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승(權僧)이라 부르면 안되나요?
종회의원스님 말하기를
최근 교계신문에 난 칼럼을 보았습니다. 종회의원이기도 한 S스님이 쓴 “견해다르다고 종회의원들 권승 매도해서야”라는 칼럼 입니다. S스님은 칼럼에서 종회에서 성안중에 있는 일명 ‘염화미소법’에 대하여 마치 권승들이 기득권을 지켜 내기 위한 파렴치한 행위로 매도 하고 있는 분위기에 대하여 우려했습니다. 더구나 ‘타락한 권승들’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매우 불편해 하는 듯 했습니다.
스님은 칼럼에서 현 종회의원들에 대하여 타락한 권승들이라고 매도 하는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권승으로 매도한다면, 그렇게 주장하는 당사자들 역시 권력을 탐하는 정치승과 다를 바 없다.”라 했습니다.
행위로 인해
한편에서는 ‘권승’이라 하고 또 한편에서는 ‘정치승’이라는 딱지를 붙여 주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Na jaccā brāhmaṇo hoti
na jaccā hoti abrāhmaṇo
Kammanā brāhmaṇo hoti
kammanā hoti abrāhmaṇo.
[세존]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stn650)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부처님 말씀 입니다. 부처님은 행위에 의해 ‘고귀한 자’도 될 수 있고 ‘천한 자’도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행위는 빠알리어 ‘깜마(kamma)’로서 한자어로 ‘업(業)’이라 하고, 영어로는 ‘action’이라 합니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brāhmaṇa)’은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라문이 된다는 것은 태생에 의해서라는 것 입니다. 바라문가에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바라문이 되어 고귀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노예의 집에서 태어나면 노예로 한평생 살게 되겠지요.
그 때마다 통용되는 명칭
부처님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계급을 부정했습니다. 태생이 아니라 행위로 현재 위치가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Kassako kammanā hoti
sippiko hoti kammanā,
Vāṇijo kammanā hoti
pessiko hoti kammanā.
[세존]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
행위로 인해 상인이 되고,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
Coropi kammanā hoti
yodhājivopi kammanā,
Yājako kammanā hoti
rājāpi hoti kammanā.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전사가 되며,
행위로 인해 제관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왕이 됩니다.”(stn651,652)
농사짓는 사람을 ‘농부’라 합니다. 기술을 가진 자를 ‘기술자’라 부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상인’, 사업하는 사람은 ‘사장’이라 합니다. 모두 행위에 따라 다르게 부릅니다. 매일 반복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복하다 보니 몸에 베어서 그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됩니다.
전장에서 싸우는 자를 ‘전사’라 부르고, 제사를 주관하는 자를 ‘제관(yājako)’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제관은 오늘날 타종교의 사제라 볼 수도 있고 무속신앙의 무당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왕이라 부르는 것은 왕으로 행위를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보아도 왕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도둑질 하는 자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도둑놈’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습니다. 주지 않는 것을 가진 자는 모두 도둑놈이라 부릅니다. 설령 그것이 합법을 가장 하였더라도 불법과 탈법에 의한 것이라면 도둑질입니다. 과도한 이익을 취하는 것 역시 도둑질에 해당됩니다. 불로소득도 넓은 의미로 도둑질이라 볼 수 있습니다.
농부, 어부, 기술자, 전사, 도둑놈, 제관 등 갖가지 명칭이 있습니다. 붙여 줄 만해서 부르는 것 입니다. 이런 명칭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 때마다 통하는 명칭으로 생겨나 여기 저기 시설되는 것입니다. (Sammuccā samudāgataṃ tattha tattha pakappitaṃ)”(stn648) 라 했습니다.
이름이나 성은 명칭의 시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 하고 있는 행위에 따라 달리 불려질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을 농부라 하고, 도둑질 하는 사람을 도둑놈이라 부릅니다. 행위에 따라 직업에 따라 그때 그때 붙여 줍니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수행과 포교를 떠나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빠알리니까야 번역자 전재성박사는 빠알리어 ‘빅카웨(bhikkhave)’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이라 번역했습니다. 또 다른 번역자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은 “비구들이여”라 번역했습니다. 빠알리어 ‘빅쿠(bhikkhu)’에 한편에서는 ‘수행승’이라 하고 또 한편에서는 ‘비구’라 합니다. 그렇다고 ‘사문’이라 번역하지 않습니다. 사문은 ‘사마나(samaṇa)’의 음역으로서 불교수행자뿐만 아니라 외도의 수행자도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빅쿠에 대하여 수행승이라 합니다. 걸식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걸인’과 다릅니다. 계정혜 삼학을 닦는 ‘걸사’라는 뜻이 더 맞을 것 입니다.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빅쿠(Saṃsāre bhayaṃ ikkhatīti bhikkhu)”(Vism.1.7) 라 했습니다. 이는 “그는 재생의 굴레에 있어서 두려움을 본다. 그래서 그는 빅쿠이다”라는 뜻 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행위의 두려움입니다.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D2) 라 했습니다. 모든 원인은 행위에서 시작 됩니다. 행위는 결국 업으로서 태어남을 유발하고 맙니다. 세세생생 윤회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존재에서, 나는 두려움을 보고”(M49) 라 했습니다.
갖가지 명칭의 스님
지금 여기서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과거 행위에 따른 것입니다. 지금 행위에 따라 미래가 전개 됩니다. 행위의 두려움을 안다면 다시태어남을 유발하는 업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갖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노래를 잘 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스님도 있습니다. 무용을 잘하는 스님, 음식을 잘 만드는 스님 등 특별난 재주를 가진 스님들이 많습니다. 이런 스님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가수스님, 화가스님, 무용스님, 쉐프스님 등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수행만 하는 스님에 대하여 ‘수행승’ 또는 ‘수좌승’이라 합니다. ‘이판승’이라고도 합니다. 사찰의 역임을 맡고 있는 스님을 ‘사판승’이라 합니다. 그때그때 부르는 명칭이 다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그 때마다 통하는 명칭으로 생겨나 여기 저기 시설되는 것입니다.” (stn648) 라는 말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스님에 대하여 약칭 ‘승(僧)’이라 합니다. 하는 역할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하는 행위에 따라 각종 명칭이 부여 됩니다. 이판승이 있는가 하면 사판승이 있습니다. 포교를 열심히 하는 스님을 ‘포교승’이라 합니다. 부정적 명칭이지만 도박을 일삼는 스님을 ‘도박승’이라 하고, 몰래 아내를 둔 스님을 ‘은처승’이라 합니다. 명칭을 붙여 주기 나름 입니다. 술 마시는 스님에 대하여 ‘음주승’이라 하고, 폭력을 일삼는 스님에 대하여 ‘폭력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이 정치를 했을 때
종회의원스님들을 종종 ‘권승’이라 합니다. ‘권력승’이라고도 합니다. 권승의 범주에는 총무원과 같은 종무기관도 해당됩니다. 종단권력을 쥐고 있는 스님들을 통칭하여 ‘권승’이라고 합니다. 이런 명칭에 대하여 대단히 거부감을 가진 스님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권승’이라 하지 않는다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권승의 이미지는 좋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것은 스님들이 정치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종단정치를 말합니다. 국회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중앙종회, 행정부와 비슷한 총무원, 그리고 사법부와 비슷한 호계원이 있습니다. 삼권분립 형식의 정부조직과 유사합니다. 이들 종무기관에서 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들은 넓은 범주에서 보면 정치승이고 권력승입니다.
종회에서는 종책모임이 있어서 합종연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스님들이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종단종치를 하는 한 정치승이라는 명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종회의원스님들은 모두 ‘정치승’입니다. 그리고 남이 갖지 않느 권능을 가졌기 때문에 권승입니다. 모두 행위에 따른 것입니다. 부처님이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며”라며 말씀하신 것이 틀림 없음을 말합니다.
권승이라고 부르면 안되나요?
스님이 정치행위를 하였을 때 정치승이 됩니다. 입법권을 가진 막강한 종회의원스님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 하였을 때 권승 또는 권력승이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행위에 의해 그때그때 명칭이 시설된다’라는 말이 틀림 없습니다.
종회의원스님들은 한국불교의 미래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각 교구본사의 이익만을 대변한다든가 특정 문중이나 특정인맥의 이익만을 위한다면 권승이라는 소리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대중의 뜻을 받들어야 할 종회의원스님들이 총무원장직선제와 같은 대중의 뜻을 가볍게 여기고, 더구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염화미소법을 검토하고 있다면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 입니다.
시대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회의원스님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나 단체에 대하여 불온시 하며 기득권 수호에만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중의 요구를 외면한 채 오로지 ‘이익’과 ‘명예’와 ‘칭송’에 사로 잡혀 있는 스님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권승이라고 부르면 안되나요?
[세존]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합니다.
뭇삶은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행위에 매여 있습니다.”(stn654)
2016-06-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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