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마루빠(Namarupa) 이름-형태인가 정신-물질인가? 이중표교수 중론(中論)강연을 듣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23. 18:06

 

 

나마루빠(Namarupa) 이름-형태인가 정신-물질인가? 이중표교수 중론(中論)강연을 듣고

 

 

 

중론강좌를 듣고 있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영상자료를 통해서이다. 현재 이중표교수와 김성철교수의 중론 강좌를 듣고 있다. 두 강좌를 통하여 느낀 것은 중론에 대한 회의적시각이다. 처음부터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하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론이다. 특히 이중표 교수의 중론강좌를 접하고서 그런 생각이 확고 해졌다.

 

이중표교수의 중론강좌를 접하고

 

이중표교수의 중론강좌 여러 편을 들었다. 일을 하면서 한쪽 귀로 듣고 메모하는 형식을 취했다. 순전히 반박하기 위해서 메모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러 번 듣게 되었다. 한번 듣고 흘리는 것이 아니라 녹취하면서 들었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 어떤 의도로 강의 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중표 교수는 강좌 모두에서 대승불교가 초기불교와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바탕으로 하여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라 하였다. 이를 화엄경을 예로 들었다. 그래서 화엄경은 대승경전이죠?  화엄경을 읽으면서 화엄경 속에 부초님의 말씀이 가장 정확하게 해석 되어 있다는 경험을 받았어요. 화엄경이라 해서 근본불교와 큰 차이가 있느냐 하면, 제가 볼 때는 차이가 없어요.”(중론1 3:42) 라 하였다.  여기서 3:42의 뜻은 3 42초라는 뜻이다. 말해진 시간대를 말한다. 동영상의 경우 시간대를 표시 하지 않으면 어느 때 말했는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와 다르다고 한다. 경전도 다를 뿐만 아니라 신행방법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불교학자 체르바츠키는 “마하야나(대승) 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라고 주장하였다.

 

초기불교 또는 테라와다불교 입장에서 본다면 대승불교는 완전히 다른 종교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대승불교 신봉자들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과연 경전을 읽어 보기나 하고 그런 소리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이중표교수는 근본불교를 가지고 화엄경을 해석하거나 화엄경을 가지고 해석하게 되면 더더욱 내용과 의미가 뚜렷해진다는 것입니다.” (중론1 4:44) 고 하였다.  근본불교를 연구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대승의 교리를 보니 근본불교의 연장선상이고 오히려 근본불교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다. 중론이라는 논서를 통해서 근본불교를 정확히 볼 수 있음을 말한다.

 

대승불교의 창시자 용수

 

이중표교수는 중론의 저자 용수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아버지, 2의 붓다라 하였다. 이런 평가를 받은 근거가 중론에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용수는 사실상 대승불교의 창시자나 다름 없다.

 

새로운 종교는 이전의 종교를 비판하고 극복하고 성립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독교의 경우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다. 부처님은 고대인도의 브라만교를 비판하였다. 이는 초기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는 역사적으로 기존종교인 브라만교를 비판하며 성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육사외도 사상도 비판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종교는 기존의 질서를 부수고 창립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용수는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든 것이나 다름 없다. 용수 이후에 전개 되는 대승불교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용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하였을까? 만약 바르게 해석하였다면 근본 가르침에 충실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해석했어야 한다. 그러나 용수의 중론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용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부수고 새로운 불교를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중관학을 전공한 김성철 교수의 강연에서도 확인 된다.

 

김성철 교수의 중론강좌를 보았다. 해인사 학인 스님들을 대상으로 2003년에 강연한 유튜브동영상이다. 김성철 교수는 중관학에 대하여 타종교인과 논쟁 또는 대론 할 때 많이 이용된다고 하였다. 이는 중론으로 상대방의 논리를 부수는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강연 중에 놀라운 말을 하였다.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중론에 대하여 용수보살도 처음엔 공의 논리학을 창안하신 다음에 평생을 소승불교를 논파하며 사셨죠.”(해인사 2003중론김성철 7, 16:53) 라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첫 번째는 소승불교라는 거리낌 없이 말한다는 것이다. 교양있는 불교인이라면 소승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용수가 중론의 논리로 초기불교,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죽을 때 까지 평생동안 소승불교를 논파하며 사셨죠라 하였다.

 

두 불교학자의 입에서 서로 다른 말이 나왔다. 이중표 교수는 중론이 근본불교를 바르게 해석한 것이라 하고 화엄경 등 대승경전이 근본불교를 잘 설명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반면 중관학 전공자 김성철 교수는 용수가 평생 소승불교를 부수며 살았다고 하였다. 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아비담마는 엉터리라고

 

이중표 교수의 중론에 따르면 초기불교를 계승하고 있는 테라와다불교는 잘못된 것이다. 특히 논서인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중론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비담마 논장은 걸리적 거리는데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엉터리라는 표현까지 한다. 왜 엉터리라고 보았을까? 이에 대하여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 이중표교수의 불교강좌를 듣고(2016-01-0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중표 교수는 테라와다 불교의 아비담마에 대하여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다. 모두 잘못 되었고 모두 엉터리라 하였다한 가지 예를 든다면 십이연기에 대하여 삼세양중인과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 무지의 극치라 하였다. 반면 용수의 중론의 논리에 근거하여 십이연기를 공사상과 일체유심조의 논리로 본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에 따르면 오온에서 색온도 인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중표 교수는 색(Rupa)에 대하여 물질로 보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라 한다. 그래서 불교공부 하신 분들은 색 그러면 물질 그렇게 딱 등식이 돼 버려요. 이게 불교를 이해 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에요.”(중론1 37:40) 라 하였다. 그렇다면 이중표 교수가 말하는 색의 개념은 무엇일까?

 

나마루빠(nāmarūpa) 번역어에 대하여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색을 물질이라고 보는 한 불경을 천번 만번 읽어도 부처님 가르침이 이해 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는 오온에서 색을 물질이 아닌 인식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이연기에서 나마루빠’, 즉 명색에서 색도 역시 물질로 보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놀랍게도 우파니샤드철학을 예로 들어 명색을 설명하였다. 이중표 교수가 말하는 명색개념은 어떤 것일까?

 

명색은 빠알리어로 나마루빠(nāmarūpa)이다. 이는 한자식으로 풀이 한다면 이름의 뜻을 가진 나마(nāma)’와 형태를 가진 루빠(rūpa)’의 결합어이다. 그래서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라는 것이다. 이는 초기불교와 테라와다에서 정신-물질이라고 보는 것과 다르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명색이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식으로 번역하였다. 좀처럼 한자를 쓰지 않는 번역스타일을 본다면 의외이다. 그런데 더욱 더 의의의 번역어는 초불연이다. 초불연에서는 정신-물질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불연 번역을 보면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라는 정형구로 번역하였다. 이처럼 나마루빠에 대한 번역이 다르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기존 한역경전에서 사용된 한자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담마에 대하여 이라고 하고, 깜마에 대하여 이라는 한자어를 고수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나마루빠에 대하여 명색이라고 해야하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신-물질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그리고 주석서를 중시하는 초불연의 번역방침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이라 하였다. 이는 아비담마에서 라마루빠에 대하여 여기서 정신이라 과보의 마음과 연결된 마음부수들을 뜻하고, 물질이란 단어는 업에서 생겨난 물질들을 의미한다.”(아비담마길라잡이. 2 8장 조건의 길라잡이 3) 라고 정의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마에 대하여 수, , 행 등 정신작용으로 보고, 루빠에 대하여 물질로 본 것이다. 이렇게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의 관계로 보아야 삼세양중인과가 성립되고 또한 위빠사나 수행체계가 완성된다. 그래서 아비담마가 단순히 논서라기 보다 하나의 수행지침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음의 구조를 분석해 놓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브라만의 화현에 대하여

 

이중표 교수는 아비담마를 모두 부정해 버린다. 부정해야 중론의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 대하여 엉터리라 하였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왜곡하는 엉터리 이론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용수의 중론에 근거하여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십이연기에서 보여지는 나마루빠, 명색에 대한 것이다.

 

이중표 교수가 생각하는 나마루빠, 명색은 어떤 것일까? 놀랍게도 브라만교 우빠시니샤드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명인 정신이고 색은 물질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 해 버려요. 그런데 우파니샤드에 명색 개념이 어떻게 나오냐 하면, 우파니샤드 철학에 따르면 우주는 본래 하나에요. 하나의 브라만이죠. 그 브라만이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변화시켜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요. 나무,풀 등 형태가 달라지면서 이름이 붙었어요. 그러니까 이름과 형태로 구분이 되어야죠. 하나의 브라만을 형태와 이름으로 구분하니까 각각 다른 것처럼 보여요. 이렇게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아뜨만이에요. 그러나 본래는 이름과 형태를 떠나서 본래 있는 것이 브라만이에요. 이게 범아일여 사상이에요.”

 

(이중표교수, 중론1 39:13)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나마루빠는 이름 그대로 나마루빠라는 것이다. 나마가 이름이나 명칭을 뜻하는 것인데 원어 그대로 이름을 뜻한다는 것이다. 산이 있을 때 이라 이름 붙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또 루빠라 하였을 때 이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대상, 즉 형태라 하였다. 그래서 산은 산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산이라는 이미지가 떠 오른다는 것이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모든 것은 이름 붙여져 인식된 것이라 하였다. 이것이 나마루빠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마루빠라는 말이 사실 알고 보니 브라만교 우파니샤드에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중표 교수는 우파니샤드에 근거하여 설명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떠나서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다. 우리 몸과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찰 하였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 몸과 마음을 벗어났을 때 가르침에서 멀어진다. 이중표 교수가 말한대로 명색이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지 이름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명색에 대하여 무어라 말씀 하셨을까?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amañca bhikkhave nāmarūpa?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ida vuccati nāma. Cattāro ca mahābhūtā, catunna ca mahābhūtāna upādāyarūpa, ida vuccati rūpa. Iti idañca nāma, idañca rūpa, ida vuccati bhikkhave, nāmarūpa.

 

[세존]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 한다.”

 

(분별의 경, 상윳따까야 S1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나마루빠(nāmarūpa), 명색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하였다. 특히 명(nāma)에 대하여 느낌(vedanā), 지각(saññā), 의도(cetanā), 접촉(phassa), 정신활동 manasikāra)’이라 하였다. 이는 한자어로 수, , 행을 말한다. 다른 말로 마음부수 또는 심소라 한다. 여기서 의도와 접촉과 정신활동은 행온에 속한다. 이렇게 본다면 명(nāma)  수온, 상온, 행온에 해당된다. 나마에 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주석에 따르면  식온이 수, , 행 등 모든 존재의 다발에 기본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따라서 나마가 수, , 행 과 같은 정신적인 요소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마는 수온, 상온, 행온

 

각묵스님은 명색과 관련된 문구에 대하여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정신-물질인가? 느낌, 인식, 의도, 감각접촉, 마음에 잡도리함(주의) – 이를 일러 정신이라 한다. 그리고 네 가지 근본물질과 네 가지 근본물질에서 파생된 물질 이를 일러 물질이라 한다.”(S12.2) 라 하였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번역한 것이다. 특히 나마에 대하여 정신이라고 번역한 것에 주의한다.

 

나마가 정신이라고 한 것은 마음부수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주석을 인용하여 연기의 문맥에서 정신-물질의 정신은 항상 수-- 3온만을 뜻한다고 설명된다. 왜냐하면 식은 이미 12연기의 세 번째 구성요소로 독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초불연 상윳따 2 49번 각주) 라 하였다. 12연기에서 세 번째 요소가 식이고 네 번째가 명색인데, 명색에서 식이 언급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식이 세 번째에 이미 나와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나마루빠에 대하여 ‘name-and-form’이라 하였다. 나마에 대하여 이름을 뜻하는 ‘name’이라 하였다. 이는 각묵스님이 정신이라고 번역한 것과 다르다. 오히려 이중표 교수가 말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이에 대하여 어떻게 각주 하였을까?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On the translation of nāmarūpa, see the General Introduction, pp. 47-49. Vism 558,23-28 (Ppn 17:187) explains that nāma denotes the three aggregates-of feeling, perception, and volitional formations-which are called thus because of their "bending" (namana) on to an object (in the act of cognizing it). Volition, contact, and attention belong to the aggregate of volitional formations and, according to Spk, have been selected to represent that aggregate here because they are operative even in the weakest classes of consciousness.

 

(CDB 2 6번 각주, 빅쿠보디)

 

 

빅쿠보디의 설명 중에 ‘weakest classes of consciousness’라는 말이 있다. 이는 초불연 각주를 보면 알 수 있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이들 셋은 마음이 가장 미약할 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들 셋을 통해서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를 보신 것이다.” (초불연 상윳따2 49번 각주) 라 하였다. 주석을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빅쿠보디의 설명과 똑 같다. 여기서 셋 이란 말은 수온, 상온, 행온을 말한다. 그런데 셋은 마음이 가장 미약할 때도 존재한다. (they are operative even in the weakest classes of consciousness) 라 하였다. 여기서 존재라는 말은 가동한다(operative)라는 뜻이다.  식이 아주 약하고 마음부수가 강한 상태임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부수에 의해서 마음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마음부수는 아비담마에서 선한 마음과 불선한 마음을 설명할 때 설명된다. 예를 들어 탐욕이나 성냄이라는 마음부수가 강하게 작용하였을 때 탐욕의 마음이나 성냄의 마음이 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불선과보가 형성된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는 명색을 단지 이름 붙여진 것이라 하고 또 십이연기와 오온에 대하여 단지 인식된 것이라 하여 일체유심조로 보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과 유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단지 머리로만 수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김성철 교수는 해인사 학인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중론 강좌에 따르면 초기불교와 중론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초기불교에서는 대상에 대하여 감성으로 관찰함으로 기존 논리를 부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감성은 정신-물질의 작용을 말한다. 반면 중론에서는 단지 생각으로 기존 논리를 부수는 것이라 하였다.

 

중론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유의 힘으로 논리를 부수는 것이다. 개념이나 판단 등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이 대상이다. 그러나 초기불교, 특히 아비담마에서는 물질과 정신 작용을 중요시 여긴다. 이는 몸과 마음에 바탕을 둔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중론의 경우 무명을 타파 하자고 말하지만 초기불교에서는 갈애’의 소멸을 강조한다. 이는 수행적 측면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비담마 논장이 수행지침서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중표 교수는 철저하게 중론의 입장에서 공과 유식의 논리로 아비담마 논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아비담마 논장과 청정도론은 수행지침서

 

아비담마 논장과 청정도론은 일종의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중론이나 유식과 다른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제시한 지침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정도론에 이 정신, 물질에 대한 조건을 파악함으로써 삼세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여 확립된 지혜를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이라 한다.”(Vism.19.1) 라는 말이 있다. 정신-물질을 아는 지혜가 바로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처음부터 이와 같이 숙고한다. 이 정신, 물질은 원인을 갖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만약 원인을 가지지 않았다면] 모든 곳, 모든 경우,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동일한 상태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재천 등의 원일을 가진 것도 아니다. 정신, 물질의 배후에 자재천 등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자는 정신, 물질이 바로 자재천이라고 한다. 자재천 등이라 부르는 그들의 정신, 물질이 원일을 갖지 않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틀린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원인과 조건으로부터 생겼다. 그러면 무엇이 그[원인과 조건]인가?

 

(Vism.19.1)

 

 

이 문구를 보면 우파니샤드의 나마루빠 개념을 비판한 듯이 보인다. 이는 청정도론에 5세기에 편집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5세기의 붓다고사는 용수가 활약하던 3-4세기 보다 후대이다. 용수의 중론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본다. 이는 정신, 물질의 배후에 자재천 등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자재천은 존재의 근원 내지 궁극적 실재를 말하며 힌두교의 브라만을 뜻한다.

 

이중표 교수는 중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십이연기의 명색에 대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우파니샤드를 인용하여 실제로는 이름과 형태가 전혀 근거 없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브라만이 아뜨만으로 변화 되면서 갖게 된 것이에요. 그 자체로서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게 되어 있는 거에요.” (중론1 4:10) 라 하였다. 이게 우파티샤드의 지혜에요라 하였다. 십이연기 명색을 설명하는 데 우파니샤드 논리를 적용한 것이다.

 

이중표 교수의 주장은 나마루빠를 단지 브라만의 분신들이 이름붙여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붓다고사는 분명하게 청정도론에서 자재천 등이라 부르는 그들의 정신, 물질이 원일을 갖지 않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틀린 말이다].” (Vism.19.1) 라고 비판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중표 교수는 힌두교 논리로 불교를 설명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나마루빠는 정신-물질이 맞다

 

나마루빠를 브라만의 화현으로 보는 것이 과연 불교적이라 볼 수 있을까? 전재성님의 초기불교 연기사상을 보면 나마루빠와 관련하여 이 명색은 역사적으로 브라흐마나 문헌이나 우빠니샤드에 보면 절대자가 질료 속에서 자신을 전개하는 두 힘으로 나타난다.”(초기불교 연기사상, 272P) 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인용문구를 소개하였다.

 

 

저 산은 나는 참으로 살아 있는 자아를 통해서 이들 세 가지 신성(, . )속으로 들어가 명칭과 형상을 전개하리라고 생각했다.

 

(초기불교 연기사상, 272P)

 

 

이 문구는 우파니샤드 문헌(Chand.VI.3.2)에 나온다고 하였다. 놀랍게도 이중표 교수가 언급한 나마루빠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실려 있다. 이 세상의 이름 붙여진 것은 모두 브라만의 화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명칭과 형상을 전개하리라라 한 것이다. 이 문구를 근거로 하여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라 하였다. 모든 이름 붙여진 것이 나마루빠라는 것이다.

 

이중표 교수는 명색의 개념은 물질과 정신의 개념이 아니라 개념(이름)과 형태라는 개념이고 그것은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 활동은 개념과 형태라는 두 개의 개념을 가지고 나타나게 되요.” (중론1 4:10) 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일까? 명백히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비담마 논장이 잘못 되었다고 비판하고 삼세양중인과가 엉터리라 하는가 하면, 자신이 해석한 불교가 바른 것이고 또 화엄경과 같은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근본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였다.

 

전재성님의 초기불교 연기사상에 따르면 나마루빠에 대하여 우파니샤드 방식으로 해석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 이는 영원한 자아가 신성한 질료 속에 들어가 명칭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현상세계에 다양성을 구성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신이나 자아를 인정하지 않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명칭과 형상은 정형화된 연기법에서 의식(: viññāa)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연생적 사태로 규정된다.” (초기불교 연기사상, 273P)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십이연기에서 나마루빠에 대하여 단지 이름 붙여진 개념으로 보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보는 것이 옳음을 말한다.

 

아비달마화 된 대승불교 말로는

 

대승불교는 부파불교를 비판하고 성립되었다. 이는 부파불교와의 단절을 말한다.이에 대하여 대승에서는 파사현정이라 하였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되돌려 놓음을 말한다. 과연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으로 되돌아 갔을까? 중론 이후 전개 되는 역사적 사실을 보면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대승에서는 부파불교에 대하여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성문의 도라 하여 소승이라 하고 자신들은 보살도를 추구하는 대승이라 하여 구분하였다. 그러나 중론에 이어 유식 등으로 전개 되어 감에 따라 그토록 비난하였던 부파불교 보다 더 못한 소승이 되었다. 교학은 전문화 되었고 민중들로 점차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대승불교가 급속히 아비달마화된 것이다. 이렇게 민중과 유리된 불교는 설자리를 잃었다. 중관, 유식 등과 난해한 불교로 수 세기 내려오면서 완전히 대중적 기반을 상실한 것이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힌두교와 융합된 불교이다. 이를 밀교라 한다.

 

밀교는 위대한 민중불교라고

 

인도에서 불교는 망하였다. 망한 원인이 여럿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힌두교화 된 것을 빼 놓을 수 없다. 민중과 유리된 대승불교는 힌두교화 되어 힌두이즘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런 불교가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중에 비로자나불이 있다. 이 비로자나불에 대하여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김성철 교수는 중론 강좌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밀교는 위대한 민중불교입니다. 밀교가 성적인 것이라는 것은 다 오해에요. 힌두밀교는 그게 있지만 불교는 그게 다 상징이에요. 상징. 불교는 절대 비구-비구니 법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성적인 것은 전혀 없어요. 근데 오해를 해 가지고.

 

밀교 부처님은 어떻게 생겼느냐하면 남자부처님 앉아 계시고 여자부처님이 섹스하고 있어요. 껴안고서 이게 밀교의 얍윰이에요. 얍윰. 얍은 티베트 말로 아버지, 윰은 어머니에요. 이걸 부모존 이렇게 불러요. 부모존. 어머니 아버지 존상이 섹스하고 있죠. 이걸 딱 앞에 모셔 놓고 기도를 하는데, 티베트 불교 밀교를 보면 아이구, 괴상한 이상한 종교구나라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어디서 들어왔냐 하면 힌두교에서 들어온 거에요. 힌두교. 힌두교에 밀교가 퍼져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일반사람들이 그런 밀교를 더 좋아 해요. 쉽고 편하고 성에 대해서도 막 개방적이니까. 그러니까 불교에서 불교가 막 쇠퇴하니까 힌두교의 그걸 그대로 갖고 와서 우리도 이거 한다고 꼬시는 거에요. 그대신 의미를 다르게 해요.

 

얍은 아버지인데 자비의 방편의 상징이다 이렇게 하죠. 어머니는 지혜의 상징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가 되면 지혜와 방편을 다 갖춘 분이 된다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지혜만 열려도 깨달음이 아니에요. 자비와 지혜가 다 있어야지만 깨달음이다 이게 상징체계이에요.

 

그런데 이런 밀교에 부처님이 바로 대일여래고, 대일여래가 비로자나 부처님이고, 비로자나부처님이 화엄경의 그런 비로자나 부처님이에요.

 

그러니까 얍윰상이 중국에 못 들어 오죠. 그리고 뭐가 들어 옵니까? 바로 지권인 이게 들어 오죠. 사실은 이게 성행위랑 같은 표현이에요. 우리 적광전에 보면 있죠? 남자성기 여자성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남자의 상징은 방편이고 힘이 있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일을 할 수 있어요. 자비심이 있어요.

 

여자의 상징은 반야, 반야지에요. ? 여자는 애기를 낳기 때문에 창조적이에요. 반야지혜에서 분별이 나오는 거거든요. 먼저 얘기 했듯이 모든 분별이 나올 수 있는 것이 바로 반야공성이지요. 그 상징이 우리 불교계의 화엄에서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부처님으로 바뀌었고 티베트에서는 실제 섹스를 하는 모습으로다가 그냥 노골적으로 모시고 있죠.

 

(김성철 교수, 유튜브 해인사 2003중론김성철 7)

 

 

김성철 교수는 말을 매우 빠르게 한다. 보통 사람보다 이삼배 빠른 것 같다. 그러나 발음이 분명하여 녹취하는데 불편함은 없다.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밀교는 위대한 민중불교라 하였다. 이는 기존의 대승불교가 아비달마화 되었기 때문이다. 부파불교를 비판하며 성립된 대승불교가 또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는 민중과 유리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불교가 되었다. 그것은 힌두이즘화 된 불교, 밀교를 말한다. 더구나 초기불교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얍윰(Yabyum), 부모존을 모신다는 것이다. 그런 부모존은 다름 아닌 남녀교합상이다.

 

남녀교합상을 모시는 불교

 

남녀교합상 얍윰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실제 섹스를 하는 모습이라 하였다. 이런 교합상을 티베트에서는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하여 힌두교의 영향을 들고 있다. 불교가 막 쇠퇴하니까 힌두교의 그걸 그대로 갖고 온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얍윰상은 어떤 것일까?

 

얍윰에 대하여 인터넷검색하면 위키피디아에 “Yab-yum (Tibetan literally, "father-mother") is a common symbol in the Buddhist art of India, Bhutan, Nepal, and Tibet.”라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It represents the primordial union of wisdom and compassion, depicted as a male deity in sexual union with his female consort. The male figure represents compassion and skillful means, while the female partner represents insight.”라 설명되어 있다.  김성철 교수가 설명한 것과 같다. 이런 얍윰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Padmasambhava in yab-yum(위키백과)

 

 

 

부모존이라 불리는 얍윰상은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의 탱화는 티베트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그런데 얍윰상은 동아시아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노골적인 교합장면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상징으로 보여 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을 들고 있다.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

 

지권인은 무엇을 말할까? 불교용사전에 따르면 수인의 하나로 비로자나불의 인상이다.”라 하였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각각 금강권인을 지은 다음 왼손의 집게 손가락을 펴서 주먹 쥔 형태의 오른손 속에 넣고 오른손의 엄지와 왼손의 집게 손가락을 마주대는 형태이다. 이때 오른손은 불계(佛界)를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하여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일체임을 뜻하게 된다.”(지권인, 불교용어사전) 라 하였다.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좌상

 

 

 

불교용어사전에 따르면  오른손은 불계(佛界)를 왼손은 중생계를 표시라고 하였다. 이는 김성철교수가 말하는 남녀교합의 상징으로서 지권인과 다른 설명이다. 더구나 불교사전에서는 손가락 모양에 대하여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일체임을 뜻한다.’라 하였다. 이 또한 아버지의 자비와 어머니의 방편으로 설명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대체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지권인은 인도에서의 남녀교합상이 상징화 된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한국불교 법당에서 볼 수 있는 비로자나부처님의 모습은 남녀교합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대승불교가 힌두교화 된 전형적인 예를 보여 준 것이다. 이런 불교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알면 알수록 쇼킹한 대승불교

 

이중표 교수의 중론강좌를 유튜브로 보았다. 처음부터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았기 때문에 비판하기 위하여 이 글을 썼다. 그것은 이중표 교수가 빠알리삼장 중의 하나인 아비담마에 대하여 깡그리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은 이야기를 잘 해 놓으셨어. 근데 말씀이 참 어려우니까 누가 해석을 해 주어야 했어. 해석을 한다는 사람들이 제대로 해석을 해야 하는데 엉터리로 해석을 해 놓았어. 그 엉터리 해석을 지금까지 부처님 말씀을 진실한 해석이라 믿고 공부 했던 것이 불교의 오랜 역사가 되 버린 거에요.” (중론13, 1:40:00)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등 주석서는 엉터리이다. 그래서 자신이 바르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그 역사를 뒤집어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야만 불교가 제대로 이해 되는 것이죠” (중론13, 1:42:00) 라 하였다. 그런 이유로 근본불교를 연구하는 학자이지만 중론을 강연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마치 용수가 중론으로서 부파불교를 파사현정하듯이, 테라와다불교를 파사현정하겠다는 결의로 보여진다. 그런 대승불교는 오늘날 어떻게 되었는가?  이는 범일스님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기원전 2세기쯤 되서 대승불교가 시작이 된다고 기록이 나와 있을 거에요. 대승불교는 누가 주체가 됐다? 책에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비구들이 했습니까? 비구니들이 했습니까? 책들이 대승불교는 다 주장하는 것이 재가자들이 불교운동을 일으켰다고 되 있어요. 그죠? 기억나세요?

 

스님들이 대승운동을 일으킨 것 아닙니다. 그러면 재가들 중에서 그런 종교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B.C 2세기 쯤에 누구에요? 누가 그런 운동을 일으킬 수 있어요? 그 사회에서. 왕족? 왕족은 힘 없어. 누구에요? 브라만이에요.

 

브라만들이 불교운동을 일으킨게 대승불교에요. 그리고 그 이전에 있는 스님들을 소승이라고 폄하한 거에요. 그리고 우리는 대승불교가 잘낫다고 좋다고 자랑삼아서 우리가 대승불교라고 이야기해요. 브라만의 후손입니다. 안그래요?

 

그 시대에 그 왕조에 그 문화에 그 역사에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이 네 계급중에서 브라만 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비구들, 비구니들이 한 것 아니에요. 무엇을 중심으로? 불탑을 중심으로. 불탑이 몇 개에요? 열 개. 그리고 종교시설물은 브라만계급들이 소유하게 되어 있어요.

 

브라만들이 불교를 탄압하고 왜곡시키고 수용하고 변질시켜 가는 과정에 대해서 힌두교화 하는 것이 대승불교에요. 브라만들이 불교를 변형시켜서 이름을 대승이라 붙였어요. 대승불교권에서 그렇게 나와서 대승불교의 중관학파, 유식학파 나오고, 밀교나오고 끝나요.

 

(범일스님, 니까야 제10 육사외도 2)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불교상식을 깨뜨리는 말이다. 바라문들 밖에 대승불교운동할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출가한 비구나 비구니가 대승불교운동을 일으켰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식자층이자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들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시바신을 찬양 한 것이라는 말 만큼이나 충격적이다. 이에 대하여 시바신(神) 성관자재(聖觀自在), 인도신화로 신묘장구대다라니(천수다라니)(2010-09-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런데 김성철 교수의 중론 강연을 들으면서 또 하나 쇼크를 받았다. 그것은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이 밀교의 남녀교합상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알면 알수록 대승불교는 쇼킹하다. 정말 러시아 불교학자 체르바츠키 말대로   “마하야나(Mahayana)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라는 말이 실감난다.

 

 

2016-01-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