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시골절의 빛나는 부처님오신날

담마다사 이병욱 2016. 5. 15. 10:50

 

 

시골절의 빛나는 부처님오신날

 

 

 

신록의 대지에

 

길을 떠났다. 연암산 깊숙히 자리한 천장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이른 아침 떠났지만 예상대로 막혔다. 서해대교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한쪽 귀로는 유튜브법문을 듣고 두 눈으로는 눈부신 햇살의 풍광을 감상 하였다.

 

차가 서해대교에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초록의 세상이 펼쳐졌다. 7키로미터가 넘는 서해대교는 중간 부위가 크게 돌출되어 있다. 높은 곳에서 앞을 바라보니 당진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야트막한 구릉이 연속으로 되어 있는데 신록이 절정이다.

 

 

 

 

 

 

키높은 가지에는 드문드문 하얀꽃이 피어 있다. 자세히 보니 아카시나무이다. 싱그러운 오월의 하늘 아래 흰 아카시나무와 이팝나무꽃이 마치 백발의 노인처럼 허였다. 온도와 습도는 적당하다. 이른 아침 신록의 대지는 눈부시게 빛났다.

 

시골의 작은 절

 

시골의 작은 절 천장사는 어디에 있을까?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지도를 보면 116키로 미터이다. 정상적 속도라면 1시간 30분 가량 걸린다. 그러나 늘 평택에서 막히기 때문에 3시간 잡아야 한다. 이날 부처님오신날 역시 3시간 걸렸다.

 

 

 

 

 

 

 

 

차를 멈추고

 

시골절 가는 길은 평화롭다. 자동차도 거의 다니지 않고 사람구경하기도 힘들다. 하늘은 맑고 온도와 습도는 적당하다. 눈부신 오월 한적한 길에 보는 농촌의 풍광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구불구불 소로를 따라 가다 보리밭을 발견하였다. 마치 유럽의 초원처럼 푸른 보리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차를 멈추었다.

 

 

 

 

 

 

 

 

 

 

 

 

 

천장사에 도착하니

 

천장사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절 입구에 있고 또 하나는 마을 입구에 있다. 절 입구 주차장이 다 찼다고 해서 마을주차장에 주차했다. 마을주차장에서 절까지 가려면 약 삼십분 가량 걸어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외부 손님을 위해서 일요법회 회원들이 차량안내서비스를 하고 있다. 힘좋은 사륜구동차로 편안히 절에 당도할 수 있었다.

 

천장사에 도착하니 일요법회회원들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어깨띠를 두르고 방문한 불자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 모두 안면 있는 법우님들이다. 지난해부터 몇 차례 순례를 같이 했고 송년과 신년맞이 템플스테이, 연등축제 등을 함께 하였기 때문에 매우 익숙하다.

 

노보살로 가득한 법당

 

부처님오신날 법회는 10시에 시작 되었다. 법당안을 보니 나이 든 노보살님들로 가득하다. 인근 지역에 사는 불자들로서 오래 전부터 절에 다녔다고 한다. 어느 노보살님은 50년 다녔다고 했다.

 

노보살님들은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구부정하여 잘 걷지도 못한다. 무엇이 노보살들을 이 깊은 산중으로 오게 하였을까? 가까운 교회가 있음에도 힘들게 산길을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파르스름하게 삭발한 스님의 독송과 염불소리에 연신 절을 하거나 합장하며 고개를 숙인다.

 

 

 

 

 

 

 

 

 

 

 

 

인연있는 사람들이

 

법당 바깥 마당에는 멍석이 깔려 있다. 법당에 들어 가지 못한 사람들이 앉아 있다. 작은 시골절에 인연 있는 사람들이 찾아 온 것이다.

 

 

 

 

 

 

 

 

 

 

 

 

 

 

 

 

 

 

 

 

 

 

 

 

 

 

 

 

 

 

 

 

 

 

 

 

 

 

 

 

 

기계장치를 보는 듯

 

절을 한바퀴 둘러 보았다. 유심히 본 것은 화목보일러이다. 지난 겨울 전기세가 많이 나와서 바꾼 것이라 했다. 겨울철 피크일 때 거의 이백만원에 달하는 전기세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우선 선원의 선방에 설치한 것이다.

 

화목보일러를 보니 부뚜막개념이 아니다. 마치 하나의 기계장치를 보는 것 같다. 시대에 따라 화목난로도 진화하는 것 같다. ‘나무랑 거꾸로 타는 화목보일러라는 명칭을 가진 최신형 난방장치인 것이다. 이런 화목보일러를 설치하면 난방비가 십분의 일로 절감된다고 했다.

 

 

 

 

 

 

 

 

 

 

 

 

 

 

 

 

 

 

성우당벽화를 보니

 

성우당에 새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경허스님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완성된 것이다. 두 스님이 줄행랑을 치고 처녀가 뒤쫓아 오는 그림이 있다. 경허스님과 만공스님의 일화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경허스님이 일경에게 잡혀 가는 그림도 있다. 경허스님과 세 제자, 즉 혜월, 수월, 만공스님의 그림도 있다.

 


 

 

 

 

 

 

 

 

 

 

 

 

 

 

 

 

 

 

 

 

 

빛나는 오월의 아침

 

빛나는 오월 아침이다. 부처님오신날에 하늘은 푸르고 신록의 향기가 그득하다. 연암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고월정에 올랐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오월의 세상은 눈부시었다. 나뭇잎은 참기름을 바른 듯 빛나고 저 멀리 산은 수채화를 보는 듯 하다.

 

 

 

 

 

 

 

 

 

 

 

 

 

 

 

 

 

 

 

부처님은 왜 존경받을까?

 

작년 부산순례법회때 스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그 날 늦게 절에 도착하여 일박 하였는데 주지스님은 인간으로 태어난 부처님이 왜 이처럼 존경받는지 생각해 보세요라 했다. 일종의 화두와 같은 것이다. 이천오백여년전에 출현한 석가모니부처님을 오늘날 전세계 방방곡곡에서 예배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한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이름을 남기는 것은 쉽지 않다. 마치 이름 없는 꽃이 깊은 산중에서 저 혼자 피고 지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경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대표적이다.

 

불교인들은 부처님 그분을 위하여 불상을 만들어 모시고 있다. 시대와 국가, 민족을 초월하여 때로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고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불교인들은 금빛찬란 불상을 만들고 사원마다 불상을 만들어 예배하는 것일까?

 

기복적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소원을 들어 주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받아들인다. 마치 유일신교의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연등꼬리표를 보면 알 수 있다. 대게 자신과 가족의 건강, 평안, 학업, 사업 등을 발원한다. 때로 어떤 이들은 만원을 보시고 하고 그 백배, 천배, 만배의 복을 바라기도 한다.  

 

대부분 종교는 기복적 요소가 강하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기복적 요소가 없으면 종교가 성립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 기복적 요소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일종의 방편인 셈이다. 그러나 기복을 넘어서야 한다. 절에 10, 20, 30, 아니 평생을 다녀도 기복에 머물러 있다면 이끄는 자들의 책임이 크다.

 

시계생천이라 하여 보시하고 계행을 지키는 삶을 살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했다. 그렇다고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부처님도 처음 불교에 입문한 자에게는 시계생천의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시계생천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알려 주었다.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한 이유는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한 이유는 빠알리탄생게에 잘 나타나 있다. 부처님이 과거에 출현한 부처님을 회상하며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원리가 있다.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단단하게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북쪽으로 일곱 발을 내딛고 흰 양산에 둘러싸여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이 경우의 원리인 것이다.”(D14)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여 괴로움을 소멸하고 윤회를 종식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볼 수 있는 광경이 하나 있다. ‘관불의식이다. 아기부처님을 목욕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꽃으로 장엄된 작은 불단을 만들고 그 중앙에 이제 갓 태어난 아기부처님을 놓는다. 아기 부처님은 한 손을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대승경전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문구를 근거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빠알리경전에서는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단단하게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북쪽으로 일곱 발을 내딛고 흰 양산에 둘러싸여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라 되어 있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가 일곱발을 내 딛고 더구나 최상자임을 선언한 것은 신화적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초기경전에서는 부처가 출현할 때는 일만세계가 진동한다고 했다. 이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 하였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던 일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던 일을 미증유(未曾有)’라 한다. 아직까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던 일이 부처의 출현에서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보살이 입태하였을 때와 보살이 태어났을 때 미증유의 일이 일어났다. 일만세계가 진동할 뿐만 아니라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특히 빛과 관련하여 이 달도 태양도 그와 같은 커다란 신통력 그와 같은 커다란 위신력으로도 빛을 비출 수 없는,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M123) 라 했다. 그 빛은 어느 정도일까? 경에 따르면 한번도 빛이 도달하지 않았던 아비지옥에 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빛은 아비지옥에도

 

부처의 출현은 빛과 같은 것이다. 부처출현에 일만세계가 진동할 뿐만 아니라 측량할 수 없은 광대한 빛이 우주 구석구속에 까지 이른 것이다. 부처출현에 아비지옥의 중생들도 비로소 빛을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그곳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 빛으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일만 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라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듣고 세존의 앞에서 직접 배웠습니다.”(M123) 라고 표현되어 있다.

 

부모를 죽이고, 부처님에게 해를 끼치고, 승가를 분열케 하여 오역죄를 지은 자들이 있다. 오역죄를 저지른 자들은 아비지옥에서 한량없는 세월을 고통스럽게 보내야 한다. 그런 아비지옥에 빛이 들어 왔다. 부처가 출현한 것이다. 마치 어두운 동굴에서 한줄기 광명이 비친 것과 같은 것이다.

 

 

 

 

 

 

 

 

아비지옥중생들은 빛이 들어 오자 그제서야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았다. 빛의 사각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에 따르면 세계 주변에서 수미산을 둘러 싸고 있는 철위산(cakkavala)이 있다. 세계의 철위산 사이에 하나의 아비지옥이 있다. 이 문구는 80,000km에 달하는 아비지옥을 묘사한 것이다. Smv. 433에 따르면, 칠흑 같은 암흑은 시각의식의 생기를 막는 암흑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D14, 750번 각주) 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그래서 부모를 죽이는 등 오역죄를 지은 아비지옥 중생들은 그제서야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 (M123) 라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본 것이다.

 

하느님도 감격하고 지옥중생도 반긴

 

부처의 출현은 위로는 천상에서부터 아래로는 지옥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비추었다. 부처의 출현에 하느님도 감격하고 지옥중생도 반겼다. 그런데 그 빛은 이제 까지 한번도 비춘 적이 없는 아비지옥까지 미쳤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구원의 가능성이다. 부처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윤회에서 벗어 나지 못하였으나, 부처가 출현함으로 인하여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도 감격하고 지옥중생도 반긴 것이다.

 

부처의 출현은 엄청난 사건이다. 단지 한 사람의 성인이 출현한 것 이상이다. 비록 신화적이긴 하지만 부처출현에 일만세계가 진동한다고 했다. 일만세계가 진동한 것은 경전에 따르면 세 번 있다. 보살이 입태하였을 때와 보살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꼰단냐가 가르침을 이해하였을 때이다. 그런데 보살의 입태와 태어났을 때는 일만세계의 진동뿐만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있었다고 했다. 그 광명은 아비지옥에까지 이른 것이다.

 

부처님은 빛과 같다. 그 빛은 아래로는 아비지옥에 까지 이르렀다. 이런 빛은 다름 아닌 자비의 광명이다. 부처님이 세상을 불쌍히 여겨 전법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 위로는 하느님(브라흐마)부터 아래로는 지옥중생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도 감격하고 지옥중생도 반긴 것이다.

 

점심공양은 비빔밥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공양시간이 왔다. 11시 반부터 시작된 공양시간에 공양식당에 사람들로 가득하다. 늘 그렇듯이 부처님오신날 절집에서 메뉴는 비빔밥이다. 떡과 과일을 곁들인 소박한 점심공양시간은 늘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키높은 나무에 꽃을 피워내듯

 

빛나는 오월에 작은절 시골절에서 부처님오신날을 보냈다. 돌아 오는 길에 산천초목은 오월의 햇살에 빛이 났다. 아카시꽃은 이곳 저곳에 만발해 있다. 쌀꽃이라 불리우는 이팝나무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쌀밥을 연상케 한다. 키 높은 나무에 핀 꽃은 부처님의 숭고한 가르침을 연상케 한다.

 

 

 

 

 

 

 

 

 

 

 

 

Vanappagumbe yathā phussitagge         
Gimh
ānamāse pahamasmi gimhe,         

Tathūpama dhammavara adesayi        

Nibbānagāmi parama hitāya,          
Idampi buddhe ratana
paīta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여름날의 첫 더위가 오면,

숲의 총림이 가지 끝마다 꽃을 피어내듯,

이와 같이 열반에 이르는 위없는 묘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 안에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stn233)

 

 

 

2016-05-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