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보시와 공양은 어떻게 다를까? 그 말이 그 말 같다. 먼저 보시하면 떠 오르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다. 가진 자의 입장에서 나누고 베풀고 주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걸인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나 걸사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보시하는 것이다. 심지에 개나 고양이 같은 축생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도 보시에 해당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물질적 보시와 정신적 보시이다.
물질적 보시란 아미사다나(āmisadāna)를 말하고 정신적 보시란 담마다나(dhammadāna)를 말한다. 아미사다나는 먹을 것이나 숙소 등 사대필수품과 관계된 것을 말한다. 담마다나는 가르침과 관계된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법보시가 훨씬 더 수승하다고 했다. 금강경의 사구게 하나라도 들려 준다면 그 공덕은 무량하다고 했다. 초기경전에서도 법보시를 강조하고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보시의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보시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정신적 보시가 더 수승하다.”(A2.144) 라 했다.
보시는 주는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보시를 뜻하는 다나(dāna)라는 말은 자선(almsgiving), 인색하지 않음(liberality), 제공(offering)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보시는 공덕이 되는 행위이고, 모범이 되는 행위이고, 정신수행을 위한 행위에 해당된다.
보시라는 말과 함께 자주 사용되는 말이 공양(puja)이다. 공양을 뜻하는 뿌자는 존경(respect), 예배(worship respect), 헌공(devotional offerings)의 뜻이다. 보시가 주로 물질적인 것으로 설명된 것에 비하여 공양은 가르침과 관련된 정신적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공양을 뜻하는 뿌자의 뜻에는 수행승에게 네 가지 필수품을 제공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양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가장 먼저 부처님에게 예배하는 불공(佛供: buddhapūjā)을 들 수 있다. 요즘은 절에 ‘기도하러 간다’고 하지만 이전에는 ‘불공드리러 간다’고 했다. 부처님을 예배하는 행위가 공양하는 것이므로 ‘불공드린다’가 정서상 맞을 듯 하다.
존경하는 사람을 모시는 것도 공양이라 한다. 이는 “존경할 만한 님을 공경하니(pūjā ca pūjaneyyānaṃ)”(stn259)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네 가지 필수품 등 공양받을 가치가 있는 자를 말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용어라서 절에서 밥먹는 행위도 공양이라 한다.
수행자에게 보시하면 엄청난 과보를 가져 온다고 했다. 개나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어도 과보가 기대되는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수행자에게 보시하면 일반사람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 자에게 보시하면 더 큰 과보를 받을 것이라 한다.
보시받을 만한 사람, 존경받을 만한 사람, 대접 받을 만한 사람에게 공양하면 커다란 과보를 받는다. 그런데 수행자나 성자나 깨달은 자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 더 큰 공덕이 있다. 그것은 삼보에 귀의 하는 것이다. 사방승가에 승원을 세워 보시하는 것이 가장 큰 보시에 해당되지만 불자가 되는 것만 못하다. 삼보에 귀의 하는 것 보다 더 큰 공덕은 오계를 지키는 것이다.
오계지키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에 따르면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A9.20) 이라 했다. 오계를 지키는 것을 너머 뭇삶들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내었을 때 어마어마한 공덕을 쌓게 될 것이라 했다. 최종적으로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자각을 닦는다면” (A9.20) 이라 했다. 수행자로서 삶을 살아 가는 것이 승원을 지어 보시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수승함을 말한다.
수행자로서의 삶이 가장 수승하다. 기녀 암바빨리가 부처님과 승가를 위해서 승원을 보시했지만 단 한순간의 자애의 마음을 내거나 단 한순간 무상을 체험한 것에 미치지 못한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삶임을 말한다. 그래서 물질적 보시보다 정신적 보시가 더 수승하다고 했다. 이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에서도 확인 된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러한 것으로 여래가 존경받고 존중받고 경배받고 예경받고 숭배받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여, 수행자나 수행녀나 남녀 재가신자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한다면, 그것이 최상의 공양으로 여래를 존경하고 존중하고 경배하고 예경하고 숭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그대들은 ‘우리는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고, 원리에 따라 행하리라.’라고 배워야 한다.” (D16)
부처님이 말씀 하신 최상의 공양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불공을 드린다고 하여 향이나 초, 꽃 등을 공양하며 예배하지만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승원을 세워 사방승가에 보시 하지만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지키는 삶에 미치지 못한다. 가장 수승한 보시가 법보시라 했다. 그런데 법보시 보다 더 수승한 최상의 보시가 있다. 이를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는 ‘최상의 공양(paramāya pūjāya)’이라 했다. 수행자가 되어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고 올바로 실천’하는 삶을 말한다.
불자들은 절에 가면 불공을 드린다. 부처님을 생각하며 부처님 그 분을 닮고자 한다. 부처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시물을 바치는 것과는 다르다. 무언가 대가를 바란다면 기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 그분을 예경하고 공경한다면 불공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경배하거나 예경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일반적 공양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 그 분을 닮는 것이 최상의 공양이다. 그것은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든가,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자각을 닦았을 때 승원을 세워 사방승가에 보시하는 것 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승한 것이라 했다.
2016-07-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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