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의 선택이 옳았다
깨끗한 천에 염색이 잘 되는 것처럼
야사의 출가이야기를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천’에 비유한 구절이 있다. 대부호의 아들 야사가 쾌락에 지쳐 있을 때 부처님을 만났다.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들은 야사에 대하여 “마치 청정하여 반점이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 들이는 것처럼”(율장대품, 전재성님역) 라고 표현되어 있다. 깨끗한 천에 염색이 잘 되는 것처럼 가르침을 받아 들였음을 말한다.
순수한 청소년기에 불교를 접하였다. 중학교를 종립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불교시간을 통해서 불교를 알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접한 부처님의 일생은 때묻지 않은 깨끗한 천에 염색되는 것처럼 아무 저항 없이 받아 들였다. 불과 열세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린 나이었음에도 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타당했다. 농경제가 열렸을 때 성밖에서 병든 자, 나이 든 자, 죽어 가는 자의 이야기가 모두 타당한 것으로 받아 들여 졌기 때문이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보면 싯다르타가 성밖에서 보았던 것이 그대로 실려 있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 라 했을 때 이를 부인할 사람은 없다. 진리로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dukkhaṃ ariyasaccaṃ: 苦聖諦)’ 라 한 것이다.
출가를 생각했는데
종립학교에서 3년은 불교와의 인연을 맺은 귀중한 시기였다. 그렇다고 절에 갔다거나 수련회에 참석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만 불교교과서를 통해 불교를 접했다. 특히 고승들의 이야기에 감명 받았다. 원효, 의상, 지눌, 의천 등의 이야기였다. 이 중에서도 대각국사 의천의 일대기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왕족신분으로 출가했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었던 왕자가 출가한 것에 대하여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와 같은 고승열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고승들처럼 살면 어떨까?”라고. 마치 깨끗한 천과 같은 마음을 가진 변성기 이전의 소년에게 고승들의 청정한 삶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출가를 생각했다.
중학교 다닐 때 불교를 접하면서 출가를 생각했었다. 고승들의 이야기를 보니 세속의 삶 보다 출가의 삶이 몇 배 더 나아 보였다. 세속에서 삶이라는 것이 시시해 보였던 것이다. 때 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되어 힘겹게 살아 가는 모습이 그저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출가해서 스님으로 삶을 사는 것만이 가장 보람되고 ‘이것 외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으로 그칠 뿐이었다. 변성기가 오고 욕망에 지배 받음에 따라 깨끗한 천과 같은 마음은 점차 오염되기 시작 했다.
“오! 괴롭다. 오! 고통이다!”
부처님은 29살 때 출가했다. 세상의 온갖 것을 다 겪고 난 다음 출가했다.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마간디야여, 그러한 나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어 하나는 우기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겨울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여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간디야여, 그러한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사는 사 개월 동안 궁녀들의 음악에 탐닉하여 밑에 있는 궁전으로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M75) 라고 표현 되어 있다. 온갖 쾌락을 다 겪어 본 것이다. 이는 야사의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부호의 아들 야사는 “오! 괴롭다. 오! 고통이다!”라 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부호의 아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괴로웠던 것일까? 율장대품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그때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들을 탐닉했는데, 그가 먼저 잠들면, 시녀들이 잠들었지만, 기름등은 밤이 지나자 타올랐다.
그때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는 먼저 깨어서, 자신의 시녀들이 잠자는 것을 보았다. 어떤 시녀는 비파를 겨드랑이에 끼고, 어떤 시녀는 머리를 산발하고, 어떤 시녀는 침을 흘리고, 어떤 시녀는 잠꼬대를 하는데, 마치 눈앞에 시체더미를 보는 것과 같았다.”
(야싸출가와 최초의 재가신자의 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율장대품에 따르면 야사는 쾌락에 대하여 환멸을 느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 2세에 해당되는 야사는 온갖 쾌락을 느꼈지만 결국 ‘허(虛)’와 ‘무(無)’이었다. 감각적 쾌락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허무’한 것이다.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시체더미를 보는 듯하여 “그에게 재난에 대한 위험이 생겨나 싫어하여 떠남에 마음이 확립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오! 괴롭다. 오! 고통이다!”라고 외친 것이다.
진정한 출가이유는
부처님은 태자로 삶을 살 때 철마다 세 개의 궁전에서 지냈다. 그러나 감각적 쾌락이 결국 재난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태자의 출가에서 잘 드러나 있다.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을 보면 “씨족은 ‘아딧짜’라고 하고, 종족은 ‘싸끼야’라 합니다. 그런 가문에서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고, 왕이여, 나는 출가한 것입니다.” (stn423) 라 되어 있다. 태자는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 안온을 찾고자 한 것이다.
출가이유로서 랏타빨라의 경이 유명하다. 부유한 장자의 아들 랏타빨라는 부인이 여럿 있음에도 출가를 감행 했다. 유명한 랏타빨라의 출가이유를 보면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M82) 라는 구절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출가는 ‘네 가지 진리에 대한 가르침(cattāro dhammuddesā)’에 있다. 랏타빨라의 경에 실려 있는 네 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진리
“이 세상은 불안정하여 사라진다”
- 늙고 노쇠하고 고령이 되는 것
2) 두 번째 진리
“이 세상은 피난처가 없고 보호자가 없다”
-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
3) 세 번째 진리
“이 세상은 나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은 버려져야 한다”
- 저 세상으로 갈 때 지은 행위대로 가는 것
4) 네 번째 진리
“이 세상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갈애의 노예상태이다”
- 이익과 욕망을 찾아 이것 저것을 탐하는 것
네 가지 진리가 출가이유라 볼 수 있다. 랏타빨라는 이런 이유로 출가했다. 앞으로도 출가할 자들에게 출가이유가 될 것이다.
중학교 다닐 때 낭만적 출가를 생각했었다. 단지 고승의 깨끗한 삶이 좋아 보였다. 그런 이유로 마음속에 출가를 생각 했었다. 만약 그때 당시 출가를 감행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변성기의 시작과 함께 견디어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욕락의 삶을 살지만
감각적 쾌락의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들에게 출가는 미친 짓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즐거움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고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사실의 모든 것들
원하는 것, 사랑스런 것, 마음에 드는 것,
존재라고 하는 모든 것.
그것들은 하늘사람과 인간의 세상에서
즐거운 것이라 여겨지지만
그들이 소멸될 때가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괴로운 것이라 여기네.”(S35.136)
세상사람들은 오감의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그러나 경에 따르면 오욕의 삶을 살지만 결국 괴로운만 남을 것이라 했다.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 라며 세상의 흐름과 반대의 삶을 산 것이다. 이것이 출가자의 모습이다.
족쇄가 채워졌다!
부처님은 29세 때 출가 했다.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것을 보고 “라후 자또, 반다남 자땀(Rāhu jāto, bandhanam jātam) ”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 말뜻은 “라후( Rāhu)가 태어났다, 족쇄가 채워졌다”라는 말이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삶은 가장으로서 즐거움과 기쁨을 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아내와 자식에게 묶이게 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고리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 (Dhp345) 라 했다.
한 남자가 자식과 아내를 가진 가장이 되면 즐거움과 기쁨도 맛보지만, 또한 고통도 맛보게 된다.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을 맛보게 하는 족쇄에 묶이면 결국 개인의 삶은 고통속에 빠지게 된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 족쇄에 묶이면 윤회(samsara)의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태자는 출가를 결심했다. 그런 결심은 잘 한 것일까? 원담스님의 섭세일기에서 부처님의 출가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원담스님의 섭세일기에서
32상을 갖춘 부처님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전륜성왕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얘야 웃따라야, 우리들의 성전에는 서른두 가지의 위대한 사람의 특징이 전수되고 있다. 그러한 모든 특징을 성취한 위대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운명 외에 다른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만약 그가 재가에 있다면, 전륜왕이 되어 법에 의해 통치하는 정의로운 왕으로서 사방을 정복하여 나라에 평화를 가져오고 일곱 가지 보물을 성취한다.... 그러나 그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면, 세상에서 모든 덮게를 제거하는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이 된다.” (M91)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32상을 가진 자에게 두 가지 운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재가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고, 출가하면 정등각자가 되는 것이다.
태자 싯다르타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운명대로 전륜성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한 결정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원담스님은 자신의 섭세일기에서 이렇게 표현 했다.
“역시 싯다르타가 전륜성왕의 길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택한 것은 옳았다. 전륜성왕도 결국에는 폭력을 쓰지 않을 수 없고 인기에 영합할 수밖에 없다. 왜? 전륜성왕의 이상을 이해하고 힘이 되어줄 인민의 지지가 없다면 아무리 전륜성왕일지라도 자기의 뜻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원담스님, 섭세일기-2016년 봄 8)
태자 싯다르타에게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전륜성왕의 길과 부처의 길이다. 출가를 하지 않았다면 틀림 없이 전륜성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 했을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따라 주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전인도를 승가에 보시했지만
전륜성왕은 ‘담마에 의한 정복(Dhammavijaya)’을 추구한다. 이는 초기경에서 “그는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대륙을 정복하되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고 칼을 사용하지 않고 정법을 사용한다.” (M91)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원담스님에 따르면 결국 실패할 것이라 했다. 칼과 몽둥이를 쓰지 않고 정법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공업(共業)’으로 설명했다.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따라 주지 않았을 때 칼과 몽둥이를 사용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소까대왕은 전륜성왕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아소까의 말년은 비참했다. 재세시 전인도를 승가에 보시하였으나 말년에는 아무것도 보시 할 수 없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전 대지를 정복하여 10억을 보시했던 행복한 왕도 마지막에는 그 왕국이 아말라까 열매의 반 정도에도 미치지 못했다. 비록 슬픔 없는 아소까였지만 공덕이 다 하여 죽음을 향했을 때 바로 그 몸으로 슬픔을 느꼈다.” (Vism.8) 라 되어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전륜성왕 아소까의 비참한 말년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빠딸리뿟따의 꾹꾸따라마(Kukkutarama)승원에 큰 탑이 있는데 이름이 아말라까(amalaka)탑이라 하는데 아말라까란 인도의 약용과일 이름이다. 아소까 왕이 병이 들어 중태가 되었을 때 승가에 진귀한 보물을 공양하려 하였으나 가신들의 만류로 공양할 수가 없었다. 천하를 마음대로 통치했던 권력은 가버리고 이제는 오직 식사에 나온 아말라까만 뜻대로 될 뿐이라고 한탄하면서 아말라까를 먹지 않고 꾹꾸따라마 승원으로 보냈다. 그래서 승가대중들은 그 아말라까를 끈으로 묶어 국을 끓여 국물은 대중이 모두 먹고 아말라까를 꺼내어 탑을 세우고 탑 속에 모셨다 한다.
(일아스님의 ‘아소까-각문과 역사적 연구’에서)
아소까대왕 당시 인도에서 “온 세상을 승가에 보시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그 시대의 관습이었다고 한다. 대신과 관리들은 그 보시한 세상을 많은 돈을 내고 다시 찾아 오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소까대왕이 말년에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 승가에 진귀한 보물을 공양하려 하였으나 가신들이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그 보배를 승가로 부터 돈을 주고 다시 사 와야 했기 때문이다. 슬픔이 없는 행복한 왕도 말년에 공덕이 다하여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싯다르타의 선택이 옳았다
만일 태자 싯다르타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틀림 없이 전륜성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륜성왕이라 칭송되는 아소까대왕처럼 되었을지 모른다. 전인도를 승가에 보시했던 아소까대왕은 말년에 탑에 유폐되어 쓸쓸히 죽어 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태자 싯다르타의 선택은 옳았다.
원담스님은 섭세일기에서 “역시 싯다르타가 전륜성왕의 길을 버리고 출가의 길을 택한 것은 옳았다.”라 했다. 이는 출가자 모든 이들에 대한 이야기와 같다. 만일 출가하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면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출가자들이 출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한방울이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물음에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영화 삼사라(2001), “한방울이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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