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그날 밤 무엇을 깨달았을까? 부처님 성도절을 맞이 하여
성도절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날이다. 불교인들에게는 매우 뜻 깊은 날로서 부처님이 탄생한 날과 함께 명절에 속한다. 그래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절에서는 철야정진을 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이날은 뜻 깊은 날이다. 이날 태어났기 때문이다. 음력으로 12월 초파일이 생일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날 부처님이 깨달은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큰 의미는 부여 하지 않는다. 우연의 일치 일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테라와다불교에서 성도절과 다르기 때문이다.
테라와다에서의 성도절은 음력 사월 보름이다. 웨삭데이라 하여 부처님이 태어난 날이자 동시에 성도한 날이고 또 열반에 든 날이다. 이렇게 세 가지 사건이 겹치는 날이 음력 사월 만월일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사월 보름날에 세 가지 행사가 동시에 치루어진다.
동아시아에서는 부처님의 탄생일과 성도일, 열반일이 모두 다르다. 탄생절은 사월 초파일이고, 성도절은 12월 초파일, 열반절은 2월 15일이다. 여기에 출가절이라 하여 하나 더 추가 되는데 2월 초파일이다. 그래서 불교에는 탄생, 출가, 성도, 열반이라 하여 이날을 기념하는 사대명절이 있다.
끊임 없는 깨달음 논쟁
성도절을 맞아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끊임 없는 논쟁이다. 최근 현응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발표에 따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각 불교전통이 다른 것에서 기인한다. 주로 초기경전, 그것도 율장을 근거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현응스님의 주장에 대하여 선종의 종지를 내세워 이를 반박하는 형태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이렇게 깨달음에 대한 논쟁이 끊임 없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에 대한 정의가 확실하게 정립 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깨달음과 신비주의 관계는?
깨달음과 관련하여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재가단체 정의평화불교연대(정평불)에서 주최한 이 세미나에서 성해영교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는 성해영 교수는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불교적 깨달음과 신비주의가 어떤 관계인지 물은 것이다. 수 많은 의문 중에 불교와 관련된 것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비주의라는 공통개념에도 불구하고,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이 최종족으로 지향하는 긍극적 체험은 상이한 것일까 아니면 동일할까?
-불교의 깨달음 체험을 신비적 합일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약 부를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의 깨달음 체험이 다른 신비주의 전통이 지향하는 체험과 그 유형이 다르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교리와 수행법의 차이 때문인가? 만약 불교의 깨달음 체험이 더 수승한 경지라고 주장한다면 그 이유는 역시 더 나은 교리와 수행 체계 때문인가?
-불교가 제도화된 종교로 성립되기 이전에도 불교적 깨달음 체험이 있었을까?
-불교적 교리를 수용하거나, 불교적 수행법을 선택하지 않는 타 종교인들도 ‘불교적’ 깨달음 체험을 가질 수 있을까? 만약 있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또 불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라는 큰 테두리에 속해 있다고 여겨지는 여러 전통들은 동일한 깨달음 체험을 지향하고 있을까? 체험은 동일하나 설명의 방식이 다를까? 탄트라 불교와 선불교는 동일한 깨달음을 지향하는가?
(성해영교수, 신비주의 비교연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불기2560년 성도절 기념 학술세미나, 2015-1-15 화쟁문화아카데미 강의실)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는 서울대 성해영 교수가 불교인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이외에도 ‘신비주의와 윤리의 문제’도 있다. 이는 “신비적 합일 체험자가 윤리적으로 완성된 존재로 만드는가? 윤리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수행자에게도 신비적 합일 체험이 발생되는가?”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성해영교수에 따르면 신비적 합일에 대하여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체험으로 보았다. 의식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통해 체험을 의도적으로 추구하고, 체험을 통해 얻어진 통찰에 기초해 궁극적 실재와 우주, 그리고 인간의 통합적 관계를 설명하는 사상으로 구성된 종교전통을 신비주의로 본 것이다.
궁극적 실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종교다원주의를 연구하는 신학자 길희성 교수의 글에 따르면 “종교전통들은 모두 잡다한 현상세계의 배후나 근저, 혹은 그 너머로 ‘하나’의 통일적이고 궁극적인 실재를 상정하고 있다.”라고 가정하였다. 근본이 있다는 것이다.
이도흠교수의 제3의 길
성해영교수의 궁극적 실재론은 이날 세미나에서 이도흠교수가 자신의 논문에서 궁극적 진리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이도흠 교수는 논문에서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필자는 궁극적 진리가 있으며 이는 돈오에 의해서만 도달 할 수 있지만,..”(깨달음에 대한 쟁점 및 맥락적 지향성)이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도흠 교수가 말하는 궁극적 진리는 결국 대승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논문에서 불교의 깨달음과 관련하여 ‘알라야식의 청정’과 ‘알라야식의 통제’에 대하여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넘어 ‘제3의 길’을 가자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이도흠교수가 말하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이도흠 교수에 따르면 기존의 깨달음에 대하여 두 가지 ‘불법(佛法)’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는 아난의 기억에 의해 구성된 불법이고 또 하나는 공안에 바탕을 둔 불법이다. 후자에 대하여 특히 ‘달마의 혁명’이라 하였다.
아난의 기억에 의하여 구성된 불법에 대하여 ‘사띠(sati)’라 하여 소승과 대승에 적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 하나의 달마의 혁명에 의한 불법은 선정에 의지하여 돈오와 점수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도흠 교수는 이 두 가지 불법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제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참된 깨달음이란 이 세계의 연기와 공성에 대해 전적으로 이해한 바탕에서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자유, 노동과 창조를 통하여 진정한 자기실현을 하거나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해탈시키는 적극적 자유, 타자를 해탈시켜 내가 해탈이 되는 대자적 자유를 모두 쟁취하고 종합하는 것이자 타자를 깨닫게 하여 내가 깨닫는 것이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정체성은?
이도흠 교수의 제3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대승의 정체성이 드러나 보인다. 이는 대승불교가 끊임 없이 변화하며 진화해 가는 것을 말한다. 테라와다불교는 전통을 지켜 나가는 것이 정체성이지만 대승불교는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정체성이라는 말이다.
대승불교는 부파불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되었다. 처음에는 보살사상을 내 세웠다. 이후 중관-유식-여래장-밀교 등으로 끊임 없이 변화 해 갔다. 중국으로 건너 가서는 중국식 불교라고 볼 수 있는 ‘선불교’로 정착되었다. 그런데 이도흠 교수에 따르면 선종이 출현한 이래 천여년간 새로운 불교가 나타나지 않았음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제3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대승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정체성은 끊임 없이 변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불교학자는 21세기에 맞는 대승경전을 만들자고 한다. 실제로 도법스님은 ‘생명평화경’이라는 독자적인 경전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세미나에서 “테라와다 불교는 전통을 고수해야 하고, 대승불교는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한국테라와다불교는 함께 살며 탁발 해야(2013-11-28)) 라 하였다.
궁극적 실재(Reality)가 있다고 하는데
비교종교학자 성해영 교수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대승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적용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종교다원주의를 연구하는 길희성교수의 글을 보면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비록 이 실재가 다양한 이름(道, 梵 Brahman, 太極, 하느님, 空 혹은 法身)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동일한 실재를 달리 부르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그 반대의 가설, 즉 각기 다른 실재를 가리키고 있다는 가설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불교의 공사상이 형이상학적 일원론의 범주에 속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공이 일단 일체의 차별성과 분별을 넘어선 실재를 지칭하는 개념임은 확실하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길희성교수, 휴심정 2012-05-04) 라 하였다.
길희성교수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는 ‘존재의 근원’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모든 종교에서 궁극적 실재는 ‘같은 것’이라 하였다. 다만 하느님, 공, 알라, 브라흐마 등으로 이름만 달리 부르고 있을 뿐이라 하였다. 근본에서는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은 기독교에는 ‘신성’이 있고 불교에는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마치 이런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길희성 교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궁극적 실재가 하나이고 하느님도 한 분이고 인류도 하나라면, 인류가 추구하는 구원/해방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일 것이라는 가설은 거의 자명한 일처럼 보인다. 비록 등산 중에 바라보는 산정의 모습들이 아직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해서 다를 수밖에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실재를 지향하고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말에 따르면 ‘정산론’을 이야기한다. 등산 할 때 올라가는 길은 여럿 있지만 올라 가다 보면 결국 정상에서 만나듯이 모든 종교전통에서 있어서 근본은 같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존재의 근원이라 일컬어지는 ‘궁극적 실재(Reality)’가 있다고 하였다.
궁극적 실재에서 제외된 열반
종교다원주의자와 비교종교연구가는 궁극적 실재론을 거론한다. 모든 종교는 근본에 있어서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자 길희성 교수가 하나 예외로 본 것이 있다. 그것은 ‘열반’이다.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강조하는 열반 만큼은 ‘궁극적 실재(Reality)’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열반은 모든 것이 있게 하는 존재의 근원도 아니고 더구나 궁극적 실재도 아니다. 열반은 무아사상과 함께 부처님 가르침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다. 그렇다고 대승에서 말하는 열반개념인 상락아정도 아니다. 이와 같은 열반에 대하여 길희성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존재라는 개념이 신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면, 우리는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이 대답을 거부한 14무기(無記)의 문제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문제, 즉 번뇌를 말끔히 제거한 여래가 사후에 열반에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관점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이 직접적인 대답을 거부하거나 피한 것은 아무래도 열반(Nirvana)이라는 초월적 경지에 대해서 ‘존재’나 ‘비존재’ 같은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음을 의식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신(神)은 어디에 숨어있나?) 라 하였다. 이것이 궁극적 실재에서 열반을 배제한 이유라 본다.
궁극적 실재의 범주는?
길희성 교수는 궁극적 실재의 범주에 열반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여하튼 우리는 동서고금을 통해 사용된 여러 가지 신의 암호들을 알고 있다. 도(道), 천(天), 태극, 공(空),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무(無),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같은 개념들이다.” (신(神)은 어디에 숨어있나?) 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열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궁극적 실재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 궁극적실재는 소소영영한 한 물건을 연상케 한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여기 한 물건(一物)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이기에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습니다.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此一物之所以不曾生 不曾滅 名不得狀不得也)”라는 게송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엇이든지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면목, 불성, 참나 뿐만 아니라 ‘도(道), 천(天), 태극, 공(空),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무(無),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그리고 ‘비로자나, 야훼, 알라 뿐만 아니라 등으로 표현 하였는데 더 추가한다면 본래면목, 불성, 참나, 비로자나, 야훼, 알라’ 등으로 이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궁극적 실재의 범주에 열반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깨달음일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깨달음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깨달음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 최종적으로 아라한이 되었을 때 깨달음이 완성된 것으로 본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무학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열반으로 본다. 그런 열반은 모든 번뇌의 소멸로 성취된다.
잠재 되어 있는 성향까지 남김 없이 제거 되었을 때 더 이상 새로운 태어남이 없다. 불사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 삶 그 자체를 행복이라 한다. 행복, 행복이라 말하지만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행복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진정한 행복은 번뇌가 모두 소멸 되었을 때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열반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Atthi bhikkhave tad-āyatanaṃ,
yattha neva paṭhavī,
na āpo, na tejo, na vāyo,
na ākāsānañcāyatanaṃ,
na viññānañcāyatanaṃ,
na ākiñcaññāyatanaṃ,
na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nāyaṃ loko, na paraloko,
na ubho candimasuriyā.
Tatrāpāhaṃ bhikkhave neva āgatiṃ vadāmi,
na gatiṃ, na ṭhitiṃ,
na cutiṃ, na upapattiṃ.
Appatiṭṭhaṃ appavattaṃ
anārammaṇam-evetaṃ,
esevanto dukkhassā”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는데,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바람도 없고,
무한공간의 세계도 없고, 무한의식의 세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세계도 없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태양도 없고 달도 없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의처(依處)를 여의고,
전생(轉生)을 여의고, 대상(對象)을 여읜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80)
(Paṭhamanibbānasuttaṃ-열반의 경1, 우다나 Ud80, 전재성님역)
ENLIGHTENMENT
부처님이 감흥어로 읊은 열반의 세계는 부정적 언표로 되어 있다. 이는 긍정적 언표보다 포괄적이다. 문구에 “죽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다.(na cutiṃ, na upapattiṃ)”라 하였다. 한자로 표현한다면 ‘불생불사(不生不死)’이다. 이를 줄여서 불사(不死: atama)라고도 한다. 열반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라는 말로 잘 표현 되어 있다. 괴로움이 끝나는 것이 열반인 것이다. 그리고 윤회가 끝나는 것이 열반이다. 이와 같은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열반을 성취는 깨달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이는 초기경전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현응스님은 “한마디로 부처님이 각자라 할 때 그 깨달음은 연기관의 이해를 확립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서 해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선종에서 말하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부정한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깨달았다. 이는 율장과 경장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특히 율장 대품(Mahavagga)를 보면 초야, 중야, 후야로 나누어서 부처님이 어떤 깨달음을 이루었는지 설명되어 있다. 공통적으로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였다.”로 시작 되는데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는 연기의 순관과 “그러나 무명아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라는 연기의 역관으로 설명 되어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삼명’으로도 설명된다. 맛지마니까야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에 따르면 초야에 ‘숙명통’으로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를 얻어 윤회하는 뭇삶을 보게 되었고, 중야에 ‘천안통’으로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지혜를 얻어 업과 과보를 보게 되었고, 후야에 ‘누진통’으로 번뇌를 소멸하여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성취하여 깨달음을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결국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과 윤회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경지, 즉 열반을 실현한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 열반은 연기법에 따라 성취된다. 그외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으로 본다면 깨달음에 머물러 있을 뿐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조건 발생을 통찰해야만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인연과를 떠난 그 어떤 방법으로도 열반은 성취되지 않는다. 그런데 선종에서 마음을 깨닫는다고 하였을 때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애매 모호 하고 쉽게 알 수 없다. 만일 그 마음이 종교다원주의자나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Reality)’라 한다면 열반과 거리는 더욱 더 멀어진다.
궁극적 실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자나 신비주의자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 라 하였다. 이는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다. 연기법적으로 관찰하였을 때 현상들은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소멸한다. 그렇다고 하여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발생의 순관에 따르면 현상은 무명과 갈애 때문에 끊임 없이 생겨난다. 이런 사실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로 통찰하면 현세의 존재에게 내세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견해(단멸론)은 사라지고 만다. 죽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은 거짓이 되고 만다. 죽음 이후에도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발생의 역관에 따르면 형성되어진 존재들은 끊임 없이 무상하게 소멸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는 사라진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재는 있을 수 없다. 또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는 상견도 있을 수 없다, 조건에 따라 법이 소멸되는 것을 관찰하면 모두 거짓이 된다. 이렇게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사견을 논파하였다.
불교인이라면 연기법으로 사유해야 한다. 만일 연기법으로 사유하지 않고, 연기법 바깥에서 무언가를 찾는다면 ‘사견’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바른 견해, 즉 정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그런 정견은 팔정도로 실천된다.
팔정도는 사성제와 맞물려 있으므로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다. 또 사성제는 연기법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결국 정견은 연기법을 아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S12.15) 라 하였다. 그런데 이후 전개 되는 것을 보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정견이 바로 연기법인 것이다.
깨달은 밤부터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에 대한 칭호가 많이 있다. 여래십호라 하여 여러 가지 별칭이 있지만 그 중에 정등각자가 있다. 왜 정등각자라 하였을까?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paccaññāsiṃ)” (S56.11)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후대 불교인들은 이에 대하여 의문하며 깨달은 진화 해 가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공사상이 나오고 이어서 유식, 여래장, 선불교 등으로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21세기에 맞는 깨달음 개념을 만들자고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완전한 것이다. 더하고 뺄 것도 없다. 부처님이 그 날 밤 선언한 대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nuttara sammāsambodhi : 무상정등각)’인 것이다. 그래서 이띠붓다까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Yañ-ca bhikkhave rattiṃ Tathāgato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jjhati, yañ-ca rattiṃ anupādisesāya nibbānadhātuyā parinibbāyati, yaṃ etasmiṃ antare bhāsati lapati niddisati, sabbaṃ taṃ tatheva hoti no aññathā tasmā Tathāgato ti vuccati.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
(Lokāvabodhasutta-세계에 대한 이해의 경, 이띠붓따까 It1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부처님은 처음 깨달음을 이룬 밤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 변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최초로 깨달음을 증득한 후 젊었을 때 설한 것이 다르고 노년이 되어 설한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설법내용이 다르다면 첫날 밤 깨달은 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될 수 없다. 만일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면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의 성격상 이를 허용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유에 사유를 하고 검증에 검증을 거쳐 선포하였다. 이런 과정이 초전법륜경에서 ‘삼전십이행상’으로 나타난다.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 그리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래서 깨달은 밤부터 열반에 든 45년 동안 한결 같이 진리를 펼치셨다. 그래서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It121) 라 하였다. 이는 구분교(九分敎 )로 나타난다.
가르침을 이해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즉 경이나 게송 등 구분교, 아홉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의미상으로 형식상으로 비난의 여지가 없고,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이 없다. 또한 일체의 형태를 갖추고, 탐욕의 광기, 성냄의 광기, 어리석음의 광기를 쳐 부수고, 터끝만큼도 잘못도 없다. 그래서 설해진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고,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아니고 등산을 하기 위한 지도가 아니다. 구분교, 즉 경 , 응송 , 수기 , 게송 , 감흥어 , 여시어 , 전생담 , 미증유법 , 교리문답은 손가락도 되지만 달 그자체이고, 또 산에 올라가는 지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산에 올라가는 행위이기도 하다. 초기경전을 접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은 교학이면서도 동시에 수행인 것이다.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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