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측은지심(惻隱之心)
도선사마애불을 보고
도선사에 가면 마애불이 있다. 이를 도선사석불이라 한다. 처음 이 불상을 보았을 때 ‘울컥’했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하기 전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을 때이다.
북한산 등산을 마치고 내려 오는 길에 들른 도선사에서 마애불을 접하였을 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 그 때 당시 처지를 비관하였기 때문이다. 마애불을 보는 순간 마치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듯 측은한 눈으로 바라 보고 있었다.
이 마애불에 대한 이야기를 “도선사 석불(石佛), 그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2007-10-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2007년 당시 올린 글에서 마애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석불의 상호에서 보는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천년전에도 생노병사로 고통속에 헤매다 간 사람이 있었듯이 역시 천년후에도 생노병사의 화두를 안고 살아 가는 사람들을 말 없이 바라 보고 있다. 그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은 앞으로 천년도 더 넘게 중생을 바라 보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이곳 참회도량에서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석불을 바라보면서 참회의 절을 계속 하고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진흙속의연꽃, 도선사 석불(石佛), 그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 2007-10-11)
9년 전 올린 글에서 마애불에 대하여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이라 했다. 실제로 마애불을 보면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중생들이 겪는 고통에 대하여 연민의 눈으로 바라 보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 한다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된다.
절에 가면 여러 가지 형상을 한 불상을 볼 수 있다. 명상속의 부처님상도 있고 눈을 반개한 불상도 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애로운 부처님상도 있다. 또한 화려한 보관과 천의, 그리고 진귀한 목걸이를 한 보살상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쓰러운 모습의 불상을 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도선사 마애불은 매우 독특한 것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측은지심이란 무엇일까? 단지 불쌍해 보이는 마음일까? 사전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本性)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이른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측은지심이란 인간의 본성으로서 불행한 자에 대하여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라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행복과 불행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지금 행복하지만 어느 순간 불행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지금 불행한자는 이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사람 사는 곳에서 행복과 불행만 다반사로 일어날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행불을 포함하여 여덟 가지가 다반사로 일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재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재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A8.6) 라고 말씀 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행복과 불행이 번갈아 일어나고, 또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로 살아간다. 이것이 뭇삶들의 모습이다.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이런 모습을 보았을 때 측은지심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도선언을 했다.
부처님의 전도선언문을 보면 “세상을 불쌍히 여겨(lokānukampāya)”(S4.5) 라는 말을 볼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뭇삶들이 한 없이 측은하게 보인 것이다. 이는 “그때 세존께서는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S6.1) 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다양한 중생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알려 주고자 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대승보살사상이라 본다.
부처님은 세상사람들을 불쌍하게 보았다. 그래서 진리를 알려 주고자 했다. 제자가 60명 가량 되었을 때 전도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부처님은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 고 했다. 여기서 안락은 ‘수카(sukha)’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행복’이라 말한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
부처님은 고통 받는 자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세세생생 윤회하며 사는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란 것이다. 이는 사함빠띠가 부처님에게 “과거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미래의 올바로 깨달은 님, 현재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수 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없애주네.”(S6.2) 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슬픔을 없애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한분만 출현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무수한 부처님이 출현하였다. 경전에서는 디빵까라붓다(연등불)이후 고따마붓다에 이르기 까지 과고 25불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여기서 연등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이 보살로서 삶을 살 때 수기를 준 부처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옛날의 부처님은 ‘과거칠불(過去七佛)’이다.
디가니까야와 상윳따니까야에 과거 일곱 분의 부처님 이야기가 있다. 이를 과거칠불이라 하는데 이는 위빠시(Vipassī, 91겁전)붓다, 시키(Sikhī, 31겁전)붓다, 웻사부(Vessabhū, 31겁전)붓다, 까꾸산다(Kakusandha, 현겁)붓다, 꼬나가마나(Koṇāgamana, 현겁) 붓다, 깟사빠(Kassapa, 현겁) 붓다, 고따마(Gautama, 현겁) 붓다 이렇게 일곱분의 과거 부처님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붓다가 출현 하는 것일까? 붓다가 출현하여 다시 법을 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연기법이 변질되어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연기법은 붓다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보편적 원리로 이미 확정 되어 있는 것이다.
보편적 원리인 연기법이 제대로 전승 되었다면 또 다시 붓다가 출현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붓다가 출현한다는 것은 과거 붓다가 깨달았던 진리가 더 이상 전승되지 않고 도중에 끊어진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의 실종이다. 연기법이 변질 되어 사라진 것이다.
붓다가 출현하여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극히 짧다고 한다. 공백기간은 한량없이 길고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짧기 때문에 영겁의 시간속에서 본다면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하나의 깜박임에 지나지 않는다.
정법이 사라진 후 암흑과 같은 한량 없은 오랜 시간 후에 마침내 붓다가 출현한다. 과거 붓다가 발견하였던 똑 같은 방법으로 연기법을 발견한다. 그리고 법을 펴고 그 법은 전승된다. 그러다가 연기법이 변질된다. 변질된 법은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다음 붓다가 출현 할 때 까지 암흑의 시대가 계속된다. 이러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붓다가 출현한다. 마치 맹구우목의 비유처럼 붓다가 출현하는 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라 한다.
청정한 삶(brahmacariya)
과거의 부처님들이 한결 같이 말한 것이 있다. 이를 칠불통계게 한다. 이는 법구경에서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 (Dhp183) 라고 표현 되어 있다. 착하고 건전하게 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정한 삶은 전도선언문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S4.5) 로 표현된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삶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청정한 삶으로 귀결된다. 청정한 삶이야말로 모든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과거 출현한 부처님들이 한결 같이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Dhp183) 이라 했고, 또 “수 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없애주네” (S6.2) 라 했다.
최상자로서 부처님
부처님은 괴로움과 슬픔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여 ‘불사(不死)’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탄생게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의 탄생게와 북방대승불교의 탄생게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다른가?
우리나라 불자치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풀이 하면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 구절이 더 있다. 이는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문구이다. 이 말은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한자어 ‘안(安)’자를 행복이라 번역할 수 있다.
대승의 탄생게를 보면 초월적이고 신격화된 부처님을 연상케 한다. 세상의 구원자로서의 이미지이다. 이는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문구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빠알리 탄생게를 보면 이와 다르다. 디가니까야에 실려 있는 탄생게를 보면 다음과 같다.
Dhammatā esā bhikkhave. Sampatijāto bodhisatto samehi pādehi patiṭṭhahitvā uttarābhimukho1 satta padavītihāre gacchati setamhi chatte anuhīramāne , sabbā ca disā anuviloketi , āsahiñca vācambhāsati: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Ayamettha dhammat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원리가 있다.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단단하게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북쪽으로 일곱 발을 내딛고 흰 양산에 둘러싸여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이 경우의 원리인 것이다.
(Mahāpadāna Sutta-비유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4, 전재성님역)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최상자로서 당당한 사자후를 볼 수 있다. 비록 신화적이지만 태어나자 마자 일곱 걸음을 떼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처럼 최상자로서 부처님은 율장 ‘웨란자의 이야기’에서 “바라문이여,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A8.11) 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부처님은 태어나자 최상자라 선언했다.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예견한 것이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정등각자로서 부처님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스승이 없다고 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나서 오비구를 찾아 나설 때 우빠까에게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M26)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정득각자로서 부처님에게 스승은 없다. 그래서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고 천상과 인간의 세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네.” (M26) 라 했다. 이처럼 최상자로서 부처님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라고 일곱 걸음을 떼자 마자 당당하게 선언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은 최상자로서 부처님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
대승에서 최상자로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말하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구는 ‘삼계개고아당안지’라 하여 빠알리탄생게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되어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바로 이런 차이가 대승과 테라와다를 분명하게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한 듯 하다.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아라한송으로 되어 있다. 청정한 삶을 실천하여 마침내 모든 오염원이 소멸 되어 있을 때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 때 스스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문은 정형구로서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돤더.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될 것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이를 아라한의 오도송, 또는 아라한송이라 한다.
최상자로서 부처님이 이땅에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승탄생게처럼 모든 중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매우 구체적이다. 그것은 해탈과 열반이다. 오온이 생멸하는 윤회의 삶에서 해탈과 열반의 불사의 삶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측은지심의 도선사마애불
가장 큰 어른으로서 부처님은 자비롭다.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관용과 자애와 지혜뿐이다.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았을 때 욕망으로 분노로 어리석음으로 살아 가는 뭇삶의 모습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도선사 마애불의 모습을 보면 형용할 수 없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으로 살아 간다.욕망과 분노의 어리석음의 삶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괴로움과 슬픔을 겪는다. 과거 뭇삶도 그랬고 현재 뭇삶도 그렇고 미래 뭇삶도 그럴 것이다. 이런 삶의 모습을 알기에 부처님은 전도선언을 했다. 그런 부처님의 마음이 잘 표현 된 것이 도선사마애불이라 본다.
도선사마애불을 보면 형용할 수 없는 안쓰러운 표정이다. 그래서일까 삶에 지친자들이 오늘도 내일도 그곳에 앉아 기도를 한다. 그런 도선사마애불은 뭇삶에 대한 측은지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 도선사마애불을 처음 보았을 때 울컥 했다.
2016-05-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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