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잘 자려거든
세상이 시시껄렁해 보일 때
TV에서 두릅을 채취하는 젊은 부부를 보았다. 시골에 들어가 두릅 등 특수작물을 일구며 살아 가는 젊은 부부는 함께 일한다. 남자가 전지용 가위로 두릅 밑둥을 자르면 여자는 바구니에 담는다. 한 바구니 채취한 부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산에서 내려 온다.
투기를 일삼는 자가 두릅채취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양이 차지 않을 것이다.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아마 시간과 정력의 낭비라 볼 것이다. 그 시간에 주식이나 부동산 등 한탕을 하면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돈을 벌 수 있는데 굳이 힘들게 농산물 채취하는 것이 시시껄렁하게 보일지 모른다.
오래 전 군대에 있었을 때이다. 철조망 건너 마을로 5분대기조 순찰을 갔었다. 어느 농부가 낫을 갈고 있었다. 칼을 가는 돌에 낫을 한참 가는 것이었다. 참으로 무의미한 짓으로 보였다. 낫을 간다고 하여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정성들여 그것도 한참 가는 것이 시시껄렁해 보였다.
추수가 끝난 논에 어느 여인이 허리를 숙이고 비질을 하고 있었다. 역시 군대시절의 이야기이다. 나이 든 여인은 왜 논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 논을 비로 쓴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이해 할 수 없다. 자세히 보니 여인은 떨어진 벼이삭을 모으는 것이었다.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교만한 자들
모든 것이 심드렁해 보일 때가 있다. 잘 나갈 때이다. 연봉이 많은 자가 두릎채취하는 부부를 보았을 때 안쓰로운 눈으로 볼 것이다. 임대소득 등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는 자가 낫을 간다든가 벼이삭을 줍는 행위를 보면 한심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조폭이 노점상을 보면 참 힘들게 산다고 여길지 모른다. 이는 부의 교만이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늙은 사람을 보고 착잡해 할지 모른다. 10대나 20대의 젊은이가 나이 40대나 50대를 보면 한숨을 푹 쉴지 모른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신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작가는 나이가 40이상 되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는 젊음의 교만이다.
20대나 30대의 나이는 빛나는 시절이다. 피어나는 꽃처럼 젊음이 넘쳐 흐른다. 아무 옷이나 걸쳐도 잘 어울린다. 어떤 것을 먹어도 소화를 잘 시킨다. 언제나 활력이 넘치고 언제나 건강하다. 병이 든 자나 노인을 보면 기분이 언짢아 진다. 이는 건강의 교만이다.
돈이 많거나 젊거나 건강하면 교만해지기 쉽다. 불로소득으로 돈을 번 부자는 가난한 자를 보면 연민의 감정도 느끼지만 동시에 게으름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 하는 것이다. 나이가 젊은 자는 노인 보기를 벌레 보듯 한다. 냄새 난다고 하여 가까이 가지 않는다. 건강한 자에 있어서 중환자실은 남의 일처럼 보인다. 이렇게 사람이 교만에 빠지면 어떤 일이 날까? 결국 악행을 저지르게 되어 있다. 그런 악행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악행이다.
왜 힘들게 글쓰기 하느냐고
돈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 자는 돈에 종속된 자이다. 돈에 종속되면 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돈을 가장 우선 순위로 하는 자에게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심드렁할 뿐이다.
언젠가 어떤 이가 물었다. 힘들게 글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돈도 안되는 글쓰기를 10년 째 하고 있다. 하루 일과의 반은 글쓰기로 보낸다. 그렇다고 책을 내는 것도 아니고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블로그에 올리기 위한 글이다. 이렇게 하루 일과 중의 절반을 글쓰기에 올인 하는 삶에 대하여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하는 자들은 글쓰기를 이해 하지 못한다. 시간낭비로 보는 것이다. 돈도 안되는 글쓰기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쓸데 없는 짓’ 심지어 ‘미친 짓’인 것이다. 글쓰기가 정말 미친 짓일까?
글쓰기가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당구를 치거나 테니스를 치거나 바둑을 두는 것과 똑같다. 운동을 위하여 테니스 치는 것에 대하여 미친짓이라 하지 않는다. 취미생활 하는 것에 대하여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글쓰기에 대하여 시간낭비로 보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모든 취미가 그렇듯이 좋아서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좋아서 하면 재미가 있다. 재미가 있기 때문에 자꾸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돈버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돈을 버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잘 벌 수 있을까’하며 연구한다. 돈이 굴로 들어 왔을 때, 통장에 잔고가 차곡차곡 쌓일 때 쾌감을 느낄지 모른다. 취미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몰두하여 이루어냈을 때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돈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성취감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글을 쓰고 나면 강렬한 성취감을 느낀다. 장시간 작성한 글이 완성되었을 때 희열이 일어난다. 인터넷에 올리고 나면 해야 할 일을 다한 듯 하다. 바로 이런 맛에 글을 쓰는 것이다. 이런 글쓰기의 쾌감, 희열, 성취감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교만을 극복하려면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세상에서 일상의 사소한 행위는 무의미하고 심드렁하고 시시껄렁한 것이다. 불로소득으로 살아가는 부자에게 있어서 힘들여 노력하여 이룩해 낸 성과는 평가절하 되는 경향이 있다. 크고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만이 의미가 있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결국 부자의 교만, 가진 자의 교만, 돈의 교만으로 귀결된다.
지금 돈이 있다고 하여 그 돈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그 건강이 계속될까? 지금 젊다고 하여 늙음이 오지 않을까? 돈이 있고, 건강하고, 젊은 자는 교만하기 쉽다.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는 돈에 종속되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돈을 극복하지 못했음을 알아야 한다.
돈에 종속된 자는 항상 “나는 돈에 종속되었으며 돈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지금 건강한 자는 “나는 건강에 종속되었으며 건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지금 젊은 자는 자는 “나는 젊음에 종속되었으며 건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욕망을 포기 하였을 때
사람들은 무언가 쟁취하려고 한다. 돈도, 사랑도, 지위도 쟁취의 대상이다. 돈을 벌었을 때 뿌듯하고, 사랑을 얻었을 때 세상을 다 가진 듯 하다. 원하는 지위에 올라 갔을 때 우쭐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 뿐이다. 또 다음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꾸 높은 곳을 향하다 보면 결국 교만해진다.
이 세상에 가장 행복한 자는 누구일까? 돈이 많은 자일까? 큰 재산을 가진 자일까? 예쁜 배우자를 가진 자일까? 모두 욕망이 발동된 것이다. 갈애가 바탕이 된 것이다. 욕망을 극대화 함으로 인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뿐이다.
세상에 가장 행복한 자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자이다. 남들이 욕망을 추구할 때 욕망을 포기하는 자이다. 돈의 가치를 최고로 아는 것과 정반대로 지금 여기서 현재의 조건에 만족하는 삶이다. 욕망을 포기 하였을 때 가장 자유로워진다.
욕망에 가득 찬 자는 ‘명상’을 이해 하지 못한다. 돈도 안되는 명상으로 보는 것이다. 돈에 가치를 두는 자는 돈으로 이루려고 한다. 돈의 힘으로 이루어진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벌기에 올인하는 삶을 살아 간다.
명상을 하는 자들은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자들이다. 심지어 명상을 잘 하려는 것 마저 내려 놓아야 한다. 이렇게 내리고, 비우고, 버렸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 때 잔잔한 행복은 거친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다. 잠을 잘 자는 것도 내려 놓았을 때 가능하다.
잠을 잘 자려거든
잠을 잘 못 이루는 자들이 있다. 잠과의 전쟁을 하는 자들이다. 저녁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심지어 차도 마시지 않는다. 카페인성분이 잠을 방해 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고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잠을 잘 잘 수 있을까? 간단하다. 내려 놓는 것이다. 욕망과 분노를 내려 놓았을 때 잠을 잘 잘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들은 잠을 잘 잔다. 깨달은 사람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은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라는 말이다.
근심, 걱정이 없을 때 잠을 잘 잘 수 있다. 밤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과 무관한 것이다. 갈망으로 인하여 육체적, 정신적 열기로 가득하였을 때 잠을 이룰 수 없다. 욕망을 내려 놓은 자가 잠을 잘 수 있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자이다. 내려 놓은 자의 행복은 이 세상의 어느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다.
2016-05-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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