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섬마을 여교사 집단성폭행 사건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뉴스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바다 건너 섬마을 오지에서 벌어진 사건이 불편함을 너머 화나게 합니다. 다시 한번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합니다.
나는 사람 입니다. 우리는 사람 입니다. 나는 인간 입니다. 우리는 인간 입니다. 나는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악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와 비슷한 모습한 모습을 한 자에 대하여 사람, 인간, 뿍갈라, 뿌리사, 마눗사, 오온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릅니다. 이 중 ‘마눗사(manussa)’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마음이 탐-진-치와 불탐-부진-불치로 넘쳐흐르기 때문에 마눗사라 한다.”(DAT.iii.130) 라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인간에게는 다른 어떤 중생들보다도 마음의 기능이 더 발달 되어 있기 때문에 선과 불선의 가치를 더 잘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어떤 존재들 보다 선업을 지을 가능성이 더 크고 반면에 악업을 지을 가능성 역시 더 큽니다. 따라서 인간은 부처의 영역에 도달 할 수도 있고 반면에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살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부처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합니다.
최근 어느 섬마을 소식이 우리를 몹시 불편하게 합니다. 동네 학부모들이 여교사를 집단성폭행 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이럴수가” “어째서 그런 일이” 라는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인간에게 불성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악마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 일 것 입니다.
상윳따니까야에 ‘제석천의 일곱 가지 서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서원이 “나는 살아 있는 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양하리라.” (S11.11) 라는 내용입니다. 왜 가장 먼저 부모를 봉양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아마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경계의 말이라 여겨 집니다.
불교에서는 부모를 죽이면 ‘오역죄’라 하여 아비지옥에 떨어져 한량 없는 세월을 고통스럽게 보내야 한다고 합니다. 부모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인간 입니다. 동물세계에서도 보기 힘듭니다. 그래서인지 오역죄를 저지른 자는 축생 보다 더 아래 세계,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나 봅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 입니다.
인간의 스펙트럼은 다양 합니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에서부터 성자에 이르기 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인간군상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느 위치에 서 있을까요?
인간의 지위를 얻기 힘들다고 합니다. 흔히 ‘맹구우목’의 비유로 설명 합니다. 눈먼 거북이 망망대해에서 구멍 뚫린 널빤지를 발견하고 그 구멍속에 머리 내밀기라 합니다. 그것도 백년 마다 한번씩이라 합니다. 반면 인간의 지위를 잃기는 매우 쉽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악 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가 선행보다 악행이 더 많기 때문 입니다. 선처에 태어날 자는 손톱 끝의 흙먼지 정도에 지나지 않고 악처에 날 자는 대지만큼 많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악처에 떨어 집니다. 선처에 나는 자는 극히 드뭅니다. 보통사람들은 일생동안 선행보다 악행을 더 많이 한다고 합니다.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지혜가 없기 때문에 동물적 삶이나 다름 없습니다. 식욕과 성욕에 지배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을 특징으로 합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관계 입니다. 약한자는 강자에게 먹히고 강자는 약자를 먹잇감으로 합니다.
섬마을 여교사 집단성폭행 사건을 접했을 때 인간에게서 악마를 보았습니다. 동시에 약육강식의 동물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 동물의 세계는 양심과 수치심, 즉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지금 악행을 저질렀는데 이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부끄러운 것 입니다. 내적으로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부끄러움(양심=hiri=慚)’ 이라 합니다. 지금 악행을 저질렀다면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 입니다. 그래서 언제 발각될지 두려워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여 두려워하는 것이 ‘창피함( 수치심=ottappa=愧)’ 이라 합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있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을 아는 것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정의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하므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It.36)
부처님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 입니다. 두 가지가 결여 되어 있다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띠붓따까(여시어경) 에서는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개와 같은 동물의 세계에서나 일어날 법한 말 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위로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짐승처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는 자들 입니다. 우리는 전생에 오계를 지켜서 이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도둑질 하다 붙잡혀 목이 잘리길 무수히 반복하였고, 부녀자를 겁탈하여 역시 목이 잘리길 무수히 반복했습니다. 흘린 피가 사대양에 비할 바 아니라 했습니다.
목이 잘릴 때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며 눈물로 맹세 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몸을 받아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은 살생, 도둑질 등을 하는데 은연중에 두려움을 갖습니다. 오계를 어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입니다. 그럼에도 과거의 ‘눈물의맹세’를 잊어 버리고 오계를 어기며 살아 갑니다.
오계를 지키지 않아 축생 등 악처에 떨어지면 다시는 인간몸 받기 힘들다 했습니다. 맹구우목의 비유가 잘 설명해 줍니다.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서 인간이 되기는 거의 불가능 합니다. 차라리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깨달은 자가 되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백년에 한번 널판지를 발견하여 더구나 구멍이 있는 널판지에 고개를 내밀어 인간이 되는 확률 보다, 지금 이 몸 받았을 때 오계를 지켜 이 생에서 깨닫는 자가 되는 것이 확률적으로 훨씬 더 높다는 것 입니다.
인간의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지금 이 순간 가청 주파수대역에서 부터 수 백 기가헤르츠의 비가청대역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존재 하듯, 인간의 마음은 지옥에서부터 천상에 이르기 까지 확장 되어 펼쳐 집니다. 때로 부처의 성품도 있지만 악마의 속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늘 깨어 있으라 했습니다. 늘 ‘사띠(sati)’하면 오계는 자연스럽게 지켜 진다고 했습니다.
2016-06-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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