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식욕과 성욕은 근본적 욕망이다. 대부분 이 욕망에 이끌려 한평생 살아가게 된다. 매주 화요일 저녁 종로3가에 있는 수행처로 향한다. 종로3가 지하철역 화장실에 가면 소변기 위에 명함을 볼 수 있다. 종로3가에 오는 노인들을 대상으로한 비아그라와 같은 약품에 대한 광고이다. 성욕은 나이와 무관함을 말한다. 나이들어 기능이 약화 되었음에도 약의 힘을 빌고자 하는 심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살아 가면서 알아야 될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이 있다. 알아야 될 것이라면 알아야 된다. 그런데 몰라도 되는 것을 굳이 알려고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웅스님법문에서
스님들도 성적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출가한 수행자에게서 성적욕망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육조사 현웅스님의 유튜브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은 법문 (2016년 10월 23일 일요법회 법문) 에서 “어릴 때 들어 온 사람들이 아주 궁금하거든. 도인 되어도 그렇다는 거여.”라고 말했다. 동진출가한 스님들을 말한다. 효봉스님처럼 결혼도 하고 판사도 하며 다 경험하고 들어 온 스님들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타의로 또는 생계로 어린 나이에 들어 온 스님들은 성적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말한다.
현웅스님은 J선사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J선사는 어려서 계모 밑에서 살았다. 어린 나이에 살 수 없어서 절에 들어 갔다고 한다. J선사가 나이 23세에 견성을 했지만 한 가지 해결 되지 않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성에 대한 것이다.
J선사가 화엄사에 있었을 때 기생들이 찾아 왔다고 한다. 기생들은 손님들을 상대하고, 스님들은 신도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삶의 방식이 비슷하다고 했다. 스님들은 법으로 상대하고 기생들은 몸으로 상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J선사는 어려서 절에 들어와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기생에게 “요 만큼만 보여 줄 수 없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기생들도 외로우니까 부처님을 좋아 하여 절에 온 것이다. 스님이 요청하자 기생은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있는가?”라며 광주로 초대했다고 한다. 기생오야붕이 대접했는데 “워매, 이 잡놈 봐라.”라 했다고 한다. 너무 능숙했기 때문이라 한다. 분명한 사실은 J선사가 그렇게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견성을 했어도 욕망의 뿌리가 뽑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몰라도 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으로 아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스님에 따르면 S스님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한국을 대표 하는 S스님에 대하여“S스님이 대구파계사에서 토굴에 살다가 어느 신도님 딸을 그냥 순간에 저질러 버린거에요. 거기서 못 살고 도망나온 것이 문경 김용사에요.”라 했다. S스님이 젊었을 때 일이라 한다.
S스님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 이야기이다. 아마 선가에서는 회자되는 이야기라 본다. 공부를 하다 보면 식이 맑아져서 모두가 천사처럼 보인다는데 한순간 욕정이 발동하여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더구나 S스님은 속가에 딸까지 있었다고 한다. 토굴생활을 하며 정진했건만 한순간에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욕망의 뿌리가 뽑히지 않은 것이다. 더 큰 가르침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삼사라에서
불교에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욕망은 뿌리가 깊은 것이다. 오온을 형성하고 있는 이 몸 자체가 욕망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욕망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 욕계를 벗어 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있다.
사마타는 욕망을 억누르는 수행이고 위빠사나는 욕망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수행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견성을 했어도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욕망의 뿌리를 뽑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마타수행을 했어도 억눌려 있던 욕망이 조건을 만나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업을 짓고 만다. 이는 영화 ‘삼사라’에서도 볼 수 있다.
티벳불교영화 ‘삼사라’가 있다. 티벳승려의 환속과 재출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에 대하여 ‘삼사라(samsara), 물 한 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면(2009-04-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사를 발견했다. 그것은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될 것도 있지만...포기 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죠.”라는 말이다.
영화속의 스님은 삼년 동안 명상수행을 했지만 한 여인을 보고서 마음이 흔들렸다. 영화속의 스님은 다섯 살 때 절에 맡겨져 절에서 성장했다. 삼년 동안 동굴에서 명상수행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어느 것에도 걸림 없는 대자유는 오지 않은 것이다. 여인으로 인하여 마음의 번뇌만 쌓여 갈 뿐이었다. 그래서 은사스님에게 깨달음을 위하여 알아야 될 것도 있다면서 환속을 하게 된다.
영화속 스님은 환속해서 여인을 만나 아들을 낳고 농부로 살아 간다. 욕망으로 가득한 생활이다. 그러다 보니 범부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 어느 날 은사스님이 임종하게 되었는데 다시 발심출가하게 된다. 재출가한 것이다.
삼사라(2001)
영화속의 스님은 “깨우치기 위하여 몰라야 될 것도 있지만, 포기 하기 위하여 알아 둘 것도 있다.”며 환속했다.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몰라도 되는 것을 알았을 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영화속의 티벳스님은 다시 재출가하게 된다. 그런데 그에게는 딸린 처자식이 있었다. 마치 부처님이 야소다라와 라훌라를 남겨 놓고 출가했듯이 재출가한 것이다. 부처님을 따라 한 것일까?
자발적 출가의 경우
영화속의 스님은 두 번 출가했다. 다섯 살 때 절에 맡겨 진 것이 첫 번째 출가라면, 환속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출가한 것이 두 번째 출가이다. 첫 번째 출가는 타인의 의한 것이지만, 두 번째 출가는 자발적인 것이다. 동진출가하여 토굴에서 3년 동안 명상수행을 했지만 욕망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환속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자발적 출가의 경우 어느 정도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부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감미롭고 즐거운 다양한 감각적 쾌락이
여러 가지 형색으로 마음을 교란시키니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M82)
랏타빨라는 장자의 아들로 이미 여러 명의 처를 두고 있었다. 어느 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청정한 삶을 동경하여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가한 것이다. 게송에서는 출가이유로서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는 것’이라 했다.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네 가지 진리라 하여 1)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 2)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 3)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4)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라 하여 출가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욕망을 욕망으로?
세상을 살다 보면 몰라도 될 것도 있고 반면에 알아야 될 것도 있다. 영화속 스님은 몰라도 되는 것에 대하여 ‘알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하며 환속했다. 깨달음을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이 있음을 말한다. 스님은 환속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알아야 할 것을 알기 위함이다. 과연 무엇을 알았을까? 몰라도 되는 것을 굳이 알게 되었을 때 “뭐, 별거 아니네”라 하여 욕망으로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견성한 선사들도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듯 하다. 선사들의 기행담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견성 이후에 수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전문기자의 책에 따르면 “1970-80년대 서울역 앞 양동 홍등가 지역을 급습해보면 방에서 나오는 사람 반이 승려였다고 한다.”(신앙지옥 불신천국)라 했다. 스님은 그곳에서 가장 환영받는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기자는 아마 수계받지 않은 땡중이었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현웅스님의 유튜브 법문을 들어 보면 불자들에게 존경 받는 선사들도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식욕과 성욕은 근본욕망
식욕과 성욕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 욕구이다. 식욕이 있기 때문에 이 몸이 지탱할 수 있고, 성욕이 있기 때문에 자손을 남길 수 있다. 그런데 식욕과 성욕은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물은 하루 종일 먹이를 찾아 다니고 틈만 나면 먹는다. 발정기가 되면 짝짓기를 하여 자손을 남긴다. 이런 면에 있어서 인간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인간도 끊임 없이 먹는다. 삼시 세끼를 먹고 그 중간에도 먹는다. 그런데 동물의 발정기와 달리 인간의 성욕은 시도 때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식욕과 성욕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아(無我)가 되었을 때
불교는 욕망에서 떠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타종교의 경우 욕망충족을 목표로 하는 것과 대조된다. 욕망에서 떠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아(無我)’가 되는 것 밖에 없다. 무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모든 불교수행의 목적은 무아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된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S22.15)
오온 중에 물질에 대한 것이다. 물질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최종적으로 무아를 말씀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라고 했다. 이것이 불교수행이다.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마찬가지이다.
깨달음을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은 무상, 고, 무아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무아이다. 몸이나 느낌, 지각, 의도, 마음 등이 나의 것이라 했을 때 자아개념이 생겨난다. 욕망도 자아에 기반한다. 무아라면 욕망이 생겨날 리 없다. 어느 선사가 “여자는 여자로 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무아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만일 유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자가 감각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욕망은 자아에 기반해서 발생되기 때문이다.
고귀한 사마타
영화 삼사라에서 스님은 삼년동안 토굴에서 명상수행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사들이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처럼 욕망에 굴복했다. 깨달음을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알아야 할 것이란 무아에 기반한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마타수행이 있다. 대상에 집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마타수행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책을 읽는 것도 집중이고 뜨개질 하는 것도 집중이다. 심지어 도둑질 하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집중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8만4천 가지나 되는 집중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40가지로 압축했다. 이를 ‘고귀한 사마타’라 한다. 왜 고귀한가? 해탈과 열반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고귀한 사마타 40가지가 소개 되어 있다. 40가지 명상주제 중에 자신의 기질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면 부정관을 닦아야 한다. 성내는 기질이 강하면 자애관을 닦아야 한다. 그런데 40가지 사마타명상주제 중에 ‘음식에 혐오하는 수행’이 있다.
음식에 대한 혐오수행
사마타명상주제에 음식을 혐오 하는 수행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요즘 ‘먹방’이라 음식을 즐기는 프로가 많다.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 다니며 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음식을 혐오하는 수행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욕과 함께 식욕이 인간의 근본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본적 욕망을 혐오하는 수행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은 이 몸을 지탱해 준다. 동시에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단지 먹는 것만 음식이 아니다. 촉식, 의사식, 식식이라 하여 먹는 것과 함께 네 가지 음식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면 네 가지 음식에 대하여 “먹는 음식은 영양소를 여덟 번째로 하는 여덟 가지 물질을 가져온다. 감각접촉의 음식은 세 가지 느낌을 가져온다. 마음속 의도의 음식은 세 가지 존재(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재생연결을 가져온다. 알음알이의 음식은 재생연결의 순간에 정신 ․ 물질을 가져온다.” (Vism.11.1)라고 설명하고 있다.
네 가지 음식 중에 먹는 음식에 대한 혐오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열 가지 혐오중에 세 번째 항을 보면 “개밥그릇에 토해낸 것처럼”이라는 말이 있다. 음식을 입에 넣고 이빨로 이기고 침으로 적신 것을 말한다. 보기에 예술작품 같은 음식도 입안에 들어가서 씹으면 비벼져서 혼합물이 된다. 그것을 내 뱉었을 때 개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개밥그릇에 토해낸 것처럼’이라 했다. 음식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이런 게송이 있다.
“맛난 음식, 마실 것,
딱딱한 음식, 부드러운 음식이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서
아홉 문으로 배출된다.
맛난 음식, 마실 것,
딱딱한 음식, 부드러운 음식을
여러 친지들과 함께 먹지만
배출할 때는 숨어서 한다.
맛난 음식, 마실 것,
딱딱한 음식, 부드러운 음식을
즐기면서 먹지만
배출할 때에는 혐오스러워한다.
맛난 음식, 마실 것,
딱딱한 음식, 부드러운 음식은
하룻밤이 지나면
모두 썩어버린다.” (Vism.11.23)
욕망의 뿌리를 뽑으려면
사마타와 함께 위빠사나를 닦아야 한다. 사마타는 번뇌를 억누르지만 위빠사나는 번뇌의 뿌리를 뽑아 버린다. 한국불교에서 간화선은 사마타라 한다. 그래서일까 삼매에 들었을 때 청정할지 모르지만 경계를 만나면 무너지고 만다. 선사들이 토굴에서 정진하여 식이 맑아졌지만 여인을 보고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도 욕망의 뿌리를 뽑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마타와 함께 위빠사나도 함께 닦아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키워드는 항상 ‘무아’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대상에 대하여 집중하면 사마타이고, 대상을 관찰하면 위빠사나이다. 대상에 대하여 생멸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온에 대한 관찰이다.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오온의 생멸현상을 무상, 고, 무아로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든 나타나는 대로 ‘신-수-심-법’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좌선 중에 다리가 저리면 몸에 대한 관찰이고, 아프면 느낌에 대한 관찰이고, 아픈 마음을 아는 것은 마음에 대한 관찰이고, 그 마음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고 아는 것은 법에 댜한 관찰이다. 이렇게 관찰 했을 때 어느 것 하나 집착할 것이 없다.
매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보이는 것,들리는 것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하여 인식되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단지 “보임, 보임..” “들림, 들림..” “냄새, 냄새..” “맛, 맛..” “닿음, 닿음..” “인식, 인식..”하며 알아차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명칭을 붙여 알아차리지만 익숙하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욕망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
수행의 목적은 탐, 진, 치를 소멸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다.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무아이어야 한다. 오온이 내 것이라는 자아개념이 남아 있다면 욕계를 벗어날 수 없다. 영화속의 티벳승려가 깨달음을 위하여 몰라도 될 것이 있지만, 깨달음을 위하여 알아야 될 것이 있다라며 환속한 것은 욕망 때문이다. 동진출가한 스님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며 욕망을 욕망으로써 물리치고자 하는 것도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는 자아관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이 있다. ‘이 세상에 도가 있다’고 하여, ‘이 세상을 다 알아야 한다’거나 ‘이 세상을 다 경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은 욕망에 따른 것이다. 몰라도 되는 것을 굳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몰라도 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 하여 “뭐, 별거 아니네.”라고 하면 그만일까? 그렇다면 진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M92)
2016-10-2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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