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 돌아갈래”희로애락의 인생여정에서
“나 이제 돌아 갈래!” 영화 ‘박하사탕’ 마지막 장면 입니다. 주인공이 철교 위에 서서 마주 보고 있는 기차를 향해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이창동감독의 박하사탕은 ‘시간역행영화’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첫 장면은 마지막 장면을 암시 하는 듯합니다. 스무살 가량의 공장노동자들이 철교 아래 백사장에서 그때 당시 유행하던 노래와 춤을 추며 즐기고 있습니다. 이때 순진하게 생긴 청년이 말없이 그곳을 빠져 나와 철교를 물끄러미 바라 봅니다. 그런데 무언가 본 듯 합니다. 놀라는 표정과 함께 이어서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립니다.
“시집간날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더래요.” 유행가 노래 가사 중의 일부 입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서로 사랑을 했는데 갑순이는 원치 않는 곳에 시집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커다란 소리로 울어 댑니다. 울음으로 이 세상에 왔음을 신고합니다.
박하사탕에서의 눈물, 갑순이의 첫날밤 하염없는 울음, 아기의 신고식으로서의 울음이 있습니다. 이 울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혹시 미래의 가혹한 운명에 대한 일종의 예지의 눈물 아닐까요?
사람이 죽으면 ‘돌아 가셨다’라 합니다. 어디로 돌아 간 것일까요? 유물론적으로 보았을 때는 사대(四大)로 흩어짐을 말합니다. 지수화풍 사대로 형성된 몸이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되돌아 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죽음이라는 말은 유물론적 사상이 깊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물론은 단멸론적 허무주의로 귀결된다는 사실 입니다. 그래서 죽고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흔히 듣는 말이 “천국이 어디있고 지옥이 어디있어? 죽으면 끝이지!”라 말합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종교를 믿지 않은 사람들 상당수가 단멸론자들이라 합니다. 어떤이는 50% 가량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내세를 믿습니다. 불교인들은 육도윤회를 믿습니다. 이번 한번뿐인 생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따라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곳으로 봅니다.
이 생에서 단지 착하게 살았다고 하여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막말로 이전 생에서 뭔짓을 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 입니다. 남에게 폐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할지라도 지혜없이 어리석게 살았다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선악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악업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일생을 착하게 살아도 선처에 나지 못하는 것은 사견(邪見)을 가졌기 때문 입니다. 일평생 살다 ‘죽으면 끝이다’라는 단멸론적 허무주의를 가졌다면 선처에 나기 힘들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정견입니다. 정견을 가지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선처에 나게 됩니다. 착하게 살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지혜롭게 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함께 베풀고 나누고 도덕적 삶을 살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런 천상은 어떤 곳일까요? 초기경전에 따르면 ‘환희동산(nandanavane)’으로 묘사 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욕계천상중의 하나인 ‘삼십삼천’ 입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천상은 수명이 보장 되어 있습니다. 공덕을 쌓은 과보 때문입니다. 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면 기본적으로 복과 수명이 보장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옛날에는 환갑잔치를 하면 수복(壽福)이라는 글자를 크게 쓴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마 천상의 삶을 동경해서 일 것 입니다.
복과 수명을 누리는 천상의 존재들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아래 세상으로 내려 가야 합니다. 천상에서는 공덕짓기가 힘들어 공덕을 까먹는 세월이 되기 쉽기 때문에 대부분 악처에 태어납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기원합니다. 희로애락의 인간세상에 태어나 공덕을 지은 후 다시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삼십삼천에서 하루는 인간세상 백년에 해당 됩니다. 인간세상에 태어나 오십년 공덕짓고 다시 천상에 태어났다면 잠시 마실에 다녀온 것에 지나지 않을 시간 입니다. 그래서 천신이 임종에 이르면 주변 동료들은 “천신이여, 또 거듭해서 오시오.”(It83) 라고 말합니다.
천상병 시인의 작품에 귀천(歸天)이 있습니다. 천상에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 시를 보면 불교적 세계관이 반영 된 듯 합니다. 천신으로 살았는데 잠시 인간세상에 태어난 듯합니다. 그래서 천상으로 되돌아 가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잠시 인간세상에 소풍나온 것이라 묘사 합니다. 마치 긴 여행을 마친자가 돌아갈 집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천상병시인의 귀천을 보면 법구경인연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연담은 다음과 같습니다.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
한때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에 말라바린(Malabhalin)이라는 하늘아들이 천명의 선녀들에게 둘러싸여 정원에 들어갔다. 오백 명의 선녀들이 꽃을 따서 던지면 오백명의 선녀들이 꽃을 주어 하늘아들을 치장했다. 그런데 한 선녀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몸이 등불처럼 꺼져서, 싸밧티 시의 한 고귀한 가문에 태어났다. 그리고는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생을 기억했고. ‘하늘아들 말라바린의 아내이다.’라고 회상하며, 자라서는 꽃공양과 향공양을 하면서 전 남편의 곁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그녀의 남편을 공경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빠띠뿌지까(Patipujika)라고 지었다.
그녀는 열여섯에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갔다. 그리고 그녀는 수행승들에게 식권으로 먹는 음식과 보름의 음식과 우기의 음식을 공양하며 천상의 남편과 만나길 발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열달 후에 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걸을만하자 두 번째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걸을만하자 또 다른 아들을 낳고 해서 어느덧 네 아들을 낳았다. 어느날 그녀는 공양을 올리고 공덕을 수행승들에게 회향하고 가르침을 듣고 계행을 지키고는 그날 저녁에 갑자기 질병으로 죽어서 다시 천상계에 화생했다.
천상계에서는 여전히 선녀들이 말라바린에게 꽃을 장식하고 있었다. 하늘아들 말라바린이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안보이던데, 어디 갔다 왔소?’라고 물었다. ‘여보, 저는 죽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주인님, 사실입니다.’ ‘어디서 태어났소?’ ‘싸밧티 시의 한가문에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그곳에서 오랫동안 지냈습니까?’ ‘주인님, 열달만에 저는 어머니의 태에서 나와 열여섯 살에 다른 가문에 시집가서 네 아들을 낳아 기르며, 수행승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시중을 들며 다시 돌아오기를 서원하여 당신 곁에 온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 ‘주인님, 백년입니다.’ ‘그렇게 짧습니까?’ ‘주인님, 그렇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짧은 시간 태어나서 산다면, 시간을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냅니까?’ ‘주인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인간들은 늙음과 죽음이 없이 무수한 세월을 사는 것처럼 방일합니다.’ 그러자 말라바린은 크게 동요하며, ‘당신이 말한 대로 인간들이 태어나 겨우 백년을 사는데, (인간의 백년은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루 밤낮에 해당한다. 신들의 수명은 천상년으로 천년이고, 인간년으로 환산하면, 3천 6백만년에 해당한다) 빈둥거리며 방일하게 보낸다면, 언제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겠습니까?’
한편 지상에서 다음날 수행승들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알렸다. 부처님께서는 천상계의 일을 수행승들에게 설명하고 ‘이 세상의 모든 뭇삶의 목숨은 짧다.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채워지기도 전에 죽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시로써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의 마음이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 등을 성취했다.
(법구경 48번 게송 인연담, 빠띠뿌지까와 관련된 이야기(Patipujikavatthu))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천상의 존재는 잠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인간오십년을 살았지만 인간백년이 천상하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 당신이 안보이던데, 어디 갔다 왔소?”라고 물어 본 것 입니다.
천상병시인은 귀천에서 인생을 소풍온 것에 비유하며 ‘나 이제 돌아갈래’라 했습니다. 박하사탕에서 ‘나 이제 돌아 갈래’라고 말한 것과 다릅니다. 한평생 착하고 건전하고 지혜롭게 살아온 시인의 자신감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누군가 희로애락의 인생이라는 고된 여정을 마친자가 돌아갈 집이 있듯이 “나 이제 돌아갈래”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2016-08-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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