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청정한 식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6. 26. 10:27

 

 

청정한 식사

 

 

아침에 무엇을 먹을까 망설였다. 일을 하려면 무엇이든지 먹어야 한다. 그것이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가급적 든든하게 먹고 임해야 한다. 마치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든든하게 먹고 일터로 달려 가는 것이다.

 

라면을 먹었는데

 

아침에 라면을 먹었다. 밥을 해 놓은 것이 없고 빵을 먹자니 내키지 않았다. 그때 얼큰한 라면 국물이 떠 올랐다. 한번 이렇게 생각되자 라면봉지를 찢고 말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러나 멈출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뜨거운 물에 투하하고 난 일이었다.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가끔 먹는다. 라면 특유의 강렬한 맛과 얼큰한 국물맛 때문에 종종 먹는다. 그러나 먹고 나면 반드시 후회한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라면이 갖는 한계 때문이다. 싸구려이기도 하지만 무엇 보다 인스턴트식품이라는 것이다. 값싸게 대량생산하다 보니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맛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먹고 나면 늘 찜찜했다. 이번 경우에도 그랬다. 결국 아침은 실패로 끝났다.

 

사람들은 종종 알면서도 속는다고 말한다. 뻔히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에게 매번 속는다. 인스턴트식품을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손이 가는 것이다. 라면이 그렇고 봉지로 된 믹스커피가 그렇다. 인공적으로 만든 모든 식품들이 다 그렇다.

 

일요일 아침에

 

일요일임에도 아침에 일터로 나왔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늘 있는 곳이다. 주말이라 해서 따로 쉬는 법이 없다. 사무실이 쉼터이다. 놀이터나 다름 없다.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각종 식물을 사 놓아서 사무실을 사방에 배치해 놓았다. 차도구도 갖추어 놓아서 손님이 오면 차대접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 최근에는 다량의 차를 확보했다. 차와 관련된 글을 썼더니 10년지기 블로그 법우님이 보이차 등 차를 한박스 보내 주었다. 부산법우님은 귀한 보이차를 선물했다. 친구에게 일을 해 주었더니 선물로 중국명차를 주었다. 앞으로 일이년 차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차와 함께 즐겨 마시는 것이 커피이다. 그러나 봉지커피는 마시지 않는다. 이전에는 주로 봉지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하루에 두 잔 이상 마실 수 없었다. 세 잔 마시면 반드시 탈이 났다. 어느 날은 한 봉지만 마셔도 속이 불편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 봉지커피는 마치 독극물마시는 것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봉지커피를 잘도 마신다. 아는 사람들 상당수가 하루에 열잔 정도 마신다고 하니 위가 다른가 보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봉지커피를 대접한다. 믹스커피에 이미 맛이 들였기 때문이다.

 

원두커피를 만들어

 

아침에 사무실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원두를 갈았다. 원두는 최근 미타정사스님이 준 것이다. 볶은 원두가 한봉지 되는데 반주먹 정도를 기계에 넣고 돌린다. 돌릴 때 드르륵 소리를 내며 갈린다. 소리를 들으면 스트레스가 해소 되는 것 같다. 시간이 걸리는 것이긴 하지만 이럴 때 여유를 찾는다. 가루의 크기는 조정하면 된다. 너무 얇게 갈아지면 맛이 없다. 중간 정도로 조정하고 갈면 된다. 종이필터위에 올려 놓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원두커피가 완성된다. 밖에서 점심한끼의 반 값에 해당되는 것이다.

 

 

 

 

 

원두커피를 마시면 부담이 없다. 마치 한약마시는 것 같다. 믹스커피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설탕도 타지 않고 그대로 마신다. 마시면 그윽한 맛이 혀끝에 감돈다. 뒤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봉지커피를 마셨을 때 마시는 순간 강렬한 단맛을 느끼지만 항상 뒤끝이 개운하지 않은 것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를 마시면

 

원두커피와 함께 즐겨마시는 것은 ()’이다. 차도구를 갖추고 차가 있기 때문에 즉석에서 만들 수 있다. 쇠그물망이 있는 차도구에 나무숫가락으로 두 스픈 차를 올려 놓는다. 뜨거운 물을 막바로 붓기보다 한단계 거쳐서 투하한다. 1분 정도 지나면 차 맛을 느낄 수 있다. 어찌보면 커피 만드는 것 보다 더 쉽다. 물론 봉지커피의 속도에 따라 갈 수 없다. 그럼에도 차를 우리고 차를 마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여유라 볼 수 있다. 일하다가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것이다. 쉬어 가는 것이다.

 

 

 

 

 

 

 

 

차도구에 찰찰 넘치도록 뜨거운 물을 붓는다. 찻잔에 주르륵 물이 흘러 나오는 것도 보기 좋다. 차를 마시면 마실수록 맑아 지는 듯한 느낌이다. 차를 마시고 나면 개운한 것이 특징이다. 목끝으로 뜨거운 차를 후르륵 후르륵하며 넘기면 확실히 몸과 마음이 정화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차주전자로 두 번 마시면 느낌이 온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 몸의 노폐물이 한꺼번에 씻겨 나가는 것 같다. 동시에 마음도 편안해진다.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

 

원두커피와 차를 마셨다. 찜찜했던 라면국물이 씻겨 내려 가는 것 같다. 다시는 인스턴트식품을 가까이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 한다. 그러나 얼큰한 라면 국물맛이 생각난다면 또 다시 유혹에 넘어 갈 것 같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청정한 식사를 떠 올려야 한다.

 

초기경전에는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가 무수하게 나온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수행승을 나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도 있다. 때 아닌 때 먹는 것도 금했다. 음식을 접하는 것도 일종의 수행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런가? 식탐이 있다는 것은 탐욕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해야 하는 수행승에게 있어서 식탐은 다름 아닌 욕망으로 사는 것이 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또한 예를 들어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있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불편했던 경험을 제거하고 새로운 고통을 초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나는 허물없이 안온하게 살리라.’라고 이치에 맞게 성찰해서 음식을 섭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안다. (S35.239)

 

 

부처님은 음식을 몸에 기름칠 하는 정도로 대하라고 했다. 몸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족한 것이다. 그 이상 되면 욕망이 개입 되는 것이다. 욕망은 소멸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음식절제하는 것 자체가 수행인 것이다.

 

음식절제가 왜 수행인가?

 

음식절제가 왜 수행인가? 부처님은 “계행을 갖추는 것과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A4.37) 라 하여 네 가지 원리를 말씀 하셨다. 음식절제가 계행과 감각의 문 수호와 깨어 있음을 아는 것과 동급임을 알 수 있다. 청정한 삶의 조건 중의 하나가 음식절제인 것이다.

 

부처님은 음식을 대할 때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있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S35.239) 라 했다. 사실상 빠알리공양게나 다름 없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양게와는 다른 것이다.

 

대승불교 오관게를 보면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라 되어 있다. 빠알리 공양게와 비슷해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그것은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라는 말이다. 음식을 약으로 아는 것과 기름칠이나 연고를 바르는 것과 다르다.

 

음식을 약으로 여기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빠알리공양게 처럼 몸에 기름칠이나 상처에 난 연고 정도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영양가 있는 음식으로서 몸의 자양분을 섭취하는 것을 말한다. 빠알리공양게에서 음식이 육신을 지탱하는 정도의 의미라면 대승의 오관계는 일종의보약개념으로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빠알리게송에서 음식절제는 일종의 수행임에 틀림 없다.

 

아들고기 이야기

 

부처님은 음식절제를 위하여 제자들에게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두 사람의 부부가 있었는데 적은 양식만을 가지고 황야의 길을 나섰다. 그들에게는 사랑스럽고 귀한 아들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부부가 황야를 지날 때 갖고 있던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는데도 그들은 아직 황야를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때 부부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우리들의 적은 양식이 다 떨어져버렸지만 아직 황야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귀한 아들을 죽여서 말린 고기나 꼬챙이에 꿴 고기를 만들어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황야를 빠져나가는 것이 어떨까?”(S12.63)

 

 

이야기를 보면 있을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인다. 그러나 극단적 상황에 처했을 때 생존욕구가 발동하면 아들도 잡아 먹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상윳따니까야 아들의 고기에 대한 경(S12.63)’에 실려 있다. 결국 부부는 아들고기를 먹고 황야를 탈출했다.

 

, 이 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뭇삶들은 자양분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자양분은 반드시 음식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네 가지 자양분이라 하여 음식과 같은 물질의 자양분뿐만 아니라 접촉의 자양분’, ‘의도의 자양분’, ‘의식의 자양분이 있다. 이른바 사식(四食)’을 말한다.

 

흔히 하는 말로 밥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부인이 남편에게 , 이 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라고 화를 내며 대들었다. 매일 아침 근사하게 밥을 차려 주면서 하는 말이다. 접촉의 음식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듯이 접촉의 음식도 먹어야 하고, 의도의 음식도 먹어야 하고, 의식의 음식도 먹어야 한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살 수 없고 하루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이다.

 

아들고기를 먹는 심정으로

 

네 가지 자양분은 결국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밥을 먹는 것, 접촉을 하는 것, 의도적 행위를 하는 것, 마음을 내는 것 모두가 미래 태어남을 유발하고 만다. 특히 음식의 자양분에 대해서는 아들고기의 비유를 들어 무시무시하게 설명했다. 음식을 대할 때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기름칠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연고 정도로 대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들은 놀이 삼아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취해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진수성찬으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영양을 위해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S12.63)

 

 

아들고기의 교훈을 보면 고기먹을 맛이 나지 않는다. 탁발승은 주는대로 먹는다고 하지만 고기를 접하였을 때 아들고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교훈의 영향이어서일까 대승보살계에서는 고기먹는 것을 금했다. 이는 보살계에서 불자들아, 너희는 고기를 먹지 말지니, 어떠한 중생(衆生-생명)의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한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보살계 48가지 가벼운 계율에 실려 있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고기를 먹으면 자비의 종자가 끊어져 중생들이 보고서 도망을 한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한다. 고기를 먹으면 한없는 죄를 짓나니, 짐짓 먹으면 가벼운 죄가 된다.”라 되어 있다.

 

빠알리율장에서 고기를 금하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탁발에 의존하는 수행승들은 주는 대로 먹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들고기 교훈을 기억한다면 고기를 접할 때 아들고기를 먹는 부모심정이 될 것이라 본다.

 

요즘 먹방을 보면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음식절제를 말씀 했다. 사랑하는 아들 라훌라에게도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stn337)”라 했다. 음식절제야말로 청정한 삶에 이르는 길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음식절제를 하지 못한다. 음식을 몸을 지탱하는 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요즘 먹방을 보면 극명하게 알 수 있다.

 

먹방에서 어느 출연자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먹는 모습만 보아도 행복해지는 것 같다. 한 입 가득 집어 넣고 먹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 마치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현상은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한상 근사하게 차려 놓고 음식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부처님은 음식대하기를 아들고기 대하듯 하라고 했다.

 

청정한 식사

 

아침에 라면을 먹은 것이 다 씻겨 내려 갔다.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고 차를 연거푸 두 주전자 마셨더니 자극성 물질이 다 씻겨 내려 간 것 같다. 오늘 점심 때는 호박을 썰어 넣은 된장국을 먹어야겠다. 밥은 된장에 비벼 먹을 생각이다. 이렇게 먹는 것이 가장 청정한 음식이다.

 

늘 음식절제를 생각하고 아들고기교훈을 떠 올리지만 매번 무너지곤 한다. 유해한 인스턴트식품을 가까이 하고 순간적인 맛에 유혹당하지만 늘 뒤끝이 개운하지 않다. 그러나 가공하지 않은 천연식품이나 발효식품은 몸을 청정하게 해 준다. 다시 한번 “ 약에 사용되지 못한 푸성귀는 하나도 없다. (Vin.I.275) 라는 부처님의 주치의이자 의사 지바까의 말을 되새겨 본다.

 

 

2016-06-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