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공포, 지옥의 묵시록은 불교영화
사람들은 지옥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알까? 아직 까지 지옥에 가서 돌아온 이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갖가지 지옥이 등장한다. 맛지마니까야 천사의 경을 보면 ‘똥이 가득찬 대지옥’, ‘숯불이 시뻘겋게 달궈진 대지옥’ 등이 묘사 되어 있다. 그런 지옥에 떨어지면 “그에게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죽지도 못한다.”(M130)라 하였다.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괴로워하니”
어떻게 지옥에 떨어질까? 초기경전에서는 “이 뭇 삶들은 몸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말로 악행을 저지르고 뜻으로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른 행동을 저질렀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가 파괴된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났다.” (M4) 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면 악처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십악행’을 저질렀을 때이다.
살인, 도둑질, 거짓말, 음행, 음주 등 오계를 저지른 자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했다. 특히 살인을 저지른 자들은 지옥을 예약해 놓은 것과 다름 없다. 그런데 살인자는 ‘이미 이 세상에서 지옥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따르면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괴로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괴로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괴로워한다.”(Dhp17) 라 하였다. 왜 그럴까?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하고 나쁜 곳에 떨어져 한층 더 고통스러워한다.” (Dhp17) 라 하였기 때문이다.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괴로워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 슬퍼하고 사후에도 슬퍼한다.”(Dhp15) 라 했다. 왜 슬퍼할까? 이어지는 게송에 따르면 “자신의 더러운 업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Dhp15) 라고 했다. 악행을 저지르고 난 다음 슬프고 괴로운 마음이 일어난 것은 자신의 더러운 업을 보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괴로움은 이 생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생에서 악행에 대한 과보를 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산 그림자와 마음의 그림자
지금 살인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지옥행 열차를 예약해 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죽음이 다가올수록 공포가 엄습할 것이다. 이런 두려움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 라 하였다. 인간의 죄의식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공포를 잘 표현 하고 있는 문구이다.
악행을 하면 늘 그 장면이 머리에 떠 오를 것이다. 살인과 같은 끔찍한 행위를 하였다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시도 때도 떠올라 죄의식에 시달릴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 라 하였다.
악행을 하면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라 하였다. 이를 산봉우리의 그림자로 설명하였다. 그것도 해질 무렵이다. 해가 진다는 것은 어둠이 시작 됨을 말한다.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할 때 긴 ‘산 그림자’가 지면 이제 어둠이 멀지 않았음을 알린다. 살인 하였다면 늘 ‘마음속의 그늘’로 남아 의식을 지배할 것이다. 그것은 두려움과 공포이다. 지옥에 떨어질 것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서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서 거대한 산 그림자를 보았다. 영화말미에 ‘공포’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대령은 죽어 가면서 “공포(Horror)”라는 말을 나지막하게 계속 외친다. 대령은 죽어가면서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가 끝날 무렵 부처의 이미지가 나온다. 명상속의 부처와 함께 전쟁의 이미지가 비추어지고 있다. 마치 불상이 전쟁의 시작과 끝을 다 보고 있는 듯 하다.
불상의 이미지와 함께 주인공의 얼굴이 나타난다. 불상과 주인공의 이미지가 함께 보였을 때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불상은 여전히 명상에 잠겨 있다. 주인공은 무언가 알아 차린 듯 하다. 마치 전쟁의 실상을 꽤뚫어 보는 것 같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EBS토요명화 시간에 보았다. 예고가 되었기 때문에 기다렸다가 본 것이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를 대표한다. 베트남전 당시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 준 영화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매우 오래 전에 상영되었다. 1979년 작품이다. 검색해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에 개봉 되었고, 2001년에 재개봉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미 특수부대의 윌라드 대위는 하루하루 계속되는 전쟁에 지루함을 느끼고 지쳐가던 중 뜻밖의 특명을 받게 된다. 미군으로서의 경력이 화려하고 타의 모범이 되던 군인이었으나 어느 날 미군의 통제를 벗어나 캄보디아로 망명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부대를 거느리고 있는 커츠 대령을 암살하라는 것이다.
윌라드 대위는 전쟁 경험이 많지 않은 네명의 병사들과 함께 커츠 대령이 있는 캄보디아를 향해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 과정 중 그의 부대는 킬고어 중령의 부대를 만나는데, 그는 포탄이 바다로 투하되고 있는 상황에도 서핑을 즐기려고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 선율에 맞추어 적에게 포탄을 퍼붓는 광적인 인물이다. 또 윌라드 대위의 부대는 전쟁 지역 어딘가에 마련된 화려한 환락가에서 춤을 추는 플레이걸들을 향해 달려드는 군인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한다.
그 험난하고 종잡을 수 없는 여정 속에서 그는 미군 정부로부터 받은 커츠 대령에 대한 정보를 살피며 그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키워간다. 캄보디아 접경 지역으로 향할수록 심해지는 견제와 공격에 몇몇 부대원을 잃지만 살아남은 윌라드 대위와 그의 남은 일행은 드디어 커츠 대령이 거느리는 캄보디아 부대를 만나게 된다.
목 매달린 시체들과 해골이 즐비한 그곳의 캄보디아인들과 사진기자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커츠 대령을 왕으로 추앙한다. 윌라드 대위는 커츠 대령으로부터 그가 직면했던 전쟁 속의 도덕적 딜레마와 그로 인한 궁극의 공포, 광기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영화에서 관심 있게 본 것은 캄보디아 정글에 있는 사원이다. 마치 앙코르와트에 있는 ‘바욘(Bayon)’사원을 보는 듯 하다. 거대한 석상이 있는데 그것은 명상을 하고 있는 부처의 얼굴이다. 더구나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바욘사원을 건립한 자야바르만 7세(1181-1220년)의 얼굴이라고도 하고 관세음보살상이라고도 한다. 바욘사원이 불교사원이기 때문에 불상으로 본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마지막 장면에서 불상이 등장한다. 그것은 명상하는 모습의 불상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얼굴이 좌측에 서서히 나타나면서 불상은 서서히 페이드아웃(fade out)된다. 그 순간 주인공은 무언가 크게 깨달은 듯한 얼굴이다. 무엇을 깨달았을까?
주인공은 전쟁의 참상을 보았다. 증오심으로 가득한 전쟁에서 죽고 죽이는 지옥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이다. 그런데 불상은 이 모든 것을 처음 부터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비록 명상속에 잠겨 있지만 증오심으로 가득한 전쟁의 참상을 모두 다 지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주인공이 신격화 된 대령을 죽이자 모든 사람들은 무기를 내려 놓았다. 더 이상 죽고 죽이는 전쟁이 사원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악행에 대한 과고는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죽으면 지옥에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할 수 있다. 또 계획적 살인도 있다.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한 과보는 받는다. 그것은 마음의 그늘로 나타난다. 그래서 마치 산그림자처럼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라 했다.
전쟁을 하면 대량으로 살상된다. 여기에 참여한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살인을 하게 된다. 비록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긴 하지만 사람을 죽인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살인행위가 면책 될까?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싸웠기 때문에 악처에 떨어질 일은 없을까?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에서처럼 ‘살생유택(殺生有擇)’하면 모두 용서될까?
상윳따니까야에 ‘전사의 경(S42.3)’이 있다. 전쟁터에 잔 뼈가 굵은 전사가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난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싸웠다. 과연 전쟁터에서 죽은 전사는 전사자들만 간다는 전사자의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 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 그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
(Yodhājīvasutta-전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3, 전재성님역)
전쟁은 증오심이 있어야 한다. 증오심이 없으면 전쟁을 할 수 없다. 전쟁광들은 “목숨을 아끼지 말라. 언젠가는 한번 죽는다.”라며 증오심과 적개심을 부추긴다. 그리고 전쟁광들은 싸우다 죽으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부정하였다. 천상이 아니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했다. 전쟁하다 죽으면 지옥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전사자의 하늘을 부정하였다. 전쟁하다 죽으면 모저리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했다. 왜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 그것은 ‘증오심’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라고 말씀 하셨다. 증오심에 가득찬 상태에서 죽었을 때 지옥에 태어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반드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쟁은 아닐 것이다. 증오심과 적개심을 가지고 싸우는 모든 것이 해당된다. 부모와 자식간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상사와 부하간에, 조직과 조직간에, 정당과 정당간에 피튀기는 싸움은 미움과 원망과 증오를 바탕으로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지옥에 태어나는 요인이 된다.
지옥의 묵시록은 불교영화
살인으로 인한 죄의식은 원초적 두려움과 공포를 유발하고 만다. 그래서 일생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죽는 순간 지옥의 표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속에서 전쟁의 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대령은 죽음의 순간에 “공포, 공포” 하며 나지막히 외쳤다. 아마 지옥의 표상을 보았을 것이다. 주인공은 이런 모든 사실을 깨달은 듯 하다. 그래서 불상의 이미지와 함께 나온다. 이것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불교영화’라 볼 수 있다.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도 슬퍼하고 저 세상에서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 (dhp15)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기뻐하니
이 세상에서도 기뻐하고 저 세상에서도 기뻐한다.
자신의 업의 청정함을 보고
기뻐하고 그리고 환희한다. (dhp16)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괴로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괴로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괴로워한다.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하고
나쁜 곳에 떨어져 한층 더 고통스러워 한다. (dhp17)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한다.
‘내가 선을 지었다’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한다. (dhp18)
2016-03-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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