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스님 보다 더 수행자다운 재가수행자가 되었을 때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12. 22:29

 

스님 보다 더 수행자다운 재가수행자가 되었을 때

 

 

불교는 개혁되어야 한다.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총무원장 직선제만 성취되면 자동적으로 개혁이 되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지난 1994년 조계종 종권사태가 이를 말해 준다.

 

94년 당시 3선을 꿈꾸던 총무원장을 힘으로 끌어 내렸다. 모두가 불교개혁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도로94년이 되었다. 아니 그때 당시 보다 상황이 더 악화 되었다. 구악이 사라지자 더 강력한 신악이 등장한 것이다. 단지 사람에서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 한국불교는 갈수록 퇴보 하고 있다. 승가에도 황금만능주의에 오염되어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고 각자 도생하는 시대가 되었다. 제도개혁과 의식개혁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 개혁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드 중에 신선조(新選組)가 있었다. 2004년 제작된 NHK49부작인데, 이 드라마에서 기억에 남는 명대사는 “무사보다 더 무사다운 무사가 되기 위하여” 이다.

 

19세기 중반 에도막부 말기 당시 미국의 흑선의 출현으로 인하여 일본열도는 크게 술렁이었다. 이와 같은 격동의 시대는 가문과 신분에 제약을 받던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도 있었다.

 

드라마 신선조의 주인공인 곤도 이사미(近藤勇, 1834-1868)와 히지카타 토시조(土方, 1835-1869)역시 보잘 것 없는 미천한 농민출신들이었다. 무사를 중심으로 한 계급 사회에서 농민출신은 출세할 수 없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실력이 좋아도 가문이 없고, 신분이 보잘 것 없다면 위로 올라 갈 수 없는 구조 이었다. 그렇다면 미천한 신분의 그들이 격동기에 어떻게 출세할 수 있었을 까. 그것은 다름아닌 ‘실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도장에서 실전에 버금 가는 훈련을 한 것이다. 그래서 진검승부에서 살아 남는 것이다.

 

진검승부를 한다면 누군가 한명은 죽어야 할 것이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먼저 베지 못하면 상대방의 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한번의 승부를 위하여 실전에 버금 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가문과 신분이 미천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단 한번의 승부에서 살아 남기 위한 피나는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그들이 정식 무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사도를 지키며 무사보다 더 무사다운 무사가 되기로 다짐을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그 때 당시 최강의 무사조직인 신선조를 창설 할 수 있었다.

 

신선조의 구성원들은 미천한 신분의 농민출신이거나 신분이 낮은 떠돌이 사무라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일단 그 조직에 들어 가면 무사도를 지켜야 했다. 무사도를 지키지 않으면 할복해야 했다. 진검승부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하여야 했다. 검 한자루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것이다. 미천한 신분들의 신선조가 ‘무사보다 더 무사 다운’ 최강의 무사조직이 된 것이다.

 

 

 

 

 

 

한국불교가 개혁하려면 재가불자들이 깨어나야 한다. 불자들은 늘 경전을 함께 하며 수행을 해야 한다. 기도만 하는 불자가 아니라 수행자로서의 불자이어야 한다. 그런 재가수행자를 우빠사까(upāsaka)와 우빠시까(upāsikā)라 부를 수 있다. 사부대중의 일원이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우빠사까(upāsaka)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sitting close by’의 뜻으로 ‘바로 곁에 앉는다’는 뜻이다. 이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믿고 따르는 재가자를 말한다. 이와 같은 재가자에 대하여 청신사(upāsaka)와 청신녀(upāsikā)라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재가불자에 대하여 신도라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신도님”이라 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항상 신도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까? 스님과 신도 이렇게 이원화 된 구조, 때로 갑을 관계처럼 늘 기도만 하고 보시만 하는 불자로 머물러 있어야 할까?

 

한국불교에서 불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도로서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신도는 ‘신도답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스님은 ‘스님답게’라는 말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스님과 신도와 관계는 주종관계 또는 갑과 을의 관계가 성립된다.

 

한국불교에서 법회는 없고 기도만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은 기도만 열심히 한다. 실제로 절에서 스님들도 불자들에게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한다. 이는 보시를 열심히 하라는 말과 같다.

 

한국불교에서는 보시공덕을 강조한다. 이는 육바라밀에서 보시바라밀이라 하여 보시를 강조하는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에게 있어서 수행은 스님들이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기도만 강조하다 보니 교학에 대하여 무지하다. 부처님이 어떤 말을 하였는지 알 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안위, 학업, 사업, 치유에 대한 기도만 한다. 이것이 불교신행의 전부 인줄 안다. 한국불자들은 신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재가불자들은 사부대중의 일원이다. 출가자인 빅쿠와 빅쿠니와 더불어 우빠사까와 우빠시까로서 사부대중을 구성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님과 재가불자가 주종관계 또는 갑을관계가 아님을 뜻한다.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부처님의 제자로서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실천하는데 있어서 동등한 관계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신자들이 많이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신도들이 이것 저것 많이 알아 따진다면 난감해 할 것이다. 그래서 기도만 강조하는지 모른다. 신도들이 무지하면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가 올라 가기 때문일 것이다.

 

불자들은 신도가 되기 보다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 교학으로 이치를 알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수행자가 되었을 때 불교개혁은 이루어진다. 일본 막말 미천한 출신들의 낭사들이 무사보다 더 무사다운 무사가 되었듯이, 재가불자들이 스님 보다 더 수행자다운 재가수행자가 되었을 때 불교개혁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2016-08-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