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공포를 잊고자 할 때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때로 두려운 것입니다. 특히 미래가 불확실할 때 그렇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을 때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드라마에서 전쟁에 패한 군인들이 “우리는 이제 어쩌죠?”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또 영화 ‘닥터지바고’를 보면, 의사 지바고가 불륜을 맺은 여인 ‘라라’와의 대화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영화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우린 이제 어쩌죠?”라고 말합니다.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선 유부남유부녀와의 대화입니다. 이에 남자가 “나도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엄습할 때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를 잊고자 합니다. 대게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으로 잊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날 때 ‘즐길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드라마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가 애인 집에 찾아가 애인의 치마폭에 숨는 것도 두려움과 공포를 잊기 위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습니다. 눈으로는 아름다운 형상을 찾고, 귀로는 매혹적인 소리를 찾습니다. 코와 혀로는 맛있는 것을 찾습니다. 스트레스 받으면 많이 먹는다고 합니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먹는 것으로 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과 귀와 코와 혀, 그리고 몸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오감으로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 버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초전법륜경에서는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 라 하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苦集聖諦)’를 정의해 놓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우리 주변을 보면 생노병사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중환자실에 가면 아픈 사람 천지입니다. 장례식장에 가면 죽어 가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즐길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슬퍼도 밥을 먹는 것은 음식에 대한 갈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본다거나 음악을 듣는 것도 어쩌면 암울한 현실을 잊어 버리기 위함일지 모릅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을 때 즐길거리를 찾으면 일시적으로 잊어 버립니다.
맛에 탐닉하는 것도 고통스런 현실을 잊기 위한 방편일 수 있습니다. 모두 병들어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를 애써 잊어 버리려 합니다.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즐길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설령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그 공포를 잊기 위해서라도 즐길거리를 찾아 즐기는데 몰두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난 자들은 모두 죽는다는 그 사실을 모두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의도적으로 잊어 버리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태연히 밥을 먹는 것도 ‘죽음은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죽음에 대하여 직시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끊임 없는 명상을 강조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고 익히면 불사에 뛰어들고 불사를 궁극으로 하는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을 얻는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아라.” (A6.19) 라 하여 끊임 없이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불사(不死: Atama)에 이르면
죽음은 누구나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아니 의도적으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끊임 없이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면 결국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무엇인지 알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불사(不死: Atama)’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으니 영원히 태어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불사의 경지, 열반입니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열반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열반을 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온이 내것이라 여기는 존재는 오온의 무너짐과 함께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렇다고 단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하여 재생됩니다. 그러나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애초부터 죽음은 시설되지 않습니다. 무아(無我)인자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유아(有我)인자에나 죽음이 있습니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가 됩니다.
2017-02-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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