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삼귀의, 이제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담마아닌 것이 득세할 때
진리 아닌 것이 득세하는 세상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셨을 때 이미 조짐이 있었다. 어느 나이 든 비구는 부처님이 열반에 들자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어져서 좋다고 했다. 그는 “그대들은 슬퍼하지 마시오.”라며 말하고는 “우리는 ‘이것은 그대들에게 옳다. 이것은 그대들에게 그르다.’라고 간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Vin.II.285) 라며 말하고 다녔다.
이런 사실을 목격한 부처님의 수제자 마하깟사빠는 위기를 느꼈다. 이대로 놔 두면 정법(dhamma)이 훼손되고 ‘비법(adhamma)’이 득세하게 될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그래서 늦기 전에 경과 율을 외우자고 결집을 제안하였다.
담마아닌 것이 득세하게 되었을 때 전도된 모습을 보게 된다. 한국불교에서 ‘한글삼귀의문’이 그것이다.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 하여 스님들을 승보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거룩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런 삼귀의문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스님들을 왜 승보로 보아서는 안되는가?
총무원장직선제모임을 이끌고 있는 허정스님은 최근 기고문에서 “정말로 ‘승가’는 ‘스님들’로 번역되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이는 최근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한글삼귀의문을 포함하여 우리말 의례가 통과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글삼귀의문이 문제가 되는가? 이에 대하여 허정스님은 승보를 ‘스님들’이라 하였을 때 승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왜 그런가? 승가는 최소 네 명이상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스님들이라 하였을 때 두 명도 해당된다. 두 명은 승가의 구성요건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스님들이라 하였을 때 이를 승가공동체와 동의어로 보는 것은 모순된다. 이밖에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로 간주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가지게 된다.
스님들은 승가의 일원일 뿐이다. 재가불자들이나 스님들이나 귀의의 대상은 승가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을 귀의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때 심각한 문제와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님들을 왜 승보로 보아서는 안되는 것일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스님들을 승보로 보면 승가의 존재이유가 없어진다. 불자들이나 스님들이 스님들에게 의지한다면 승가공동체가 성립될 수 없다. 한데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뿔뿔이 살 수 있게 된다. 토굴에서 한명 사는 스님도 승가라 볼 수 있을까? 최소한 네 명이 모여 살아야 승가로 볼 수 있는데 한명 또는 두명이 살아도 승가라 할 수 있을까? 스님들을 승보로 보면 승가공동체가 성립될 수 없을 뿐더러 승가존립이유를 상실한다.
둘째, 스님들을 승보로 보면 자자와 포살이 있을 수 없다. 자자와 포살은 승가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 두 명이 사는 스님들에게 있어서 자자와 포살은 성립되지 않는다. 최소한 네 명 이상이 모여 살며 여법하게 갈마를 하고 자자와 포살을 하는 것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여법한 승가공동체에서 성자가 출현한다. 나홀로 사는 스님에게서 계행의 의미는 없다. 함께 모여 살면서 잘못을 지적하고 잘못을 고백하였을 때 계행의 청정이 이루어지고 성자가 출현한다.
셋째, 스님들을 승보로 보면 스님들이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부처님은 승가에 보시하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의 양어머니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부처님에게 손수 지은 가사를 보시하려고 했을 때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그대가 승단에 보시할 때에 곧 나와 승단을 공양하는 것이 됩니다.” (M142)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건물이나 전답 등 사방승가에 사용될 보시물은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을 승보로 본다면 스님들에게 보시하게 될 것이다. 그결과 스님들이 부를 축적하게 되고 스님들 간에도 세속에서와 같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재현 될 것이다.
넷째, 스님들을 승보로 보면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게 된다. 재가불자들은 스님을 부처님처럼 믿고 따른다. 그런데 스님들을 승가로 보면 재가자들뿐만 아니라 스님들도 스님에게 귀의하게 된다. 그 결과 특정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파벌이 형성될 수 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는 문중개념이다. 특정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마치 가족 같은 혈연관계를 유지 하였을 때 더 이상 승가공동체라 볼 수 없다. 수 백개의 종단이 난립 하는 것 역시 스님을 귀의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좋은가?
승보개념은 한국불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다. 누구 하나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고 나서지도 않는다. 현포교원장 지홍스님이 언젠가 종회에서 한글삼귀의문 개정에 대한 의견을 낸 적이 있지만 대부분 스님들은 침묵하고 있다. 굳이 고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대부분 스님들은 승보가 승가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스님들이 승가를 표현한 것이라고 에둘러 말한다. 잘못된 것 인줄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것이다. 여러가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스님들을 승보로 간주하는 것에 대하여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다. 재가자들로부터 부처님처럼 존경받고 권위도 올라가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출가교단에 대한 도전이라고
스님들을 승가로 바꾼다고 하여 스님들의 위상이 저하 될까? 그럴 염려는 없을 것 같다. 계행이 청정한 스님들은 바꾸거나 바꾸지 않거나 계속 존경 받을 것이다. 그러나 계행이 청정하지 스님들은 위상이 낮아 질 것임에 틀림 없다. 불자들이 부처님 모시듯 해 왔는데 승가로 바뀌었을 경우 부처님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계행이 청정하지 못한 스님들은 아마 극력 반대할지 모른다.
승보개념을 바꾸는 것에 대하여 스님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종회의원 J스님은 “삼귀의례 변형, 심각한 문제다”라는 제목으로 2013년 조계종 기관지에 기고했다. J스님에 따르면 승보를 바꾸려는 시도에 대하여 “출가교단에 대한 도전적이고 위험천만한 주장이며 시도”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얼마 전 긴급한 회의가 있어서 참석했더니 삼귀의례의 변경문제였다. 종단소속단체는 아니지만 종단 신도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많이 활동하는 단체의 회의록이 참고자료로 열람되었다. 회의록에는 ‘스님들’께만 귀의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와 유사한 다른 단체에서는 ‘대중들께’라고 쓴다고 소개하며 기존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공동체’ 대신에 ‘사부중’으로 사용하자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회의록 뒷부분의 참석자와 위임자 명단의 면면을 보니 아득한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J스님)
J스님은 승가로 변경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승가는 스님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포함된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교단의 근본을 부정하며 삼귀의례문을 임의대로 변경하고 승가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것은 스님들의 부정적인 모습보다 더 나쁜 일이다”라며 승보개념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했다.
J스님은 승보의 개념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부대중을 승가로 여기는 세력이 있어서 승가는 스님들만의 승가라 주장하고 있다. 스님들을 승가로 볼 수 있을까? 스님들 개별과 커뮤니티는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스님들과 승가를 동일시 한다면 무식을 스스로 폭로 하는 것과 같다.
삼귀의와 구족계이야기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세상에 나온지 십년이 되었다. 최근에는 스님들만 본다는 율장도 번역되어 판매 되고 있다. 율장이 더 이상 스님들만의 전유물 또는 비밀문서는 아니다. 또한 테라와다 교단이 성립됨에 따라 승가가 승보임을 누구나 아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스님들을 승보로 보는 것은 넌센스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를 갖는다.
율장대품에 ‘삼귀의와 구족계이야기’가 있다. 출가를 원하는 자들을 위하여 각각의 나라에서도 구족계를 주라고 허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족계를 받는 것일까? 율장대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세존]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깍게 하고 가사를 입히고 한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게 하고 수행승의 양발에 머리를 조아리게 한 뒤에 웅크려 앉히고 합장하게 하여 이와 같이 말하라고 해야 한다.
고귀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고귀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고귀한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존귀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존귀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존귀한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12 삼귀의와 구족계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번역을 보면 ‘고귀한, 존귀한, 거룩한’이라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첫 번째로 대신에 ‘고귀한’으로 대체하였다고 하였다.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로는 ‘존귀한’으로, 세 번째로는 ‘거룩한’으로 대체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전재성님의 번역방식에 따른 것이다.
구족계를 받을 때 삼보에 귀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삼보는 붓다(Buddha)와 담마(Dhamma)와 상가(Sangha)이다. 번역에서는 상가에 대하여 ‘참모임’이라 했다. 부처님은 분명히 “상가에 귀의합니다.(Saṅghaṃ saraṇaṃ gacchāmi)”라 했다. 그 어디에도 ‘스님들’을 뜻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상가는 공동체(커뮤니티)를 뜻한다. 개별스님들과 승가공동체는 다른 것이다. 승가공동체에는 개별스님들에게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자와 포살이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공동체가 승가이다. 따라서 스님들과 승가는 다른 말이다.
승가 없는 불교는 곧 망한다
율장대품을 보면 구족계를 받을 때 삼보에 귀의 함을 알 수 있다. 만일 삼보에 귀의 하지 않고 다른 것을 귀의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불교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붓다와 담마와 상가는 동급이고 동격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공동체는 모두 부처님과 관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스님들을 승보로 한다면 스님들은 부처님과 동급이 되어 버린다.
부처님은 ‘자귀의와 법귀의’를 말씀 하셨다. 동시에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의지했던 스님이 작고 하거나 환속했을 때 어떻게 될까? 부처님처럼 믿고 의지했던 불자들은 신심이 떨어질지 모른다. 더구나 음주나 도박 등 각종 범계를 저질렀다면 더 이상 의지하거나 귀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승가를 승보로 보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도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를 귀의의 대상으로 삼았을 때 흔들릴 수 없다.
오늘날 까지 법의 바퀴가 굴러 온 것은 승가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승가공동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불교는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스님들만 있고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공동체가 없다면 불교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스님들만 있고 승가가 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불교에는 사실상 승가가 없다. 왜 승가가 없는가? 그것은 한글삼귀의문에서 승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승가가 없는 불교를 불교라 볼 수 있을까? 승가가 없는 불교는 곧 망하게 되어 있다.
배포를 강행한다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는 여전히 한글삼귀의문을 의례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스님들을 승보로 하지 않는다. 한국을 포함하여 동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사용하지만 승보는 승가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스님들을 승보로 여긴다면 ‘스님이기주의’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조계종 중앙종회에서는 한글삼귀의문을 다른 우리말 의례와 함께 배포 하였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홍보하겠다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스님들을 승보로 보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리고 국제적 웃움거리이다. 그럼에도 배포를 강행한다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이 된다. 승가가 승보인줄 모르고 있었다면 무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으로 한국불교의 수치에 해당된다. 또 하나는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승가가 승보임을 알면서도 스님들을 승보의 위치에 올려놓았다면 양심불량이며 스님이기주의의 발로이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직무태만이라 볼 수 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임금님귀는 당나귀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승보가 승가임에 틀림 없음에도 마치 불자의 눈을 속이는 것처럼 스님들을 부처님과 동격으로 보아 승보로 간주한다면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집단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제자리로 돌려 놓아야
한글 삼귀의문이 생겨난 것은 1970년으로 알려졌다. 불교신문에 따르면 공모에 의해서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불교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 작곡가에 의하여 한글삼귀의와 한글사홍서원이노래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歸依佛兩足尊(귀의불양족존), 歸依法離欲尊(귀의법이욕존), 歸依僧衆中尊(귀의승중중존)”라 하여 한문게송을 사용했다.
작곡가는 불법승 삼보의 개념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승중(僧衆)을 ‘스님들’이라고 번역하였다. 더구나 한문에 없는 ‘거룩한’이라는 명칭까지 붙여 모든 스님을 모두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뒤틀리게 된 요인은 작곡가에게 있다. 그러나 이를 보급한 종단에 더 큰 책임이 있다. 비구와 대처승간 정화과정에서 땅에 떨어진 불교와 스님들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거룩한 스님들’이라 한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 더 이상 비구-대처승간의 정화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스님들의 위상도 높아지고 권위도 높아졌다. 이제 제자리로 돌려 놓아야 한다. 한국불교 개혁의 첫걸음은 승보개념 정립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임금님귀는 당나귀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 할 수 없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핵심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핵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Dhp10)
핵심인 것을 핵심이라 여기고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올바른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바로 핵심적인 것에 도달한다. (Dhp11)
2016-07-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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