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11. 18:47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상윳따니까야에도 말룽끼야뿟따의 경이 있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에 등장하는 말룽끼야뿟따는 나이가 들어 노년에 이른 자이다. 이는 부처님이 말룽끼야뿟따여,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고 만년에 이르러 노령에 달해서야”(S35.95)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젊어서 말룽끼야뿟따와 다른 내용이다.

 

맛지마니까야에 등장하는 말룽끼야뿟따는 이것 저것 의문이 많았다.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 왔지만 세계는 영원하다.’든가 하는 사변적인 견해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열 가지 형이상학적 의문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사견의 화살을 맞은 것을 아시고 독화살에 대한 비유를 설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맛지마니까야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작은 경(M63)’에 등장하는 말륭끼야뿟따는 젊은 시절의 말룽끼야뿟따임에 틀림 없다. 그런 그가 상윳따니까야 여섯 감역의 모음(S35)’등장하였을 때는 늙고 연로하고 나이가 들어라 하였다.

 

늙은 말룽끼야뿟따는 부처님께 찾아 왔다. 그리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그대와 같은 수행승이 비로소 간략하게 가르침을 청원한다면, 오늘 여기 젊은 수행승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라며 질책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 ‘그는 젊었으며, 물질 등 가운데 나태하다가 이제 연로한데 숲속의 삶을 동경하고 명상수행을 원한다. 이러한 때 젊은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뜻이다”(SArp.II.382) 라 하였다. 초불연 각주를 보면 나이 들 때 까지 사문의 법을 행하지 않은 것을 꾸짓으시셨고라 되어 있다.

 

말룽끼야뿟따는 늦게나마 법을 청원하며 알고자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해 준다.

 

 

[세존]

,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들에 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 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 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

 

말룽끼야뿟따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 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 된 것만이 있을 뿐이라면, 말룽끼야뿟따여, 그대는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는 그것 안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것 안에 있지 않으면, 여기나 저기나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자체가 괴로움의 종식이다.

 

(말룽끼야뿟따경-Mālukyaputtasutta, 상윳따니까야 S35:95, 전재성님역)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시각의식에 보여진 형상속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왜냐하면 시각의식은 오로지 형상속에서 형상만을 보고 영원한 어떤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를 순간적인 포착, 즉 자와나(속행)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순간적인 포착은 단지 시각의식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계를 지나쳤을 때 탐욕 등이 일어남을 말한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아비담마에 실려 있는 인식과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식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대상을 접촉함에 따라 순수한 인식이 일어 났을 때는 단지 보여질 뿐이고, 들려질 뿐이고, 인식되어 질 뿐이라 하였다. 여기에 탐욕 등의 욕망이 개입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바로 이전 문장을 보면 부처님이 그대에게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예전에도 결코 본 적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시각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형상들에 대한 어떤 탐욕이나 애착이 있는가?”(S35.95) 라고 물어 본 것에서 알 수 있다.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다. 아직 의도가 개입한 것은 아니다. 의도가 개입 되었다면 욕망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사띠 없이 대상을 본다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릴 것이다. 그래서 그것에 탐착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의도가 개입 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시각의식에 대하여 그대는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S35:95) 라 하였다. 이는 인식되지 않은 것에서 생겨난 욕망과 탐욕이 없음” (Srp.II.383)을 말한다.

 

이렇게 보인 것만 있을 때 그대가 그것 안에 있지 않으면, 여기나 저기나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자체가 괴로움의 종식이다.” (S35:95) 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이것 자체가 번뇌의 고통과 윤회의 고통의 끝, 종식, 한계이다.” (Srp.II.383) 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형상을 볼 때 사띠하라는 말이다. 사띠하였을 때 보인 것안에서 보인 것만을 보며 희론이나 망상으로 마음이 혼란 되지 않음을 말한다. 구체적인 설명이 이어지는 게송에서 나타난다.

 

 

[세존]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면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려

오염된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에 탐착하고 마네.

그래서 형상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안에서 자라나

마음이 혼란하게 되어

탐욕과 분노도 더불어 자라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운다면

그에게 열반은 멀다고 하리.

 

(말룽끼야뿟따경-Mālukyaputtasutta, 상윳따니까야 S35:95, 전재성님역)

 

 

혼란된 새김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매혹적인 인상에 마음이 쏠린다고 하였다. 사띠 하지 않음을 말한다.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때 대상에 놀아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느낌 단계, 지각단계, 인식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2015-01-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