면”
스님의 호통법문은 계속 된다. 이번에는 출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님은 먼저 신도들에게 “혓바닥만 가지면 불교신도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한국 신도는 거짓말쟁이에요. 여러분들이 진정코 불교가 좋아 가지고 내 목숨을 바쳐도 부처님을 배반할 수 없고 부처님 가르침을 믿겠고 실천하겠다는 분 계시면 아들 딸 중 만든 엄마 누구에요?”라고 말한다. 말로만 신행하며 실천하지 않는 불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Y스님은 자녀를 스님으로 만든 부모가 있는지 묻는다. 그러면서 “아들이 중 되러 갈라꼬 하면 죽음의 길 가는 것처럼 말기고 이게 한국의 어머니들에요. 그러면서 불교가 좋고 부처님을 믿는다는 소리가 나와요?”라며 호통친다.
스님의 호통법문을 들으면 주눅든다. 뭔가 크게 잘못한 죄책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보시를 해야 하나 많이 못해서 미안하게 만들고, 더구나 자녀 중에 출가시키지 못한 것을 또 미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호통만 듣고 있다 보면 똑 같은 호통을 두 번 듣기에 무리가 따른다.
천상의 목소리
어떤 법문이 듣기 좋을까? 내용도 좋고 목소리도 좋고 태도도 좋은 법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 중에 ‘목소리’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 본다. 표준말을 이용하여 뚜렷하고 명확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몰입하게 될 것이다. 목소리와 관련하여 디가니까야에 이런 말이 있다.
[야차]
세존이시여, 하느님 싸낭꾸마라는 이러한 의취를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하느님 싸낭꾸마라가 이러한 의취로 말할 때 그 목소리는 여덟 가지 특징 곧,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징을 갖추었습니다.
(Janavasabhasutta-자나바싸바의 경, 디가니까야 D18,전재성님역)
야차는 부처님에게 ‘하느님의 목소리(brahmasara)’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범천의 목소리를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천상의 목소리’이다. 천상의 목소리는 여덟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곧,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징을 갖춘 목소리를 말한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법사가 있다면
주석에서는 천상의 목소리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 있다. 먼저 유창한 목소리이다. 유창하다는 것은 잘 통해서 장애가 없는 것을 말한다. 지적인 목소리는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뜻이다. 달콤한 목소리는 감미롭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또렷한 목소리는 듣기에 알맞고 귀에 즐겁다는 뜻이다. 낭랑한 목소리는 일체가 되어 흩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명한 목소리는 명료하여 혼란이 없다는 뜻이다. 심오한 목소리는 단전으로부터 깊이 일으킨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공명하는 목소리는 큰 비구름의 북소리처럼 크게 울린다는 뜻이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법사가 과연 있을까? 만일 있다면 여러 번 수 도 없이 들을 것이다.
2015-12-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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