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전방후원형 예덕리 고분군을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6. 6. 19. 22:42

 

 

전방후원형 예덕리 고분군을 보고

 

 

 

아침 6 25분 광주송정행 KTX열차를 탔다. 정확하게 7 59분에 떨어졌다. 1시간 34분 걸린 것이다. 작년 봄에 완전개통된 호남선 KTX 300여 키로미터의 거리를 불과 1시간 30여분 만에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다.

 

일년에 한번 조부모의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각지에 살고 있는 사촌들이 고향에 모이는 날이다.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에 있는 고향집이다. 이제 정례화 되어서 이맘 때쯤 의례 가는 날로 되어 있다. 일년에 한 차례 고향땅을 밟아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일부로 걸어서

 

광주송정역에서 문장으로 가는 500번 시외버스를 탔다. 영광으로 가기 전에 문장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정차한다. 이곳부터 걸어 갈 수도 있고 택시를 탈 수도 있다. 먼저 도착한 사촌형님에게 차를 부탁할 수도 있으나 걸어가기로 했다. 3키로 거리로 도보로 약 삼사십분 가량 걸린다.

 

 

 

 

 

 

 

 

걸어 가는 길에 보는 고향풍경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특별한 관광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업단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 평범해서일까 어느 음악평론가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초기 활동 했던 미국의 시골 마을 멤피스를 한국의 함평같은 곳이라 했다.

 

함평한우

 

함평은 무엇으로 알려져 있을까? 나비축제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나비는 청정한 지역에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갖가지 꽃과 함께 열리는 나비축제는 함평을 알리는 대표축제가 되었다. 요즘 또 한가지 알려진 것이 있다. 함평한우이다. 한우 역시 청정지역의 이미지가 강하다. 걷다 보니 이곳 저곳에 대규모축사가 널려 있다. 고향이 그대로 있기는 바라는 마음에서 본다면 불만족스런 것이다.

 

 

 

 

 

 

세상은 끊임 없이 변하고 있다. 고향이라고 해서 변화의 물결을 비켜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대규모공단이 들어 온다든지, 대규모 주택단지가 개발 된다든지 하는 일은 없다. 천만다행스런 일이다. 그럼에도 너른 평야에 논농사에만 의존하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대규모 축사가 좋은 예이다.

 

환경만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람도 변한 것 같다. 걷다 보니 맞은 편에서 가무잡잡한 피부의 외국인이 걸어 온다. 서로 마주치자 미소를 띠며 목인사를 한다. 축사에서 일하는 외국인노동자이다. 생김새로 보아 서남아시아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로 외국인 신부나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고 한다.

 

학교가 사라졌다

 

길을 계속 걸었다. 유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 쪼이기는 하지만 오전이라 견딜만 했다. 도심이라면 몇 백미터만 걸어도 사람과 자동차로 짜증을 유발하지만 시골길은 아무리 걸어도 상쾌하다.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어쩌다 자동차 몇 대가 지나갈 뿐이다.

 

시골집으로 가는 코스는 정해져 있다. 늘 다니는 길로 가면 되는 것이다. 이 길은 유년시절 어머니손을 잡고 걷던 길이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산은 옛날 그대로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길과 들과 산은 변한 것이 없다. 하늘의 구름도 옛날 그대로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것들, 생명 있는 것들에 변화가 생겼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초등학교이다.

 

일부로 초등학교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다녔던 학교이다. 들 한가운데 있는 학교로서 유년기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없었다. 학교가 사라진 것이다. 옛날의 흰색 단층 건물도 보이지 않고, 운동장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그대신 김치공장등 몇 동의 공장이 들어서 있다.

 

 

 

 

 

 

김치공장 저 멀리 산이 보인다. 불갑산이다. 어린시절 보았던 산세 그대로이다. 저 멀리 불갑산은 변한 것이 없는데 유년기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초등학교가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흔적을 찾아서

 

혹시 흔적은 없을까? 김치공장 뒷편으로 가 보았다.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이곳이 학교이었음을 알리는 기념비 등 몇 가지가 한 켠에 모아져 있다. 잡초와 잡목으로 접근하기 힘들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초등학교명이 새겨져 있는 돌기둥이 두개 있고, 교장기념비, 그리고 학교연혁비, 소녀상이 있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반가웠다.

 

 

 

 

 

먼저 학교연혁비를 보았다. 학교는 사라졌지만 학교의 역사를 매우 간단하게 돌에 새겨놓았다. 기록을 보니 1933년에 1학급 21명으로 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제시대 때이다. 전성기때도 있었다. 기록문에는 학급수 26학급에 학생수 1,642명이라 한다. 아마 베이비붐세대가 취학 했을 때일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다닐 때 두 세 학급 정도 되었다. 등교시간이 되면 들녁 이곳저곳에서 오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학생도 사라지고 학교도 사라졌다. 기록문에는 1999년 폐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념물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책을 읽고 있는 소녀상이다. 백색 콘크리트 구조물로 보인다. 처음에 이 소녀상을 보았을 때 매우 이국적 이었다. 서양식 모자를 쓰고 있는 것 하며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시골학교 분위기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 이승복 등의 동상이 있었을 텐데 책을 읽고 있는 소녀상을 보니 낭만적으로 보였다. 이 동상은 그때 당시에도 있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위안이 될 것 같다.

 

 

 

 

 

 

이곳이 학교임을 나타내는 결정적 구조물이 있다. 아마 정문 양 옆에 세워졌을 것이다. 길게 세로로 되어 있는 두 개의 돌기둥이 그것이다. 돌기둥에는 보일락 말락 한자어로 월야북공립국민학교라 새겨져 있다. 일제시대 때 세워진 것일까? 그때 당시 학교 다닐 때 국민학교라 불렸다. 다니던 학교는 분교로서 보통 월야북교라 불렸다. 월야면에 큰 학교가 있었고 면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분교가 있었던 것이다. 

 

 

 

 

 

기름진 옥답이 잔디밭으로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해 갔다. 초등학교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기름진 논밭도 사라진 것이다. 초등학교가 있던 곳에서 들녁을 가로질러 갔다. 들녁은 약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들에 벼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잔디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거의 칠팔십 프로 되는 것 같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주변에 대규모 한우축사가 이곳저곳에 녈려있는 것도 낯설지만 벼가 자라야 할 들에 잔디가 자라다니! 하지만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아마 이십년 전부터 잔디심기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논이나 밭에 작물을 심지 않고 잔디를 심어 팔기 시작한 것이다. 들녁 통째로 잔디가 자라고 있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에는 관계수로가 거미줄 처럼 형성되어 있다. 수로에는 물이 철철 흐르고 있다. 물소리를 들으면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러나 잔디로 변한 논에 더 이상 물댈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물은 철철 잘도 흐른다.

 

고향집에 도착하니

 

고향집에 도착했다. 사실 큰집이다. 백부가 오랫동안 살던 집이다. 해방 후 지었다는 전형적인 초가삼간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이 집에서 살았고, 이후 큰 아버지 댁이 살았다. 할아버지 자손들은 이 집을 고향집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고향집에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 거의 이십년 되었다. 다만 일년에 한차례 제사모시는 것을 기회로 사촌들이 모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허물어지기 쉽다. 잡초와 잡목이 무성하여 정기적으로 손 보지 않으면 폐가가 되어 쉽게 허물어진다. 시골집도 그런 과정에 있다. 집을 지은지 칠십년 가량 되었지만 원형을 유지 하고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마당에는 이웃에서 심었는지 수박이 자라고 있다. 뒷편으로 가보니 이맘 때쯤 피는 석류꽃이 한창을 지나 떨어지려 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 확인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호랑가시나무이다. 작년과 비교하여 훌쩍 자란 듯 하다. 이제 가속이 붙는 것 같다. 이삼년 전만 해도 매우 연약해 보였으나 매우 풍성하게 보인다.

 

 

 

 

 

 

 

 

 

 

 

 

 

 

 

 

 

 

예덕리 고분군

 

제사를 지내고 선산에 가 보았다. 선산에 가다 보면 커다란 봉분을 만나게 된다. 예덕리 고분군이다. 사촌형님에 따르면 장구봉이라 한다. 장구형상을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해져 내려 오는 전설도 있다고 했다. 또 무덤과 관련하여 도깨비불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마치 왕릉처럼 생긴 커다란 무덤은 왜 이곳에 있을까?

 

 

 

 

 

 

 

 

 

 

 

 

이곳 저곳에 커다란 무덤이 있다. 이를 묶어 예덕리 고분군이라 한다. 표지판을 보았다. 표지판에는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군이라 내력이 자세히 적혀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신덕고분은 길게 뻗은 자연구릉의 정상부에 장축이 서쪽으로 15도 가량 치우쳐 축조되었다. 고분의 형태는 한쪽이 네모지고 다른 쪽은 둥근 전방후원형이다. 규모는 전체길이 51m에 원형부 직경 30m, 방형부 25m, 연결부 폭 19m이며, 높이는 자락에서 원형부 5m, 방형부 4m, 연결부 3.25m이다.

 

고분의 분구상에서 조사된 석열은 중단부터 위쪽으로 1-1.5m로 쌓았으며 최하단석은 대형할석을 놓고 위쪽은 작은 활석을 덮었다. 주변에서는 고분의 형태를 따라 웅덩이 모양으로 파낸 도랑(주구)과 분구로 연결되는 8개소의 길(도로)이 확인 되었다.

 

매장주체시설은 지상식의 횡혈식석실로 짧은 연도와 묘도를 갖추었다. 석실 4벽은 아래에 큰 판석을 세우고 위에는 할석을 촘촘히 쌓은 맞조임식이다. 유물은 항아리, 뚜껑접시, 금제이식, 마구류가 출토 되었다.

 

신덕고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사된 전방후원형분으로 한일 고대문화 교류관계를 밝혀줄 중요한 유적이다.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군, 전라남도 기념물 제143)

 

 

 

 

 

 

 

고분의 특징은 전방후원형이라 했다. 이를 장구모양같다고 하여 이곳 사람들은 장구봉이라 했다 한다. 마치 무덤이 산처럼 크게 보여서 장구봉이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방후원형은 일본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설명문에는 한일 고대문화 교류관계를 밝혀줄 중요한 유적이다.”라고 되어 있다.

 

예덕리 고분군은 TV에서 방영된 바 있다. 역사스페셜 시간에 집중 조명되었다. 백제시대 이전 마한시대에 이 부근이 중심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너른 들녁으로 되어 있지만 바다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고 한다. 나이 드신 사촌형님에 따르면 지명 중에 뱃재가 있는데 배가 들어 오는 고개라는 뜻이라 한다.

 

예덕리 고분군은 알려진 것은 1982년 기념물로 지정 되면서 부터이다.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분의 규모로 보아 이곳이 마한시대에 중심지이었을 것이라한다.

 

 

 

 

 

이 모습 이대로

 

고향에 가면 늘 정적이다.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사람들과 차량으로 늘 북적이는 도시와는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변화는 감지 된다. 십 수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우축산농가가 늘어나고 외국인이 보이고, 무엇보다 논이 잔디밭으로 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산천은 변한 것이 없다. 저 멀리 불갑산과 태청산은 옛모습 그대로이다. 우리 부모세대도 저 산을 보았을 것이고 조부모 세대도 저 산을 보며 살았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로 올라가 4세기 또는 5세기의 마한 사람들도 저 산을 보며 살았을 것이다.

 

 

 

 

 

 

이 땅에 정착한 사람들은 커다란 무덤을 남겼다. 전방후원형이라는 독특한 모양이다. 이를 현지사람들은 장구봉이라 한다. 그러나 어떤 용도인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너른 평야를 배경으로 하여 커다란 세력이 형성되었으리라는 것은 무덤의 규모를 통해서 짐작할 뿐이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신도시나 산업단지를 환영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이 모습 이대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저 멀리 불갑산과 태청산이 옛날 그대로 모습이듯이, 천 수 백년을 그 자리에 있는 고분군 처럼 지금 이대로의 모습이 유지 되었으면 한다.

 

 

 

2016-06-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