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무, 홍가시나무, 야자수, 제주 약천사에서 본 것들
제주성지순례팀은 산방산 산방사와 보문사 순례를 마치고 두 번째 순례지 약천사로 향했다. 산방산에서 약천사까지는 약 14키로미터 거리로서 약 20여분 가량 걸렸다.
“먼나무가 뭐에요?”
4월 23일 토요일 오전 우중에 버스운전기사겸 가이드는 한손에 마이크를 들고 주변풍광에 대해 설명했다. 육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나무가 있는데 그것은 ‘먼나무’이다. 빨간열매를 특징으로 한다. 특히 겨울에 열매가 열리는데 잎파리 없이 빨간열매만 있어서 매우 독특한 나무라 볼 수 있다.
먼나무는 어떤 것일까? 누군가 “저 나무는 무슨 나무에요?”라고 물어 보았을 때 ‘먼나무’라 하면 곧이 듣지 않는다. 그럴 경우 “먼나무가 뭐에요?”라고 되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먼나무는 분명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매우 특이하고 별난나무이다.
먼나무는 제주도에서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특히 서귀포에서 볼 수 있다. 운전기사겸 가이드에 따르면 서귀포시장이 벚꽃나무를 베어 나고 그 자리에 먼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산방사에 약천사 가는 길 가로수가 먼나무 일색이다.
먼나무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감탕나무과로서 학명은 ‘Ilex rotunda’이다. 천지연 안내판을 보니 영어로 ‘Rotunda Holly’이고, 중국명은 ‘철동청(鐵冬靑)’, 일본어는 ‘구로가네모치’, 제주방명은 ‘먹낭’이다.
먼나무는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 10월부터 이듬해 꽃소식이 전해질 때 까지 콩알만한 빨간열매를 가득 달고 있다. 빨간 열매는 ‘사랑의 열매’라 한다. 연말 불우이웃돕기 할 때 사랑의 열매가 바로 먼나무열매인 것이다.
붉게 타오르는 홍가시나무
제주도는 육지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식물로 가득하다. 남국 특유의 윤기나는 활엽수를 특징으로 한다. 가이드에 따르면 제주를 대표하는 식물중의 하나가 ‘홍가시나무’이다. 먼나무와 함께 빨간 것이 특징이다. 먼나무가 빨간열매라면 홍가시나무는 붉은 잎파리이다. 그래서 제주의 전통가옥에서는 먼나무와 홍가시나무가 있으면 마치 붉게 타오르듯 한다는 것이다.
홍가시나무는 서귀포일원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약천사에서도 홍가시나무로 둘러 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록의 새순이 돋는 생명의 계절에 약천사는 붉게 타고 있었다.
약천사는 이국적
약천사는 이국적이다. 육지에서 볼 수 없는 야자나무와 붉은 홍가시나무, 그리고 거대한 3층 구조의 전각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마치 스케일이 장대한 중국의 절을 보는 듯 하다.
약천사는 어떤 절일까? 창건연대는 1918년까지 거슬러 올라 가지만 1981년에 새로 지어졌다. 1996년에 낙성하였는데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어서일까 그때부터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2009년에는 전통사찰로 지정 받았다.
약천사에는 수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 특히 단체중국관광객들이 많다. 이런 현상은 제주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다. ‘물반고기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거의 중국인들이 반이다. 때로 중국인들이 더 많기도 하다. 제주도 전체가 중국인들의 관광코스가 된 듯한 느낌이다.
거대한 야자수를 보면
약천사를 보면 중국무협영화에서나 나올 법하다. 거대한 전각과 붉은 홍가시나무, 그리고 야자수가 특징이다. 특히 도열해 있는 듯한 거대한 야자수를 보면 확실히 다른 나라에 와 있는 듯 하다.
한국에서의 사찰은 낙락장송이 연상되지만 아열대지방에서는 야자수가 대신한다. 열지어 죽죽 벋은 야자수의 가로수를 보면 보기에도 시원하다. 불교에서 야자수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실체없음에 대하여
초기경전에 오온에 대한 게송이 있다. 부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다섯 가지 다발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heṇapiṇḍūpamaṃ rūpaṃ
vedanā bubbuḷupamā
Maricikupamā saññā
saṃkhārā kadalūpamā,
Māyūpamañca viññāṇaṃ
dīpitādiccabandhunā.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S22.95, 전재성님역)
물질을 포말로 비유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포말 같은 것이어서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몸이 나의 것이라고 애착이나 집착을 가질 것이 없다고 했다. 정신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정신에 대하여 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 나누었는데 각각 물거품, 아지랑이, 파초, 환술로 비유하였다. 느낌이나 지각 등 마음의 작용이 내것이 아님을 말한다.
게송에서 형성(saṃkhārā)에 대하여 파초와 같다고 했다. 여기서 형성이란 52가지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그렇다면 형성에 대하여 왜 파초와 같다고 했을까? 이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견고한 나무심을 바라고, 견고한 나무심을 구하고, 견고한 나무심을 찾아다니며 날카로운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들어가 거기서 새로 자라 속대도 없는 높고 커다란 파초를 보고 그 뿌리를 자르는데, 뿌리를 자르고 나서 꼭대기를 자르고 껍데기를 벗겨낸다고 하자. 그는 거기서 나무껍질도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나무심을 얻을 수 있겠는가?”(S22.95) 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파초(kadalī)와 야자수(tāla)는 다르다
파초는 껍질로 되어 있어서 목재로 사용할 수 없다. 마치 양파껍질 까듯이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면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껍질은 52가지 마음의 작용을 뜻한다. 형성된 것들이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초불연 각묵스님은 파초를 뜻하는 빠알리어 까달리(kadalī)에 대하여 야자나무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심리현상들은 야자나무와 같으며”(S22.95) 라 했다. 야자나무는 속이 비어 있을까?
초불연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야자나무에 대하여 “이것은 야자수 나무의 껍질이 시멘트 같이 생겨서 두껍지만 내부가 비어 있는 것을 말한다.”(초불연 상윳따1권 346번 각주) 라고 각주 하였다. 까달리에 대하여 야자나무라 한 것은 오역이기 쉽다. 까달리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the plantain tree; a banner’라 설명 되어 있다. 까달리는 코코넛열매를 가진 야자수와 다른 것이다.
빅쿠보디는 “saṃkhārā kadalūpamā”에 대하여 “Volitions like a plantain trunk”라 번역했다. 여기서 ‘a plantain trunk’는 ‘plantain tree’를 말한다. Plantain에 대한 설명을 보면 “a banana tree bearing hanging clusters of edible angular greenish starchy fruits”라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어 까달리는 바나나나무임에 틀림 없다. 다년생 풀로서 열매를 맺고 나면 죽는 식물을 말한다. 까달리가 바나나나무라면, 야자수는 빠알리어로 무엇일까? 맛지마니까야에서 이런 구절이 있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ukkhittapaligho hoti? Idha bhikkhave bhikkhuno avijjā pahīnā hoti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1 anabhāvakatā2 āyatiṃ anuppādadhammā.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ukkhittapaligho hoti.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수행승이 빗장을 밀어올린 자인가? 수행승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은 무명을 버리고, 뿌리를 끊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 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수행승이 빗장을 밀어올린 자이다.” (M22, 전재성님역)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에서 부처님은 해탈한 자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종려나무의 뿌리가 뽑힌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뿌리가 뽑아져 줄기만 남았을 때 어떻게 될까? 시들어 말라 죽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명과 갈애를 끊어 버렸을 때 다시 태어남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번역에서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라는 말은 ‘tālāvatthukatā’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rendered groundless; uprooted’의 뜻이다. 일본어 사전을 보면 “[tāla-avatthu-kata] 多羅の(切られて)基礎なくされたる, 本を失える多羅樹の如く”라 되어 있다.
tālāvatthukatā는 ‘tāla-avatthu-kata’의 복합어 형태이다. 여기서 딸라(tāla)라는 말이 있다. 딸라에 대한 사전을 보면 “[nt.] a flat surface; level ground; a base; a flat roof; a stage; the blade of a weapon; the palm or sole.”라 되어 있다. 야자수 (the palm)를 말한다. 종려나무도 야자수의 한종류에 해당된다. 딸라는 파초나 바나나나무를 뜻하는 까달리와는 다른 것이다.
Tālāvatthukatā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만들고”(M22)라 번역했다. 이는 포말의 경에서 “심리현상들은 야자나무와 같으며(saṃkhārā kadalūpamā)”(S22.95) 라 했다. 파초 또는 바나나를 뜻하는 까달리와 야자수를 뜻하는 딸라에 대하여 모두 야자나무라 한 것이다. 초불연 번역서에서 까달리를 야자나무라 한 것은 명백한 오역이라 보여진다. 빅쿠보디는 “made it like a palm stump”라 하여 야자수(palm)라 번역했다.
파초와 야자수의 비유로써
파초와 야자수는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파초를 뜻하는 까달리에 대하여 “형성은 파초와 같고”라 하여 마음의 작용이 실체가 없음을 말씀 하셨다. 또 야자수를 뜻하는 딸라에 대하여 “뿌리를 끊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만들고”라 하여 무명을 뿌리 뽑을 것을 말씀 하셨다. 이렇게 부처님은 파초와 야자수(종려나무)에 대하여 비유로서 가르침을 주셨다. 약천사에서 이국적인 야자수를 보고서 부처님 말씀을 떠 올려 보았다.
2016-04-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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