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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의 천상과 지옥,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7. 2. 18. 13:12

 

전사자의 천상과 지옥,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를 보고

 

 

기억속의 이미지

 

벵갈고무나무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시름도 깊어 갑니다. 사온지 이제 두 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떨어진 잎이 열 개가 넘는 것 같습니다. 자고 나면 떨어진 잎을 보면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이런 속도라면 앞으로 한달 이내에 모두 다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식물을 키워서 성공한 것도 있지만 실패한 것도 있습니다. 실패한 식물을 보면 조짐이 있습니다. 대게 잎파리가 변색되면서 하나 둘 씩 떨어집니다. 이전에 친구가 선물해 준 팔손이 나무가 그랬고, 작년 관곡지에서 사온 덩굴재스민이 그랬습니다. 이와 관련된 글을 써 놓은 적이 있기 때문에 기록과 사진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기억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창시절 친구들입니다. 너무 오래 되어서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그 시절 그 이미지만 남아 있기 때문에 영원한 소년이고 영원한 청춘입니다. 죽은 자들 역시 기억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모두들 재를 남기고 사라졌지만 마음 속에 마지막으로 본 이미지만 남아 있습니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벵갈고무나가 한달 후에 생존할지 폐기 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 둘 잎파리가 변색되어 떨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잎파리가 많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벵갈나무는 살아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생존하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죽고 나면 나무토막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이 말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그 이상입니다.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기 때문에 사물을 인지합니다. 다섯 가지 감각의 문(五門)과 의문(意門)을 통해 세상이 전개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와 같은 세상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매 순간 보고 들음에 따라 매번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때문에 세상은 수시로 바뀝니다. 만일 눈과 귀가 멀었다면 의문의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모두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지금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도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를 보고

 

케이블채널에서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2001년에 제작된 10부작 전쟁드라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중파방송에서 이미 방송된 바 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케이블에서 방송된 바 있습니다. 드라마가 나온지 16년만에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영화는 이차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공수대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긍지와 자부심으로 무장된 최정예 101공수사단 ‘E(Easy)’중대원들이 겪은 전쟁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면에는 전쟁의 잔혹함과 참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모두 10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드라마에서 압권은 제2편에 있는 공중강하 이야기일 것입니다. 모두 자원입대자들로 구성된 101공수사단 이지중대원들은 2년 가량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합니다. 이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바로 전날 밤 후방에 공중강하 됩니다. 공중강하를 앞두고 해질 무렵 수 십, 수 백대의 수송기(C47)가 이륙하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륙한 수송기는 목표지를 향하여 날아 갑니다. 그러나 목표지점에 이르자 대공포화가 빗발칩니다. 운이 없으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목표지점을 향하여 날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대공포화가 빗발치는 가운데 수송기가 격추 당하여 추락하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강하가 시작 됩니다. 빗발치는 대공화기에 고스란히 노출 되어 있어서 재수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전개 되는 가혹한 운명을 예고 하는 것 같습니다.

 

살아 남은 자들의 기록

 

요즘 전쟁영화나 드라마, 다큐프로를 종종 봅니다. 또한 유튜브시대에 키워드만 입력하면 각종 전쟁관련 자료를 접할 수 있습니다. 전쟁관련 콘텐츠를 접하면서 간접적으로 전쟁을 경험합니다. 어느 경우에는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오기도 합니다. 특히 전쟁의 잔혹함과 참상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전장에서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고 하는데 특히 전장에서는 이 순간 이후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바로 옆에서 전우가 죽어 갑니다. 죽어가는 순간 눈을 감으면 우주는 파괴 됩니다. 그러나 재수 좋게 살아 남은 자들은 천수를 누립니다. 이를 회고록으로 남겼을 때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전쟁관련 콘텐츠는 살아 남은 자들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증오심을 부추기는 자들

 

전쟁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전쟁터에서 공포를 가진다면 전투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언젠가는 한번 죽는 목숨이다. 목숨을 두려워 하지 말라.”라고 지휘관들이 격려합니다. 그래서일까 전장에서는 옆에서 전우가 픽픽 쓰러져 감에도 돌진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진다면 증오심때문일 것입니다.

 

옆에 서 전우가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돌격앞으로!”라고 명령해도 움직이지 않지만 옆에서 죽어가는 전우의 모습을 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증오심이 일어날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이 극에 달했을 때 총알이 빗발쳐도 돌격할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광들은 병사들에게 적개심과 증오심을 북돋아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증오심 없이는 전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원수진 일도 없는 적의 병사를 죽일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전쟁광들에 의해서 벌어진 전쟁에서 스무살 안팍의 젊은이들만 희생됩니다. 유사이래 모든 전쟁은 전쟁광들에 의해 벌어졌습니다. 거기에 스무살 안팍의 젊은이들이 무수하게 스러져 갔습니다.

 

전사자(戰死者)의 천상

 

전쟁광들은 증오심을 부추기면서 전쟁을 독려합니다. 또 한편으로 나라와 부모형제를 위하여 죽은 자에 대하여 추모하는 묘지를 만들어 주고 길이 기억하고자 합니다. 전쟁에서 살아 남은 자들 중에 무공을 세운 자에게는 영웅칭호를 붙여 줍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전쟁의 잔혹함과 참사는 사실상 지옥과 다름 없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는 전쟁의 참혹함과 관련된 경이 있습니다. 촌장상윳따에 전사의 경(Yodhājīvasutta: S42.3)’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어느 촌장이 부처님에게 찾아 왔습니다. 찾아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suta meta bhante pubbakāna ācariyapācariyāna yodhājīvāna bhāsamānāna yo so yodhājīvo sagāme ussahati vāyamati, tamena ussahanna vāyamanna vāyamanta pare hananti pariyāpādenti, so kāyassa bhedā parammaraā sarañjitāna devāna sahavyata upapajjatīti. Idha bhagavā kimāhāti.

 

세존이시여, 저는 전사들의 옛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이와 같이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난다.’라고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 하시겠습니까?”(S42.3, 전재성님역)

 

 

전쟁터에서 대부분을 보낸 촌장은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은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는 것인지 매우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전사자의 하늘이 있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경에서 말하는 전사자의 하늘은 ‘parājitana Devāna이라 합니다.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남에 의해 정복된 자의 하늘이 됩니다. 전쟁으로 죽은 전사자(戰死者)의 천상이라는 뜻입니다. 초불연에서는 패전군이라는 신들의 동료라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the company of the battle-slain devas.”라 했습니다. 전쟁에서 살해된 자들의 신들의 동료라는 뜻입니다.

 

각주에 따르면‘parājitana Devāna라는 말은 미얀마본이라 합니다. PTS본에서는 sarañjitāna devāna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sarañjitā devān’는 환희천을 말합니다. 그러나 전재성님이나 각묵스님, 빅쿠보디 모두 미얀마 판본을 따라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천상으로 번역했습니다.

 

전사자(戰死者)의 지옥

 

증오심 없이는 전쟁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는 없는 적개심과증오심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옆에서 전우가 죽어 갈 때 자연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과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원수를 갚아 주기 위해서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모르고 전쟁에 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 죽어간 자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촌장은 스승의 스승으부터 전쟁에서 죽은 자들은 전사자들만이 간다는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말이 참말인지 알고 싶어서 부처님에게 물어 본 것입니다.

 

부처님은 촌장의 거듭 되는 질문에도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물어 보았을 때는 말해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Yo so gāmai yodhājīvo sagāme ussahati vāyamati, tassa ta citta pubbe hīna dukkaa duppaihita: ime sattā haññantu vā bajajhantu vā ucchijjantu vā vinassantu vā mā vā ahesu iti vāti, tamena ussahanta vāyamanta pare hananti pariyāpādenti, so kāyassa bhedā parammaraā sarañjito nāma nirayo tatthuppajjati.

 

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운다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 그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그곳에서 태어납니다.”(S42.3, 전재성님역)

 

 

촌장은 뜻밖의 말을 듣습니다. 예로부터 전승되어 온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전쟁터에서 죽으면 전사자들만이 간다는 천상에 태어난다고 알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긴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한 말이 충격으로 다가 왔던 것입니다. 전쟁하다 죽은 자는 모조리 지옥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입니다. 전사자의 지옥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전사자의 지옥을 빠알리어로 sarañjito nāma nirayo’라 합니다. 한역으로는 환희지옥이라 합니다. 미얀마본에서는 ‘parājitana nāma niraya’라 되어 있습니다. 전사자의 지옥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PTS본에서는 sarañjita nāma niraya’라 하여 환희지옥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환희지옥이라 했을까요?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아비지옥의 한부분으로 거기서 온갖 종류의 싸움꾼들이 환희하며 괴로워한다.”(Srp.II.103)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치 영화 디어헌터에서 러시안룰렛도박장을 연상케 합니다.

 

전쟁을 부추기는 전쟁광들은 전쟁을 늘 정당화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가족을 위해서 이 한몸 희생할 것을 찬양합니다. 대게 스무살 안팍의 젊은이들이 희생됩니다. 유사이래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혈기가 왕성한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전쟁터로 향했습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주군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서 전사했을 때 전사자들만이 태어난다는 하늘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정반대로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은 전쟁하다 죽으면 지옥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력을 다해서 싸운다면(sagāme ussahati vāyamati)”라는 말로 알 수 있습니다. 전력을 다한다는 것은 죽기살기로 싸운다는 말입니디. 이미 적개심과 증오심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이어지는 문구에서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라는 말로 확인 됩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에서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기 때문에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전쟁에 임하는 것입니다.

 

전쟁광들의 분노로

 

전쟁이 일어나면 전력을 다해서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쟁광들이 전쟁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됩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원인이 되어 온 산을 태워 버리듯이 아주 작은 충돌하나가 대규모 전쟁으로 전개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예를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 세르비아 청년의 한발총성으로 시작 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휴전선이나 연평도에서 일어난 국지전이 통치자의 분노에 따라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총성이 일어나면 서로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인하여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 되고 나서야 멈추게 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전쟁광들의 개입이 있습니다. 대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찌든 자들입니다.

 

수 많은 전쟁영화와 다큐를 보았습니다. 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전쟁광 히틀러에 의해서 말단의 병사들이 징집되어 수도 없이 증오심으로 죽어 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 어디에 가 있을까요? 유튜브에서 본 태평양전쟁 다큐를 보면 일본 합동참모본부라는 괴물이 탐욕으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죽은 자들이 220만명이라 합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모두 전쟁광들이 일으킨 것입니다. 전쟁광들의 분노로 인하여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잘못된 견해(micchādiṭṭhi)

 

말단 소총수들은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상대방과 서로 살육전을 벌였습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죄로 징집되어 희생된 자들은 어디에 태어났을까요? 놀랍게도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모두 전사의 지옥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미 마음이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저열해졌기 때문이라 합니다. 죽는 순간 증오심에 가득한 사악한 그 마음으로 인하여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합니다.

 

촌장의 질문에 부처님은 냉혹하게 답했습니다. 촌장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촌장에서 전쟁하다 죽으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견해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micchādiṭṭhi)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촌장이여, 잘못된 견해를 지닌 사람에게는 지옥이나 축생이나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S42.3) 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사견을 갖는 자는 지옥이나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듣고 촌장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촌장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촌장은 왜 눈물을 흘렸을까요? 이에 대하여 촌장은 오랜 세월 동안 속아 살고 기만당하고 현혹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속았다는 것입니다. 전쟁하다 죽으면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전쟁하다 죽으면 전사자들만이 간다는 지옥에 태어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살생의 죄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촌장은 전쟁터에서 대부분 보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용케 살아 남아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단지 옆에 있는 전우가 죽어간다고 하여 적개심으로 증오심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스승들이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될 것이라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견해는 어쩌면 살인을 정당화 해주는 방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살인에 대한 죄의식은 늘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에 의해서 죄없이 죽어간 자들이 정말 전사자들만이 간다는 천상에 태어난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자신도 죽으면 그곳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정반대로 이야기 했습니다. 이에 촌장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습니다.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 모두 거짓임을 안 것입니다. 그 많은 살생에 대한 죄업을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촌장은 부처님에게 귀의하게 됩니다.

 

촌장은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했습니다. 그리고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촌장은 살생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요? 전사의 경 말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전사 마을의 촌장은 세존 앞에서 허락을 얻어 출가하여 곧바로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구족계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전사 마을의 촌장은 홀로 떨어져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양가의 자제들이 당연히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그 위없는 청정한 삶을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분명히 알았다.”(S42.3, 전재성님역)

 

 

촌장은 부처님에게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죽어서 전사자의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는 꿈을 버렸습니다. 육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죄업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옥에 태어날 것이 명확했던 것입니다. 아마 촌장이 전쟁터에서 칼로서 창으로서 찔러 죽인 자는 부지기수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장면이 종종 떠 올랐을지 모릅니다. 그때 마다 전쟁으로 죽은 자는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죄의식은 어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촌장은 나이가 들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 너무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에게 물어 보자 부처님은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해 말씀해 주었습니다. 이를 진리로 받아 들인 촌장은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자가 된 것입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끌려 와서 뭔 지랄이야

 

드라마 10부작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살아 남은 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디데이 전날 밤 공중에서 강하 되어 적진에 침투한 대원 상당수를 잃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살아 남은 자는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인공 윈터스소령도 살아 남은 자중의 하나입니다.

 

원터스소령은 노르망디에 강하 했을 때 중위이었습니다. 최정예라 불리우는 101공수사단에서 불퇴전의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 수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동시에 수 많은 독일군을 죽였습니다. 전쟁 중에 윈터스는 이 전쟁이 끝나면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전쟁의 잔혹함과 참상을 처절하게 겪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기로에 대한 장면이 여럿 있습니다. 포탄을 맞아 한쪽 다리가 잘려 나간 처차한 광경도 보여 줍니다. 동료가 적의 총탄에 죽어 갈 때 적개심과 증오심이 극에 달합니다. 평화의 시대라면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일대일로 마주쳤을 때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입니다. 원터스 소령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원터스소령은 전장에서 앳된 모습의 독일군과 마주 했습니다. 젊은 군인은 눈빛으로 살려 줄 것을 호소 합니다. 그러나 윈터스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총으로 사살합니다. 이 장면이 드라마에서 여러 번 나옵니다. 아마 회고록에서 자주 언급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윈터스가 전장에서 순진한 젊은 병사를 죽인 것은 평생 뇌리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죽는 순간까지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 왔지만 그의 삶을 지배하는 큰사건이었으리라 봅니다. 그것은 아마 죄책감으로 작용했을지 모릅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 해도 살인을 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드라마에서 병사들은 전쟁에 대하여 염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징집되어 투입된 전쟁에서 상대방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고 옆에서 전우가 죽어 갈 때 지구 반대편에서 끌려 와서 뭔 지랄이야라고 말합니다. 몸과 마음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것입니다. 살아 남았어도 마음은 병들은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전쟁후유증을 겪습니다.

 

할아버지는 전쟁영웅이었나요?”

 

드라마에서 주인공 윈터스소령은 살아 남았습니다. 그리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영화화 되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전쟁고발영화와도 같습니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윈터스는 전장에서 다짐대로 시골에서 평온하게 일생을 살았습니다. 손자가 할아버지는 전쟁영웅이었나요?”라고 묻자 이에 대하여 부인하며 그때 당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 전쟁영웅이란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죽은 자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전쟁영화를 보면 결국 살아 남은 자들이 승리자로 보입니다. 오늘 내일 생사를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 목숨은 하늘에 맡겨 놓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전쟁이 끝나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은 죽는 순간 우주가 파괴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어느 세계에 태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면 전사자의 지옥에 태어났을 것이라 합니다. 이는 업과 업의 작용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전쟁광들의 분노에 따라 죄 없는 스므살 안팍의 젊은이들이 무수하게 희생되어 왔습니다. 멋있는 제복과 공수마크에 대한 환상으로 지원한 젊은이들이 무수하게 스러져 간 것입니다.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 담마위자야(Dhammavijaya)

 

전쟁없는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에도 전쟁광들은 어떤 탐욕을 부리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분노하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국지전이 전면전이 되는 것은 우발적 사건에 기인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파괴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지옥문이 열립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이 전쟁없는 세상을 만듭니다. 그래서 한때 정복왕이었던 아소까 대왕은 깔링가 전투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정복전쟁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대신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여 담마에 의한 세계정복에 나섰습니다. 담마위자야(Dhammavijaya)입니다. 그래서 “담마에 의한 정복만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행복을 가져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전역에 부처님 가르침을 비문으로 새겨 놓았습니다.

 

 

그는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폭력이 없고 약탈이 없고 가시덤불이 없는,

번영하고 풍요하고 안온하고 평온하고

위해가 없는 대륙을 다스리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한다.”(D30)

 

 

2017-02-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