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으로 피곤을 모르는 현자들
세 가지 불꽃이 있는데
삶은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다. 연료가 공급이 되어 불꽃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한 생명은 유지된다. 이런 불꽃에 대하여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Tayome bhikkhave aggī. Katame tayo? Rāgaggi dosaggi mohaggi. Ime kho bhikkhave tayo aggī”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 불꽃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탐욕의 불꽃, 성냄의 불꽃, 어리석음의 불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불꽃이 있다.”
(Aggisutta-불꽃의 경, 이띠붓다까 It92, 전재성님역)
‘세 가지 불꽃(Tayo aggi)’은 반복적으로 타오르기 때문에 불꽃이라 하였다. ‘탐욕의 불꽃(Rāgaggi)’이 있다. 주석에 따르면 “탐욕은 일어나서 반복적으로 뭇삶을 불태우고 연소시키기 때문에 탐욕의 불꽃”(ItA.II.117) 이라 하였다. 불꽃이 연료에 의존해서 일어나 그것을 소모하여 큰 열기를 내듯, 탐욕은 스스로 일어나 자신의 지속성 속에서 연소되어 소멸시키기 힘든 큰 열뇌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성냄의 불꽃(dosaggi)’과 ‘어리석음의 불꽃(mohaggi)’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
부처님은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붙타고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일체는 십이처를 말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감각 대상과 접촉 하였을 때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시각을 예로 든다면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어떻게 불타고 있을까? 부처님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부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붙타고 있다.”(S35.28) 라고 하였다.
공개토론장에서
이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은 접촉에 따른 것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이 발생되고, 느낌을 조건으로 하여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집착이 생겨 났을 때 세상은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이 불타고 있는 직접적인 조건은 ‘집착’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laṃ hi te vaccha, kaṅkhituṃ alaṃ vicikicchitu, kaṅkhanīye ca pana te ṭhāne vicikicchā uppannā. Sa upādānassa kho' haṃ vaccha uppattiṃ paññāpemi, no anupādānassa; seyyathāpi vaccha, aghi saupādāno jalati, no anupādāno: evameva kho'haṃ vaccha saupādānassa uppattiṃ paññāpemi, no anupādānassāti.
[세존]
밧차여, 그대의 의혹은 당연하고, 그대의 의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대가 의혹을 갖는 경우에 의심이 생겨납니다. 나는 다시태어남이란 연료가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며, 집착이라는 연료가 없는 사람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설합니다. 밧차여, 마치 불이 연료가 있어 타오르고, 연료 없이 타오르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밧차여, 나는 다시 태어남이란 집착이라는 연료가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며, 집착이라는 연료가 없는 사람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설합니다.
(Kutuhalasālāsutta -집회장의 경, 상윳따니까야 S44.9, 전재성님역)
여기서 ‘의혹’이라는 말은 육사외도의 가르침에 대한 의혹을 말한다. 밧차가 공개토론장에서 육사외도의 이야기를 듣고 의혹이 생긴 것이다. 이는 뿌라나 깟사빠, 막칼리 고살라, 니간타 나타뿟따, 산지야 벨라뿟따, 빠꾸다 깟짜야나, 아지따 께사깜발린 등 육사외도의 스승들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제자가 죽은 경우 다시 태어남에 대하여 “그는 이러이러한 곳에서 출생했다.”라고 선언한 것에 대한 의문이다. 그런데 부처님만은 이러이러한 곳에서 출생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는 갈애를 끊었고, 결박을 풀었고, 아만을 완전히 부수고 괴로움을 끝냈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런 차이로 인해 밧차는 육사외도의 스승들에 대하여 의혹을 품은 것이다.
부처님은 바차에게 다시 태어남에 대하여 설명해 준다. 다시 태어남은 다름 아닌 집착이라 하였다. 집착을 연료로 하여 다시 태어남이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외도의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궁극의 경지에 태어났다는 외도 제자들은 궁극의 경지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집착을 연료로 하여 다시 태어난 것이다. 삼계를 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우빠다나(upādāna)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시태어남이란 연료’라 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우빠다나(upādāna)’를 말한다. 우빠다나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집착’이고 또 하나는 ‘연료’의 의미가 있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우빠다나(upādāna)는 ‘grasping; attachment; fuel’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는 것은 집착이다. 그런데 생명의 불꽃은 연료가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연료가 바로 집착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는 “다시 태어남이란 집착이라는 연료가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며(saupādānassa uppattiṃ paññāpemi)”라 한 것이다.
전재성님은 우빠다나에 대하여 ‘집착이라는 연료’라 하여 주석적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우빠다나에 대하여 ‘취착’이라 번역하였다. 그래서 “그와 같이 취착이 있는 자에게 다시 태어남은 있지만 취착하지 않는 자는 그렇지 않다고 나는 천명한다.” (S44.9) 라고 하였다.
집착과 갈애의 땔감으로
집착은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 이는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였을 때 오취온이라 하여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우빠다나는 연료의 뜻이 있다. 연료의 뜻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밧차]
“존자 고따마여, 그런데 불티가 바람에 날리면서 멀리 가고 있을 때, 그 때 그 연료에 대해서는 존자 고따마께서는 어떻게 설하겠습니까?”
[세존]
“밧차여, 불티가 바람에 날리면서 멀리 가고 있을 때, 그 때 바람이 그 연료라고 나는 설합니다.”
(Kutuhalasālāsutta -집회장의 경, 상윳따니까야 S44.9, 전재성님역)
불꽃이 계속 타오르고 있다. 그런데 불꽃이 바람에 날려 다른 곳에 불이 옮겨 붙을 수 있다. 여기서 ‘바람에 날리어 멀리 간다’는 것은 주석에 따르면 범천계의 광음천까지 간다고 하였다. 이렇게 불티가 멀리 가고 있을 때 불티를 날려 보내는 ‘그 바람이 그 연료(vātupādānaṃ)’라 하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갈애가 등장한다. 밧차가 “뭇삶들이 이 몸을 버리고 다른 몸을 아직 받지 않았다면, 그 때 그 연료에 대해서는 존자 고따마는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그때 갈애에 의해 태워지고 있다고 나는 설합니다. 밧차여, 갈애야말로 그 연료입니다.”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하게 하는 동력은 집착과 갈애 두 가지 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집착은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것이다. 그래서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업으로서 존재를 만들어 내고야 만다. 그래서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바람의 연료(vātupādānaṃ)’와 ‘갈애의 연료(taṇhūpādāna)’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는 현자들
빠알리어 우빠다나는 집착(attachment)과 연료(fuel)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존재를 유지하게 하는 땔감과 같은 것이다. 마치 땔감을 연료로 하여 불이 훨훨 타오르듯이, 존재들은 집착에 의해서 존재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연료가 더 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불꽃은 꺼지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존재에 집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존재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라따나 경에서는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Sn2.1) 라 하였다.
연료가 다하여 불꽃이 꺼지듯이, 존재에 집착하지 않는 현자들은 열반에 들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정진해야 할 것이다. 존재를 지속케 하는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에 불난 것처럼’ 수행하라고 하였다. 이띠붓따까 불꽃의 경에서는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는 현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세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물들어
혼미해진 자들은 탐욕의 불꽃이 태운다.
살생의 악의를 품은 자들은
성냄의 불꽃이 태워버린다.
미혹한 자, 고귀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어리석음의 불꽃이 태워버린다.
자신의 몸에 환희하는 자들은
이러한 불꽃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들은 지옥, 축생,
아수라, 아귀의 경계를 증대시킨다.
악마의 속박에서
그들은 벗어나지 못한다.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가르침에 밤낮 전념하는 자들은
언제나 부정관을 닦으며
탐욕의 불꽃을 끈다.
최상의 님들은 자애관으로
분노의 불꽃을 끄고
꿰뚫음으로 이끄는 지혜로써
어리석음의 불꽃을 끈다.
그것들을 소멸시켜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는 현자들은
남김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어
남김없이 괴로움을 뛰어 넘는다.”
(Aggisutta-불꽃의 경, 이띠붓다까 It92, 전재성님역)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꽃은 꺼져야 한다. 불꽃은 스스로 만든 땔감을 연료로 하여 지속적으로 타 오른다. 갈애라는 땔감, 집착이라는 땔감으로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불꽃은 옮겨 붙는다. 그런데 불꽃은 탐욕의 불꽃, 성냄의 불꽃, 어리석음의 불꽃은 절망의 불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남-늙음-죽음-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붙타고 있다.”(S35.28) 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기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존재를 지속케 하는 땔감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불꽃을 소멸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가르침에 전념한다고 하였다. 현자들은 잠시도 방일하지 않는다.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는 현자들이다.
2016-01-13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처님은 그날 밤 무엇을 깨달았을까? 부처님 성도절을 맞이 하여 (0) | 2016.01.17 |
---|---|
현장스님이 인왕반야경을 설할 때 (0) | 2016.01.16 |
이미 죽은 자와 죽지 않는 자 (0) | 2016.01.12 |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0) | 2016.01.11 |
열반은 죽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0) | 2016.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