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스님 우월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7. 10:36

 

스님 우월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스님의 어원에 대하여

 

스님의 어원에 대하여 말이 많다. 스님은 승님에서 받침이 탈락하여 님이 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스승님에서 가운데 글자가 탈락하여 스님이 되었다는 설, 그리고 중국에서 승을 로 발음하기 때문에 스님이 되었다는 설 등 매우 다양하다. 분명한 사실은 스님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존칭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인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를 갖추어 존경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일반사람들을 호칭할 때도 라는 말 대신 자를 붙여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스님이라는 말은 스님이라는 말 자체에 님자가 붙어 있어서 사실상 모든 스님은 자동적으로 존경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계행이 엉망인 자에게 스님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는 망설여진다.

 

이름과 성은 시설된 것

 

계행이 엉망인 자도 스님은 스님이다. 이럴 경우 승려라는 표현도 할 수 있다. 대게 안보는 데서는 중, 또는 땡중, 심하면 중놈이라 한다. 중이라는 말이 스님들 사이에서 낮추어 부르는 일종의 겸양어이긴 하지만 재가불자들을 포함하여 일반인들이 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대단히 모욕감을 느끼는 것 같다.

 

 

Samaññā hesā lokasmi

nāmagotta pakappita-
Sammucc
ā samudāgata

tattha tattha pakappita-

 

세상의 이름이나 성은

시설에 지나지 않으니,

그 때마다 통하는 명칭으로 생겨나

여기 저기 시설되는 것입니다.”(stn648)

 

 

저 창밖에 있는 관악산은 누군가 관악산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관악산이라 부른다. 이름 없는 계곡을 우리계곡이라 칭했을 때 많이 불려지면 계곡이름이 되는 것이다. 모양과 형태 등을 감안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름은 시설된 것이라 했다. 여기서 시설이라는 말은 빠알리어 pakappita’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영어로 ‘considered; designed; arranged’의 뜻이다. 분별하고 정열된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행위에 의해

 

스님을 스님이라 하지 않고 승려라 할 수도 있고 출가자라 할 수도 있다. 때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박을 일삼는 스님이라면 도박승이라 부를 수 있다. 권력 프레임에 갇혀 있는 스님이라면 권승이 된다. 노래를 잘 하는 스님이라면 가수스님, 그림을 잘 그리는 스님은 화가스님, 요리를 잘하는 스님이라면 요리스님이라 부를 수 있다. 오로지 수행을 열심히 하는 스님에 대해서는 수행승이라 부를 수 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여 구별 짓는 것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따라 갖가지 명칭이 부여된다. 이는 부처님이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고, 행위로 인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로 인해 고용인이 됩니다.”(stn662) 라고 했는데, 이는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에 존재 하고 사람들 역시 행위로 인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행위로 널리 알려져 있다면 블로거또는 파워블로거라 한다. 그러나 집에 가면 가장으로서 역할을 한다면 아빠또는 아버지로 불리운다. 일인사업자라면 사장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명칭을 갖는 것은 전적으로 행위와 하는 일에 따른 것이다. 스님들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스님이라는 칭호를 붙여 줄 수 없을 때

 

스님들을 구별할 때 법명 뿐만 아니라 하는 일에 따라 하는 행위에 따라 명칭이 부여된다. 그 명칭은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 부정적인 것 일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스님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지만 또는 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스님사이에 낮추어 부르는 명칭에 대하여 일반재가불자들이 사용하면 큰 실례가 된다는 사실이다. 설령 권력승이든 도박승이든 승자가 붙으면 모두 스님으로 불러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도박을 일삼는 스님도 언젠가 잘못을 참회하고 초심으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스님이라는 칭호를 붙여 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것은 글을 쓸 때나 책을 낼 때에 해당된다.

 

언젠가 블로그에서 마성스님의 글을 보고서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마성스님은 자신의 글에서 전재성박사에 대하여 단지 전재성이라 하여 뒤에 붙는 호칭을 생략했다. 반면 스님에 대해서는 스님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마치 재가불자를 차별하는 듯한 모습을 보고서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스님은 장문의 댓글을 보내 주었다.

 

 

다섯째, 위에서 지적한 존칭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면, 학술 논문에서는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직책이나 직위를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제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종교적인 교주나 성자의 이름까지도 존칭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종교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교주이신 스승을 '부처님'이라고 부르지만, 논문에서는 '붓다' 혹은 '석존'으로만 표기해야 합니다. 다른 종교의 '예수님', '공자님', '마호메트님' 등으로 존칭되지 않습니다. 오직 붓다, 예수, 공자, 소크라테 등으로만 표기합니다.

 

(마성스님의 댓글)

 

 

스님의 글에 따르면 학문적인 글과 비학문적인 글의 글쓰기 원칙이 다른 것이라 한다. 논문과 비논문의 차이를 말한다. 그래서 논문의 경우 여러가지 규칙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 규칙 중의 하나가 ‘존칭’에 대한 것이라 한다.

 

논문에서는 존칭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일지라도 ‘붓다’로 표기 하는 것이 원칙이고, 과거 유명 고승이었다고 할지라도 이름만 표기 한다는 것이다. 원효스님의 경우 그냥 ‘원효’라고 하고, 붓다고사 장로는 ‘붓다고사’라고만 표시 하는 것은 커다란 실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일 경우에 한해서

 

하지만 예외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일 경우라 한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곱째, 다만 현재 종교에 몸담고 있는 살아 있는 종교인일 경우, 세속 사람과 다른 신분의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이름 앞에 표시를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스님일 경우 이름 앞에 Venerable의 약자인 'Ven.'을 표기하고, 목사나 신부일 경우, Reverend의 약자인 'Rev.'를 표기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방 상좌부의 스님들은 이러한 규정에 대해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스님들은 자신의 이름 뒤에 승려 신분인 비구라는 뜻의 Thera(장로)를 삽입하여 고유 명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태국의 스님들은 스님이라는 'Phra'를 삽입하여 자신의 고유 이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를테면 미국 출신의 보디(Bodhi) 스님은 자신의 고유 이름을 'Bhikkhu Bodhi’로 지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미국 출신 스님은 자신의 이름을 'Thanissaro Bhikkhu'로 지었습니다. 이때의 비구는 이름 뒤에 붙이는 존칭인 '스님'이 아닙니다. 이들은 논문에서도 자신이 스님임을 인정해 달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논문에서는 그러한 신분 조차 삭제해 버립니다.

 

(마성스님의 댓글)

 

 

살아 있는 사람중에 종교인이라면 이를 표시하는 명칭을 붙여 준다고 한다. 불교의 경우 Venerable의 약자인 ‘Ven.’을 표기 한다고 한다. Venerable의 뜻은 ‘존경할 만한’이라는 뜻이다. 만일 ‘타닛사로(Thanissaro)’ 비구에 대하여 언급한다면 Ven.Thanissaro라 해야 할 것이다.

 

이의를 제기했는데

 

만일 살아 있는 스님에 대해서는 스님이라는 존칭을 부여했을 때 어떤 문제점이있을까?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글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존경하는 스님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이럴 경우‘큰스님’이라는 말이 떠 올려 지지 않을 수 없다. 스님중에서도 나이가 많고 도력이 높거나 유명한 스님에 대하여 ‘큰스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불교전통마다 존경받는 스님에 대한 호칭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영문으로 된 논문에서는 스님을 지칭할 때 Venerable(Ven.)이라는 호칭을 써야 된다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아예 ‘테라’나 ‘빅쿠’라는 말이 들어간 이름을 쓰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논문에서는 어떻게 호칭해야 할까.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살아 있는 스님에 대하여 법명뒤에 ‘스님’자를 붙여 주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그 외 스님이 아닌 경우 모두 이름만 명기하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직책등을 표기할 경우 세월이 지났을 경우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경우 하나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스님들에 한하여 스님이라는 명칭을 붙여 준다고 하였으나 제행은 무상한 것이라 스님들 역시 무상함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환속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의문을 든다면 박사에 대한 호칭이다. 논문에서 아무개교수라 하였을 때 그가 10년 후에 교수일지 아닐지 알 수 없다.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라 언젠가는 교수자리를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취득한 박사타이틀은 그렇지 않다. 한번 취득한 박사타이틀은 죽을 때 까지 유지 되기 때문이다.

 

매우 드믄 경우이지만 논문 조작등으로 인하여 박사타이틀이 박탈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비구가 환속하는 경우 보다 더 드믄 일이라 보여 진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에 대하여 이름뒤에 ‘아무개박사’라고 호칭 해 주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박사라고 하면 그 분야에서 전문가이고 또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논문에서는 스님 외에 그 어떤 누구도 직함이나 타이틀이 붙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살아 있는 스님에 대해서는 스님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그렇다면 입적한 스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예를 들어 성철스님에 대하여 논문을 썼을 때 성철 스님이 입적하였으므로 논문작성 원칙에 따른다면 ‘성철’이라고 법명만 표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성철스님과 살아 있는 스님을 비교한 논문이 발표된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성철스님은 입적하였으므로 ‘성철’이라고 하고, 현재 살아 있는 스님에 대해서는 ‘OO스님’이라고 표기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스님이나 입적하신 스님 모두에게 ‘스님’자를 붙여 주든가 아니면 모두 삭제해야 한다.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스님이나 비스님에 대한 것 역시 양자택일이 되어야 한다. 모두 직함이나 타이틀을 붙여 주든지 아니면 모두 생략하는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글은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넷상에서 글쓰기를 하다보니, 2012-09-05)

 

 

2012년에 작성한 글이다. 살아 있는 스님에게는 스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고 입적한 스님에 대해서는 법명만 사용하는 것은 모순이라 했다. 그래서 모두 스님이라는 호칭을 떼든지, 아니면 차별없이 모두 스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든지 하는 것이 맞을 것이라 했다.

 

마성스님의 보충설명에 따르면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리고 난 후 마성스님이 댓글을 보내 왔다. 논문에서 산사람에게 스님이라는 존칭을 붙여 주는 것이 부당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논문에서 인명을 언급할 때, 그 논문을 집필할 당시 그 사람이 죽은 사람일 경우, 그 사람의 이름 뒤에 괄호를 쳐서 생몰연대를 삽입합니다. 예를 들면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 PTS)의 창시자인 리스 데이빗를 인용할 때, T. W. Rhys Davids (1843-1922)”로 표기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이름 뒤에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현재 생존 인문이라는 뜻입니다.” 라는 취지의 장문의 댓글을 주었다. 다시 댓글을 준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다.

 

 

종교인의 경우 논문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오직 ‘진리 추구’라는 학문적 본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종교인이든 세속인이든 그러한 구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인일지라도 신분적 구분 없이 고유 이름만 기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영어 논문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8.
그런데 비학술적인 글에서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이라고 표현하다가, 갑자기 논문에서 “자승이 이렇게 말했다.”라고 표기하면 심한 반발과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학술적인 글과 비학술적인 글을 보통사람들은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9.
그래서 그 종교의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논문에서는 ‘스님’이라는 신분을 표기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어로 쓴 국제적인 논문이 아닐 경우에는 관례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문에는 그러한 신분이나 타이틀을 삽입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학계에서는 스님의 존칭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10.
몇 년 전 원효성사추모사업회(단체 명칭은 정확한지 모르겠음)에 개최한 원효스님 학술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논문에서 ‘원효스님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주제를 제기한 원로 교수님은 ‘원효성사(
元曉聖師)’를 젊은 소장학자들의 논문에서 ‘원효’, ‘원효’하는 것이 참으로 못마땅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그 단체에서는 ‘원효성사’로 통일하여 표기하자고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석한 학자들의 반응은 서늘했습니다. 결국 통과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1.
따라서 학술 논문에서는 아무리 그 단체에서 추앙하는 인물일지라도 ‘원효’라는 고유명사 외에는 표기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신라의 뛰어난 의상대사, 자장율사, 원효성사 등 아무리 걸출한 인물이었더라도 학술 논문에서 의상, 자장, 원효로 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12.
한때 국사 교과서에서 ‘고려시대의 중(
) 일연(一然)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었다’는 대목으로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이라는 어감이 좋지 않기 때문에 불교계의 반발을 사게 되었지만, 학문적으로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어로 바꾸어 본다면 “고려시대의 승려였던 일연이 <삼국유사>라는 책을 지었다.” 왜냐하면 교과서는 불교도, 기독교도, 천주교도이든 누구나 읽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 편견이 없는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마성스님 댓글. 2012-09-05)

 

 

마성스님에 따르면 논문에서는 스님이라는 명칭을 생략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불교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사람들도 보기 때문이다. 다만 학술논문이 아닌 종교계 내의 글에서는 스님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박사타이틀을 가진 사람도 이름만 표기 되는 것이고 스님역시 법명만 표기 되는 것이 관례라 했다.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한국불자들은 우리나라 고승들을 존경한다. 원효대사에 대하여 원효라고 이름 부르는 것 자체를 실례로 보는 것이다. 어떤 불자가 성철스님에 대하여 성철이라고 부른다면 큰 실례가 된다. 또 살아 있는 고승에 대하여 법명만 부른다면 역시 실례가 된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블로그 댓글에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진흙속의연꽃님이 지적했듯이 돌아가신 성철스님과 현재 스님의 이름이 동시에 나올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느냐? 고 반문하는데, 그럴 경우 이름만 표기하면 됩니다. 다만 ‘선사(禪師)’라는 것을 꼭 강조해야 할 경우에는 이름 앞에 Zen Master 혹은 Seon Master라는 수식어를 삽입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14.
프랑스의 신부이면서 세계적인 불교학자인 에띠엔 라모트(Etienne Lamotte)의 경우 그를 신부로 표기하는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서양의 학자들은 글을 쓴 사람이 종교인이든 세속인이든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오직 고유명사인 이름만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13.
그래서 저도 앞으로 학술적인 논문에서는 ‘스님’이라는 신분조차 밝히지 않고, 그 스님의 고유한 이름만 표기할 생각입니다. 그러면 스님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승이 이렇게 말했다.”라고 표기하면 심한 반발과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마성스님 댓글. 2012-09-05)

 

 

불교계 내부에서 스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할 수 있어도 학술논문에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된다는 취지의 글이다. 젊은 학자들이 논문을 쓸 때 원효, 의상, 지눌 등의 법명만을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무례하다고 탓할 일이 아니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 달마나 그의 제자 혜가 등 육조에 대하여 법명만 나열한다고 해서 무례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스님이 하면 되고 재가자 하면 안되고

 

스님에 대한 호칭은 여전히 논란 거리이다. 스님 같지 않은 스님에 대해서도 스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스님 같지 않은 스님에 대해서는 이라 하고, 스님 같은 스님에 대해서는 스님이라고 칭하자고 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모호하다. 주관적 판단에 따라 중이 될 수 있고 스님이 될 수 있다. 재가불자의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하여 대체로 스님들은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님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재가자가 스님일에 대하여 관여하는 것 자체를 대단히 불쾌 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스님들은 도박승이나 권력승에 대하여 법명만 이야기한다든가, 또는  중 또는 땡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스님같지 않은 스님에 대하여 스님자를 붙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똑같이 삭발하고 똑같이 승복입어서인지 몰라도 동류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아무리 스님들이 도박을 하고, 스님들이 음주를 하고, 스님들이 개판을 쳐도 스님은 스님이기 때문에 재가자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이 하면 되고 재가자 하면 안된다고 보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인 것 같다. 어느 스님이 총무원이나 종회스님들의 행태에 대하여 괴물이라고 표현해도 문제 삼지 않지만, 재가자가 괴물이라고 표현하면 허물이 된다. 심지어 도박, 음주, 폭행, 음행, 은처 등을 일삼는 스님들에 대하여 지적하면, 비판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기도 한다. 해종언론이라 하여 언론탄압하는 것도 스님우월주의의 소산일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날까? 그것은 스님과 신도는 다르다는 차등 내지 차별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최근 현각스님에 대한 자현스님의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스님과 재가불자사이에는 엄연한 차등이 있음을 말한다.

 

재가자는 출가자를 따라 잡을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면 어떤 차등도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차등이 있다면 과위를 성취하는 것에 따른 차등은 있을 수 있다. 이는 출가자가 가르침을 실천하기에 더 좋은 환경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Sikhī yathā nīlagīvo vihagamo 
Ha
sassa nopeti java kudācana
Eva
gihī nānukaroti bhikkhuno 
Munino vicittassa vanamhi jh
āyatoti.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

 

 

게송에서는 공작새와 백조, 재가자와 수행승을 비교하고 있다. 즉 공작새(Sikhī)는 재가자(gihī)를 비유한 것이고, 백조(hasa)는 수행승(bhikkhu)을 비유한 것이다.

게송을 보면 출가자의 삶이 재가자의 삶과 비교하여 월등하게 유리한 점을 노래한 것이다. 출가하여 공동체생활을 하면 향상이 빠르다고 하였다. 그에 따라 해탈과 열반이라는 출가의 목적도 신속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재가의 삶은 가르침을 실천하기에 여러 가지 제약이 많다. 재가자도 가르침을 실천하면 성자가 될 수 있지만 이제 갓 출가한 사미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게송에 대한 주석을 보면 세존께서 까삘라밧투에 계실 때에 싸끼야 족들 사이에 논쟁이 ‘먼저 진리의 흐름에 든 자는 나중에 든 자 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먼저 흐름에 든 자가 나중에 흐름에 든 수행승에게 예경을 받아야 한다.’라는 논쟁이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탁발하던 어떤 수행승이 듣고 부처님에게 전했는데, 부처님은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른 자라도 재가에 있다면, 출가한 사미에게 예경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면서 재가자가 먼저 흐름에 들었더라도 나중에 흐름에 든 수행승에게 예경할 것을 가르치고, 수행승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 시를 읊었다. “ (Prj.II.276) 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재가의 성자라도 출가한 자에게 예경해야 함을 말한다.

 

재가가자 제 아무리 재산이 많고 명예가 높고 권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번뇌가 소멸된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 재가자가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었더라도 이제 갓 입문한 사미에게 예경해야 하는 이유는 출가자의 성장이 빠르기 때문이다. 재가자는 수다원이 되어 사다함까지는 가능하지만 아나함이 되면 더 이상 재가의 삶을 유지할 수 없어서 출가 해야 한다. 따라서 재가자는 출가자를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게송에서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재가자가 출가자를 존경하는 것은 청정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탁발을 하며 무소유를 실현하는 삶이야말로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재가자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없다. 재가자는 공작새처럼 화려한 삶을 살지만 하늘 높이 날 수 없다. 반면 청종한 삶을 살아 가는 출가자는 마치 백조처럼 하늘 높이 날 수 있다. 공작새가 백조를 따라 잡을 수 없듯이, 재가자는 성장에 있어서 출가자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제아무리 똑똑한 재가자라도 사미에게 예를 갖추어야 하는 이유라 본다.

 

스님우월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재가불자는 이제 갓 입문한 사미에게도 최대한 예를 갖추어 공경한다. 단지 머리깍았고 승복을 입었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복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가불자들은 성자들의 공동체 먹을 것 등을 보시하여 공덕을 쌓는다. 이렇게 본다면 스님과 신도의 관계는 사제와 신자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 공덕을 주고 받는 상호보완적 평등한 관계이지 결코 차등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율장정신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스님들을 존경한다. 그리고 그런 스님들의 호법신장이 되어 보호하는 것이다. 만일 스님들이 계행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면 즉각 바로 잡아 주는 것이 호법신장으로서 역할이다. 그럼에도 재가가가 출가자 하는 일에 관여 한다든가, 스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문제 삼는다면 스님우월주의라 볼 수 있다.

 

한국불교의 가장 큰 병폐중의 하나는 스님우월주의이다. 스님과 신도를 차등화 하고 차별화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하여 신도는 신도답게 살아야함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스님도 스님답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가르침대로 율장정신대로 산다면 스님답게 사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은 낮에 한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 다른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도박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언행일치가 안되는 스님들을 스님으로 불러야 할까? 행위에 따른 것이라면 당연히 도박승으로 불러야 한다. 그럼에도 승가의 문제라 하여 언급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스님이기주의이고 스님우월주의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국불교가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려면 스님우월주의부터 극복되어야 한다. 바로 그 첫 단계는 총무원장직선제의 실현이다. 직선제가 실현되면 승가공동체의 회복과 사부공동체의 실현이 뒤따라야 한다. 스님을 스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스님우월주의에 기반하는 것이다. 무엇 보다 계행이 엉망은 스님을 비판하거나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님우월주의의 극치라 볼 수 있다. 하루 빨리 승가공동체를 복원하고 사부대중공동체를 실현해야 하는 당위성의 근거가 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총무원장직선제 실현이다.

 

 

2016-08-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