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적 발생연기에 대하여
화분을 하나 샀는데
화분을 하나 샀다. 오래 전부터 사려고 마음 먹은 것을 실행하였다. 인덕원 화원단지에서 산 열대성 식물이다. 여러 갈래의 줄기와 함께 잎이 쭉쭉 뻗어 있는 것이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식물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살 때 물어 보야 했으나 깜박 잊은 것이다.
누구나 이름을 갖는다. 그러나 이름은 부르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호적에 표시 되어 있는 이름, 집에서 부르는 이름, 조직이나 단체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를 수 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조직이나 단체에서는 직급으로 부른다. 또 가정에서는 엄마나 아빠로 불려지기도 한다. 마치 컵이 물잔도 되지만 커피잔도 되고 술잔이 되는 이치와 같다. 상이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고 술상이 되는 것은 용도에 따라 달리 쓰이기 때문이다. 대체 저 화분의 식물이름은 무엇일까?
내가 명색(名色)이
명색(名色)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흔히 ‘명새기’라는 말로 사용된다. 누군가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사람이”라 하였을 때, 이때 명색은 ‘어떤 부류에 붙여져 불리는 이름’을 뜻한다. 또한 실속없이 그럴듯하게 불리는 허울만 좋은 이름을 뜻하기도 하다.
명색이라는 말은 그 사람의 이름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의 현재위치를 뜻하기도 한다. 누군가 “내가 명새기 사장인데, 그까짓 돈을 떼먹겠어?”라고 하였을 때, 이때 명색은 지위와 권위를 나태내기도 한다. 이런 명색은 명(名)과 색(色)의 결합어이다.
명색에서 ‘명’은 이름이나 명칭을 뜻한다. 또 명색에서 ‘색’은 모양과 형태를 뜻한다. 따라서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과 조직이나 단체에서 부르는 이름, 그리고 가정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 다르다. 이런 이치는 모든 사물이나 개념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 세상에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은 명과 색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의 이름 뿐만 아니라 컵이나 책상도 그렇고, 심지어 사랑이나 미움 같은 개념도 그렇다. 사랑이라는 말을 떠 올렸을 때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미지가 형성된다. 굳이 형태로 나타내자면 ‘하트’ 모양을 들 수 있다. 미움이라는 단어를 접하였을 때 역시 하나의 이미지가 떠 오른다. 이렇게 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명칭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이름과 형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색이란 무엇일까?
명색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나마루빠(nāmarūpa)’라 한다. 브라흐마나 문헌이나 우파니샤드에서는 절대자가 질료속에서 자신을 전개 하는 두 힘으로 나타낸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한 브라흐마가 “나는 참으로 살아 있는 자아를 통해서 이들 세 가지 신성(火-水-食)속으로 들어가 명칭과 형상을 전개하리라.”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런식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브라흐마의 화현이라 볼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명색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보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을 말한다. 오온으로 한정한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것은 오온으로 한정된다. 우주의 원리를 알고자 설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당면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설한 것이다.
명색이란 무엇일까? 부처님은 명색에 대하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식이라 한다.” (S12.2)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불교에서 명색은 이름과 형태라기 보다 정신-물질로 설명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과 쌍조건으로 이루어진 명색
누군가 “내가 명새기 사장인데”라 하였다. 이때 명색은 단지 이름과 형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이나 정신이라 불리우는 의식과 쌍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일어나고”라는 정형구에서 알 수 있다. 명색은 반드시 의식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 ‘도시의 경(S12.65)’에 따르면 십이연기 정형구와 다른 형태가 발견된다. 옮겨 보면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S12:65)라 하였다. 여기서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nāmaråpapaccayā viññāṇaṃ)’라는 말은 한자어로 명색연식(名色緣識)이 된다. 또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viññāṇapaccayā nāmaråpaṃ)’라는 말은 한자어로 식연명색(識緣名色)이 된다.
이렇게 식과 명색이 상호 번갈아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을 설명한다고 하였다. 이는 앞 문장에서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슨 일까? 주석에 따르면 “재생의식은 조건으로부터 되돌아 오고 통찰지은 대상으로부터 되돌아 온다. 그것은 명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Srp.II.115) 라 설명 되어 있다.
재생연결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의도적 행위가 있었을 때 그 행위(업)에 대한 과보로서 다시 태어나는 가져오는 조건발생적 식, 즉 재생연결식이 일어남을 뜻한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으로서 식은 명색과 상호의존하여 발생함으로 인하여 새로운 태어남이 있게 된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에 따라 명색의 관계는 “명색연식, 식연명색, 명색연식…”라는 형태로 계속 상호 작용하여 새로운 태어남이 있게 됨을 말한다.
도시의 경에서는 십이연기가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식과 명색의 관계가 ‘명색연식’과 ‘식연명색’으로 쌍으로 연기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적 발생은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는 디가니까야 ‘인연의 큰 경(D15)’에서 알 수 있다.
선행하는 식과 후행하는 식
우리는 매일 매일 일상에서 시각으로 청각으로 대상을 접하며 살고 있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의 접촉에 따라 의식이 발생하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삼사화합’이라 한다. 삼사화합이 일어날 때 눈, 귀, 코, 혀, 몸, 정신의 영역에서 일어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서 일어남을 말한다. 철저하게 우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눈만 뜨면 대상을 접하고 귀가 열려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 대상에 따라 우리의 몸과 마음, 즉 명색과 의식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그것은 시각영역, 청각영역 등 여섯 가지 영역이 있다. 그런데 삼사화합은 십이연기에서 정형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일어나고”와 정반대로 되어 있다.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6)’에 따르면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하여 시각의식이 생겨나며”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각의식이 나중에 생겨나는 것이다.
식과 명색의 관계가 십이연기정형구에서는 의식이 앞서 있다. 이는 법구경 1번 게송에서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라는 구절과 일치 한다. 그러나 살라야따나상윳따(육입처, S35)에서 세상이나 괴로움에 대한 발생의 경을 보면 꿀과자의 경에서와 같이 삼사화합에 따라 의식이 발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십이연기와 육입처에서의 식은 순서가 정 반대로 되어 있다.
식연명색에 대하여
그런데 디가니까야 인연의 큰 경에 따르면 식과 명색에 대하여 상호의존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앞서 언급된 도시의 경에서와 같이 명색연색과 식연명색에 대한 것이다. 관련 문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아난다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는데, 만약 의식이 모태에 들지 않더라도 명색이 모태에 응결될 수 있겠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나다연, 의식이 모태에 들었으나 빗나갔다면, 그래도 명색이 이러한 상태로 태어날 수 있겠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의식이 갓난아이나 어린 남아나 어린 여아일 때 단절되었다면, 명색이 성장하고 증장하고 성숙할 수 있겠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아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명색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의식이다.”
(Mahānidānasutta-인연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5, 전재성님역)
부처님과 아난다의 문답을 보면 십이연기정형구에서 식과 명색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식이 모태에 들어야 명색이 형성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만약 의식이 모태에 들지 않더라도 명색이 모태에 응결될 수 있겠는가?”라고 물어 본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식은 삼세양중인과에서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그런데 일상에서 식과 명색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이는 “의식이 갓난아이나 어린 남아나 어린 여아일 때 단절되었다면, 명색이 성장하고 증장하고 성숙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십이연기 정형구에서처럼 부처님은 “명색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의식이다.”라 하신 것이다.
명색이 식의 조건도 된다
부처님은 식이 명색의 조건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가르침을 보면 놀랍게도 명색이 식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명색연식을 말한다. 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아난다여,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다음과 같은 이치에 따라서 어떻게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의식이 명색에 확립되지 않는다면, 그렇더라도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의 발생과 생성이 시설될 수 있겠는가?”
[아난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
“아난다여, 그러므로 참으로 의식의 그 원인, 그 인연, 그 발생, 그 조건은 바로 명색이다.”
[세존]
“아난다여, 참으로 명색이 의식과 함께 서로 조건이 되는 경우, 이와 같이 해서 태어나서, 늙거나, 죽거나, 사멸하거나 다시 태어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명칭의 길이 전개되고, 이와 같이 해서 어원의 길이 전개되고, 이와 같이 해서 표현의 길이 전개되고, 이와 같이 해서 지혜의 영역이 전개된다. 이와 같이 해서 유전하는 존재의 상태가 시설되기 위해 전개된다.”
(Mahānidānasutta-인연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명색연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식연명색’과는 반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왜 명색연식이라 하였을까?
명색연식이라고 한 것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를 “의식이 명색에 확립되지 않는다면, 그렇더라도 미래에 태어나고 늙고 죽는 괴로움의 발생과 생성이 시설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에서 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육입처’와 관련 되어 설명될 수 있다. 왜 그런가? 명색연식이라는 것이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식연명색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육입처에 따르면 시각과 형상의 접촉을 조건에 따라 의식이 형성된다. 그런데 십이연기에서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형성된다. 십이연기에서는 식이 ‘선행’하지만, 육입처에서는 식이 ‘후행’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인연의 큰 경’에서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으로 상호의존하여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연의 큰 경’에서 부처님은 “명색이 의식과 함께 서로 조건이 되는 경우, 이와 같이 해서 태어나서, 늙거나, 죽거나, 사멸하거나 다시 태어난다.”라 하였다. 생노병사의 원인이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하여 발생하기 때문으로 본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윤회의 원인에 대하여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하기 때문으로 본 것이다.
만일 식과 명색이 상호의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윤회가 종식될 것이다. 이는 앞서 언근된 도시의 경에서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다.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 있어서 재생의 원인이 되는 업이 남아 있지 않는다. 따라서 임종순간에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식이 일어나지 않으면 명색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으니 세상도 일어나지 않고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적 발생연기
부처님은 식과 명색에 대하여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상호의존적 발생연기를 말한다.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식과 명색이 오온에 대한 것으로 윤회하는 삶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명색에서 명은 정신에 대한 것이고 색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이는 이중표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명색이 단지 명칭과 형태만을 의미 하지 않는다. 만일 명색에 대하여 명칭과 형태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우파니샤드 철학을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브라흐마의 화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 즉 오온을 떠나 이를 우주적으로 확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색은 정신과 물질로 설명된다. 이는 초기경에서 명(나마)에 대하여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라고 정의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명색에서 명, 즉 나마는 마음부수인 것이다. 그리고 식은 의식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에서 식온은 식(윈냐나)에 해당되고, 수온과 상온과 행온은 명(나마), 그리고 색온은 색(루빠)에 해당된다. 그래서 식과 명색의 관계는 다름 아닌 ‘오온’이다.
우리 몸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면 식과 마음부수와 색이다. 이렇게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과 마음이 내 것이라고 집착함에 따라 괴로움이 발생하고 윤회한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그런데 괴로움의 직접적 원인이 바로 시각, 청각 등 여섯 가지 감역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온과 육입처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으로 설명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자신의 저서 ‘초기불교 연기사상’에서 현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따라서 물질과 명칭은 우리의 의식속에서 현상의 작용과 작용의 현상으로 경험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불가분의 수반관계를 갖게 된다. 이러한 현상의 작용과 작용의 현상을 조건으로 감각적 통일장이 성립된다. 명색을 조건으로 감역(육입)이 생겨난다.”
(전재성님, 초기불교 연기사상 276P)
십이연기에서 육입은 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된다. 그런데 명색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정신은 느낌, 지각, 형성과 같은 마음부수라는 것이다. 이는 오온에서 수온, 상온, 행온을 말한다.
명색은 의식이 없으면 작용하지 못한다. 이때 의식은 수온, 상온, 행온을 각각 분별하여 인식하며 또한 이끌어 간다. 이는 법구경 1번 게송에서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라는 구절에서 확인 된다. 그러나 의식(윈냐나)은 마음부수(나마) 도움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윈냐나)과 마음부수(나마), 그리고 마음과 명색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식연명색’과 ‘명색연식’이라는 상호의존적 발생연기의 관계가 성립 될 수밖에 없다. 상호의존적 발생연기에 따라 세상이 열리고 괴로움 또한 전개 된다.
2016-02-01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험담하는가? 차라리 고귀한 침묵을, 마음에 새겨야 할 여섯 가지 수념(随念: anussati) (0) | 2016.02.10 |
---|---|
업이 달리 익을 때, 업에 대한 위대한 분석 (0) | 2016.02.06 |
나마루빠(Namarupa) 이름-형태인가 정신-물질인가? 이중표교수 중론(中論)강연을 듣고 (0) | 2016.01.23 |
부처님은 그날 밤 무엇을 깨달았을까? 부처님 성도절을 맞이 하여 (0) | 2016.01.17 |
현장스님이 인왕반야경을 설할 때 (0) | 2016.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