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죽은 자와 죽지 않는 자
겁쟁이면서 거짓말쟁이
서부영화 중에 ‘황야의 7인’이 있다. 1960년에 제작된 영화로서 일본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패러디한 것이라 한다. EBS에서 종종 보여 주는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욕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상스런 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막내라고 볼 수 있는 애송이 총잡이가 선배에게 결투를 신청하면서 “너는 겁쟁이야. 그리고 거짓말쟁이야.”라며 자극하였다. 겁쟁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치욕적인데 더구나 거짓말쟁이라 하였다. 그래서 겁쟁이면서 거짓말쟁이라 하면 가장 심한 욕이 된다.
어리석으면서 게으른 자
서부영화에서 거짓말쟁이에다 겁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가장 치욕적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도 치욕적인 말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와 ‘게으른 자’이다. 어리석은 자이면서 게으른 자라면 최악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가 어리석은 자가 또 어떤 자가 게으른 자일까?
부처님의 가장 심한 욕, 모가뿌리사(moghapurisa)
먼저 어리석은 자에 대한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경(M38)’이 있다. 경에 따르면 어부의 아들 사띠라는 수행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 하고 있었다. 그에게 “이 의식이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M38) 라는 견해가 생겨 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공공연하게 퍼뜨리고 돌아 다녔던 모양이다. 수행승들을 통하여 부처님 귀에도 들어갔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ssa nu kho nāma tvaṃ moghapurisa mayā evaṃ dhammaṃ desitaṃ ājānāsi? Nanu mayā moghapurisa anekapariyāyena paṭiccasamuppannaṃ viññāṇaṃ vuttaṃ aññatra paccayā natthi viññāṇassa sambhavoti.
Atha ca pana tvaṃ moghapurisa attanā duggahītena amhe ceva abbhācikkhasi, attānañca khaṇasi1, khahuñca apuññaṃ pasavasi. Taṃ hi te moghapurisa bhavissati dīgharattaṃ ahitāya dukkhāyāti.
[세존]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해석하여 나를 잘못 대변하고, 스스로를 해치고 많은 해악을 쌓는다.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
(Mahātaṇhāsaṅ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라 하였다. 이 말은 ‘모가뿌리사(moghapurisa)’를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a stupid or useless person’라 설명되어 있다. ‘아둔한 사람’ 또는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모가(mogha)’는 ‘empty; vain; useless’의 뜻이고, 뿌리사(purisa)는 ‘a male; a man’의 뜻이다. 그래서 ‘모가뿌리사(moghapurisa)’는 ‘텅빈 머리를 가진자’, ‘쓸모 없는 자’라는 뜻이다. 초불연에서는 “쓸모없는 자여”라고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MDB에서 “Misguided man”이라 하였다. ‘잘못인도된 사람’, ‘엉뚱한 사람’이라는 사람이다.
조건발생에 따른 식이 윤회함(paṭiccasamuppannaṃ viññāṇaṃ vuttaṃ)
사띠빅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 하였다. 부처님이 식이 윤회한다고 말씀 한적이 없음에도 마음(식)이 윤회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라며 조건발생에 따른 식이 윤회함을 말씀 하신 것이다. 핵심어는 ‘조건발생에 따른 식이 윤회함(paṭiccasamuppannaṃ viññāṇaṃ vuttaṃ)’이다.
이렇게 누차 말하였음에도 이를 귀담아 듣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사띠빅쿠에게 ‘모가뿌리사’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이다. 머리가 텅 빈 자, 모자란 자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이 어리석은 자여” 라든가 초불연의 “쓸모없는 자여”라는 말은 비교적 점잖은 표현이다. 제대로 표현한다면 “이 돌대가리야” 정도가 되지 않을까?
왜 잘못된 견해가 생겨났을까?
사띠빅쿠에게 왜 잘못된 견해가 생겨났을까? 이는 경에서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 저기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느끼고 체험하는 자아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몸을 자아로 보고, 느낌을 자아로 보고, 지각을 자아로 보고, 형성을 자아로 보고 정신을 자아로 보는 것과 같다. 즉, 오온을 자아로 본 것이다. 이는 ‘사견’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아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20가지로 정리된다.
1)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2)
그는 느낌을 자아로 여기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3)
그는 지각을 자아로 여기고,
지각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4)
그는 형성을 자아로 여기고,
형성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5)
그는 의식을 자아로 여기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보름날 밤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09, 전재성님역)
우리가 몸을 보았을 때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라 하였다. 이는 느낌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내가 즐겁다”라고 느꼈을 때 느낌을 ‘나의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각이나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4개조로 하여 모두 5종류 20가지 ‘자아’가 생겨나게 된다. 이를 ‘20가지 사견’이라 한다. 사띠빅쿠는 마음을 자아라 여겨 윤회한다는 ‘사견’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라 하였다.
어리석은 자와 사견에 떨어진 자
어리석은 자는 사견에 빠진 자와 동의어이다. 이는 십악행에서 열 번째 항이 “잘못된 견해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입니다.”(M9)라 하였다. 이는 천수경에 나오는 십악참회 내용과 다르다.
십악참회를 보면 열번째 항은 ‘치암중죄금일참회’이다. 어리석은 행위를 한 커다란 죄를 참회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어리석음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명백히 나타난다. 십악행에서 열번째 항목은 사견에 대한 것이다. 잘못된 견해가 사견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견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할까? 이는 “수행승들이여, 잘못된 견해란 어떠한 것인가? ‘보시에는 공덕이 없다. 제사의 공덕도 없다. 공양의 공덕도 없다. 선악의 과보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M117)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경에서는 육사외도 중에서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적 허무주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육사외도의 사상과 브라만 사상 전부 합하여 ‘외도’라 하며, 외도의 견해를 ‘사견’이라 한다.
사띠빅쿠는 마음이 윤회한다는 사견에 빠졌다고 하였다. 이는 브라만의 영원주의에 해당된다. 영원주의는 “자아와 세계는 영원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산봉우리처럼 확립되어 있고, 기둥처럼 고정 되어 있어, 뭇삶들은 유전하고 윤회하며 죽어서 태어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 (D1)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고 보는 것이 영원주의이다. 마음을 자아로 보아 자아가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는 사견에 빠진 것이다.
부처님은 십악행 열번째 항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입니다.”(M9)라 하였다. 천수경에서는 ‘치암중죄금일참회’라 하여 어리석은 행위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 “이 어리석은 자여”라 하였을 때 어리석은 행위는 다름 아닌 사견에 떨어진 자를 말한 것이다.
사견은 연기법으로 부수어진다
사견에는 앞서 언급된 20가지 외에 62가지가 있다. 20가지 사견에 대해서는 20가지 ‘유신견’이라고 한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62가지 견해는 육사외도와 브라만교에 대한 것이다. 이는 크게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이런 사견은 모두 ‘연기법’으로 부수어진다.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남을 보고서 허무주의가 논파 되고, 조건에 따라 법이 소멸되는 것을 보고서 영원주의가 논파 된다.
“이 게으른 자들이여”
초기불교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말을 듣는 것은 큰 욕이다. 서부극에서 거짓말쟁이나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또 하나 수치스러운 말이 있다. 그것은 게으른 자이다. 부처님은 숫따니빠따 ‘용맹정진의 경’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Uṭṭhahatha nasīdatha
ko attho supitena vo,
Āturānaṃ bhi kā niddā
sallaviddhāna ruppataṃ.
[세존]
“일어나서 앉아라.
잠을 자서 너희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화살에 맞아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자에게 잠이 도대체 왠 말인가? (stn331)
(Uṭṭhānasutta -용맹정진의 경, 숫따니빠따 Sn2.10,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나무라는 장면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에게 “잠이 도대체 왠 말인가?”라 하였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그날 세존께서는 누각의 가장 위층의 내실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 이하 아래층에 있는 오백 개의 내실에 500명의 수행승들이 들어갔다. 그런데 모두 새내기 수행승들이라 가르침과 계율을 잘 모르고 산만하고 교만하고 감관은 제어되지 않았다. 그들은 낮에는 잠을 자고 저녁에는 일어나 넓은 장소에 모여서 먹은 음식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등 세속적인 화제를 떠올리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이 사밧티 시의 미가라뚜 강당에서 하룻밤을 잤을 때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부처님은 새내기 수행승들이 늦게 늦게 일어나고 웃고 떠드는 것을 보고서 한 말씀 하셨다. 이어지는 부처님 말씀을 보면 “일어나서 앉아라. 평안을 얻기 위해 철저히 배우라. 그대들이 방일하여 그 힘에 굴복한 것을 죽음의 왕이 알고 현혹하지 못하게 하라.” (stn332) 라 하였다. 부처님은 방일하지 말라고 하였다. 게으른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웃고 떠들며 늦잠 자는 새내기 수행승들은 게으른 자들이다. 부처님이 “이 게으른 자들이여”라고 말씀 하셨음에 틀림 없다.
탐진치만견(貪眞癡慢見)
잠을 많이 잔다는 것은 늦게 일어남을 말한다. 이는 게으르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어나서 앉아라”라 하였다. 일어나 앉아 화살을 뽑으라고 하였다. 지금 화살을 맞았는데 화살을 뽑을 생각하지 않고 늦게 까지 퍼 자서는 안됨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화살을 맞았을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1)탐욕의 화살, 2)성냄의 화살, 3)어리석음의 화살, 4)자만의 화살, 5)사견의 화살을 맞았다고 하였다. 이를 한자어로 ‘탐진치만견(貪眞癡慢見)’이라 한다. 이 중에 사견의 화살은 말룽끼야뿟따의 경에서 독화살로 설명된다. 말룽끼야뿟따가 ‘세상은 영원한가’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였을 때 부처님은 ‘사견의 독화살’을 맞은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열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사성제’를 설한 것이다. 사견에 대하여 정견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
부처님은 잠을 자지 말라고 하였다. 잠을 많이 자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또 잠을 자라고 하였다. 상윳따니까야 ‘연소의 법문에 대한 경(S35.235)’를 보면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한 위험을 말씀 하였는데 그 중에 정신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왜 이렇게 말씀 하였을까?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사유에 사로 잡혀, 참모임의 화합을 파괴할 정도로 그처럼 사유속에서 사려하지 말라.”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데바닷따의 승단 분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희론이나 망상에 사로 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희론이나 망상 등 쓸데 없는데 시간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는 것이 더 나음을 말한다.
“그 순간에 죽는다면”
부처님은 잠을 자지 말라고 한 것은 ‘불방일’하라는 것이다. 잠을 자라는 것은 희론이나 망상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열심히 정진하라는 말이다. 또 게으르지 말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매우 무시무시한 말을 하였다. 여섯 가지 감역 중에 시각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Varaṃ bhikkhave tattāya ayosalākāya ādittāya sampajjalitāya sajotibhūtāya cakkhundriyaṃ sampalimaṭṭhaṃ, na tveva cakkhuviññeyyesu rūpesu anubyañjanaso nimittaggāho. Nimittassādagathitaṃ-1 vā bhikkhave viññāṇaṃ tiṭṭhamānaṃ tiṭṭheyya anubyañjanassādagathitaṃ vā, tasmiṃ ce samaye kālaṃ kareyya, ṭhānametaṃ vijjati yaṃ dvinnaṃ gatīnaṃ aññataraṃ gatiṃ gaccheyya nirayaṃ vā tiracchānayoniṃ vā. Imaṃ khvāhaṃ bhikkhave ādīnavaṃ disvā evaṃ vadāmi.
[세존]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Ādittapariyāyasuttaṃ-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35, 전재성님역)
시각의 대상이 되는 형상의 유혹에 사로 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형상에는 ‘인상’과 ‘속성’이 있다고 했다. 이는 전체상과 부분상(세상)을 말한다. 큰 틀에서 여자라는 형상이 있고, 더 자세하게 보면 눈, 코, 입 등 부분적으로 관찰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런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유혹에 빠지느니 차라리 뜨겁게 달구어진 쇠바늘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그 순간에 죽는다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시각적으로 매혹되는 순간에 타락해서 지옥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여기서 눈을 찔러 형상을 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ādittasīso)”
부처님은 늦게 까지 잠을 자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찰나를 그냥 보내지 말라.”(stn333) 라고 하였다. 단 한간도 쓸데 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을 헛되이 보내면, 지옥에 떨어져 슬퍼하기 때문이다.” (stn333)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방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Appamāyu manussānaṃ
hīḷeyya naṃ suporiso,
Careyyādittasīsova
natthi maccussa nāgamoti.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네.(S4.9)
Pajahe- sabbasaṃyogaṃ
kareyya saraṇattano,
Careyyādittasīsova
patthayaṃ accutaṃ padanti.
모든 결박을 끊어 버려라.
자기자신을 피난처로 하라
불멸의 길을 구하여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 (S22:95)
두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ādittasīso)”이라 하였다. 머리에 불이 붙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즉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머리에 쓰는 터번에 불이 붙었는데 그대로 가만 있을 사람이 있을까? 마찬가지로 지금 여섯 가지 감역에서 인상과 속성에 사로 잡혀 있는 채로 죽음을 맞이 하면 어떻게 될까? 경에 따르면 “그 순간에 죽는 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 라 하였다.
“난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사람은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 밤이 지나 내일이 올지 내생이 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오욕에 사로 잡혀 하루 하루를 헛되이 보내어 세월만 보냈다면 어떻게 될까? 보시하는 삶도 살지 않았고 지계하는 삶도 살지 않았을 때 선업 보다 악업이 더 많을 것이다. 오로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이제까지 살아 왔는데 지금 이 순간 갑작스럽게 죽음과 직면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난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라고 뇌까릴지 모른다.
수행은 나이 들어 해도 된다고?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한번도 보시해 보지 않고 제대로 오계도 지키지 않고 되는 대로, 내키는 대로, 땡기는 대로, 막행막식 한 자가 죽음에 이르러 두려움을 느낄 것임에 틀림 없다. 왜 그런가? 자신의 행위는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여유 있는 것이 아니다. 젊다고 하여 수행은 나이 들어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럼에도 소위 한국을 대표하는 일류대학교의 대학교수라는 자가 “세속 즐거움을 누리다가도 깨달음을 얻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이는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다. 어느 누가 나이 들어 수행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는 말인가? 그래서 악마는 항상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 라고 말한다.
이미 죽은 자와 죽지 않는 자
지금 화살을 맞았다면 화살을 빼야 할 것이다. 특히 독화살이라면 그 이유를 따질 필요 없이 뽑아내고 보아야 한다. 머리에 불이 붙어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수행하라.”라 하였다. 왜 수행해야 하는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 죽음이 온다면 한가하게 낮잠이나 자고 게으름 피울 여유가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은 늘 사띠를 강조 했나 보다. 늘 깨어 있으라는 말이다. 늘 사띠를 유지하고 있을 때 졸림, 하품, 무료, 권태, 지겨움, 심심할 겨를이 없다.
게으른 자는 이미 죽은 자와 같다고 하였다. 왜 그런가? 계행을 지키지 않으며 막행막식하며 사는 자는 죽게 되어 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육체적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알아차림이 없을 때 태어남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어리석고 게으른 자는 산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죽은 자와 같다는 것이다. 반면 알아차림이 있으면 윤회의 수레바퀴가 부서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늘 사띠를 유지하고 있으면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늘 부지런히 정진하였을 때 늙음과 죽음을 넘어서 버리는 것이다. 불사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Appamādo amatapadaṃ,
pamādo Maccuno padaṃ,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 (Dhp21)
2016-01-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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