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명문대스님과 박사스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6. 5. 26. 09:47

 

 

명문대스님과 박사스님

 

 

 

 

 

교계신문 기사를 읽다가 본 마음이 들통난 듯 했다. 그것은 어느 스님이 쓴 칼럼에서 어려서 고아원에 살 때 기독교를 접했다.”라는 문구를 접했기 때문이다. 평소 알고 지내는 스님이고 더구나 같은 과는 아니지만 대학동기이도한 스님의 글에서 뜻밖의 문구를 본 것이다.

 

사실 그 스님과 알고 지내게 된 것은 불과 1년 여 밖에 되지 않는다. 어떻게 얘기 하다보니 같은 학번이었다. 그러고 보니 학교 다닐 때 본 것 같다. 키가 껀정하고 머리를 짧게 깍은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감추어진 편견

 

스님의 글에서 고아원 얘기를 접하자 미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직자의 길을 가는 스님과 고아원 출신이 어울리지 않는 듯 하여 약간은 실망했다. 이런 실망의 감정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편견이 작용했다는 결정적 증거일 것이다. 모르고 지내고 있었지만 편견과 단견이 마음 한켠에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임에 틀림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편견을 가지고 있다. 다만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그런 편견은 매우 다양하다. 이념에 대한 편견, 지역에 대한 편견, 성에 대한 편견 등 마음 한켠에 또아리를 틀고 있다. 평소에는 모르고 지내지만 어떤 경계에 부딪치면 발현된다. 그 지역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이라든가 그 학교 출신은 깡패라든가 등의 편견을 말한다.

 

스님의 고아원 얘기를 접하자 한편으로 나도 모르게 실망의 감정이 일었다. 또 한편으로 연민의 감정이 일었다. 두 개의 상반된 극과 극의 감정이 내면에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실망의 감정은 부끄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감정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직도 고아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명문대스님, 박사스님

 

스님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들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형제 또는 자매를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인연을 끊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고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 거듭남을 뜻한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부모형제를 버린 것은 현재의 나가 죽고 또 다른 나로 거듭난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세상과 이별하고 부모형제와 연이 끊어진 것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또 다른 나로 거듭난 사람들이 출가자들이다. 그럼에도 스님들 이력을 소개할 때 보면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 있다. 이력과 경력, 학력 등이다. 세상을 등지고 새로 태어난 사람에게 왜 이전의 이력이 따라다녀야 할까?

 

어느 스님의 책소개란을 보았다. 출가 이전의 이력이 간단하게 소개 되어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것이 가장 돋보였다. 또 어느 스님은 박사경력을 가지고 있다. 출가하기 이전에 외국에서 학위 받은 것을 소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력은 스님을 소개할 때 마다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 그러다 보니 명문대출신스님이라거나 박사스님이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출신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좀처럼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뚜렷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래서 필명으로 글을 쓰고 얼굴이나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명문대출신을 강조하고, 학위를 내세우고, 집안을 소개한다.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스님들에게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BS 세계테마기행을 즐겨 본다. 이번 주 프로를 보니 네팔에 대한 것이다. 네팔인들의 삶의 모습중에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되새김질을 하는 소똥을 모아 지붕에 말리는 것이다. 사오일 말리면 훌륭한 땔감이 된다. 실제로 연료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니 나무땔감과 별 다르지 않다. 나무에서 타는 불이나 소똥에서 타는 불의 모양이 같은 것이다.

 

모든 땔감의 불의 모양은 같다. 어떤 땔감이든지 불의 화염과 광채와 빛깔은 같은 것이다. 고급전단향 땔감이나 소똥땔감이나 화염과 광채와 빛깔은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S7.9) 라 했다.

 

명문대나 박사출신 스님이든, 고아원 출신의 스님이든 모두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어느 출신에서도 성자는 출현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라 했다.

 

출신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한다. 명문대출신이라 하여, 명문가라 하여, 난자라 하여, 든 자라 하여 차별한다면 마음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편견이 작동한 것이다. 고아원 출신이면 어떤가? 현재 행위가 출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2016-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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