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뉴스앤조이가 그랬던 것처럼, 비판속에 한국불교는 성장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13. 10:16

 

뉴스앤조이가 그랬던 것처럼, 비판속에 한국불교는 성장한다

 

 

 

 

 

비판적인 글에 대하여 악영향을 우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국경이 없는 인터넷시대에 블로그나 카페, 게시판에 올린 불교비판 글이 누군가에게는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불자라면 문제 없지만 이제 갓 불교에 입문 한 자나 일반 국민은 불교를 혐오하거나 심지어 불교로부터 떠날 수 있음을 걱정하는 것 입니다. 특히 일선 포교에 헌신 하고 있는 분들이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블로그 초창기 때 주로 남의 글을 열심히 퍼 날랐습니다. 2005년 당시 교계신문이라고는 불교신문, 법보신문; 현대불교 등 다섯 손가락도 안되는 적은 숫자였습니다. 주로 법보신문에서 정보를 가져 왔습니다. 오늘날 법보신문은 종단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때문에 불교신문 보다 더한 여당기관지가 되었지만 그때 당시 법보신문은 볼거리로 가득했습니다. 교리에 대하여, 세계불교에 대하여, 교계소식에 대하여 다양한 불교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블로그초창기에 이웃종교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주로 개신교 뉴스앤조이를 많이 보았습니다. 인터넷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뉴스앤조이에서 본 이야기들은 신선했습니다. 무엇보다 개신교 내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타종교인이 보기에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비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비판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개신교개혁에 대한 구체적 칼럼을 접했을 때 이런 비판도 수용할 수 있는 한국교회의 힘을 보았습니다.

 

뉴스앤조이가 일반인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때 불교계에는 비판언론이 없었습니다. 주로 교계뉴스와 인물동정, 교리, 신행 등 요즘 여당지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좋은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다만 게시판에서는 비판적인 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익명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친 글이 많았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댓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스님을 비방하는 글이 많았는데 참으로 의아해 했습니다. 스님은 공경의 대상인데 중이라거나 중놈, 땡중 등으로 표현한 거친 글을 접했을 때 일종의 방어모드에 돌입했습니다. 교계사정과 스님들세계에 대하여 잘 모름에도 반론글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절집 자식인가?”라며 댓글이 달렸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을 이해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처자식이 있는 스님을 겨냥한 말이었습니다.

 

뉴스앤조이는 그때 당시 인기절정이었던 오마이뉴스와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전국민을 대상으로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글을 양산 했다면 뉴스앤조이는 개신교에 대한 비판과 개혁을 요구하는 생기발랄한 글로 가득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와 목사에 대한 모순과 위선, 거짓에 대해 폭로할 때는 비록 타종교인의 입장이긴 하지만 통쾌 했습니다. 그렇다고 개신교를 혐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부비판을 통해서 개신교가 살아 있음을 느꼈습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보고서 바로 이것이 한국교회의 힘임을 느꼈습니다.

 

개신교는 비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종교시장에 탄탄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통계상 교세는 불교와 막상막하이지만 체감하는 교세는 아마 백배 강할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내부적으로 건전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이단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쳐 내기 때문에 어느 교회를 가나 똑같은 말을 하는 것도 내부 비판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목사들이 개판치면 그 즉시에 알려져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자정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서 한국개신교가 살아 있음을 느꼈고 비판을 통해서 더욱 더 강한 종교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일종의 두려움도 느꼈습니다.

 

2005년 당시 한국불교에는 비판이 부재 했습니다. 스님의 허물을 얘기 하면 삼보를 비방하는 것으로 간주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비판적 글 보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건전한 이야기 일색입니다. 밋밋하기 그지 없습니다.

 

한국불교는 개신교와 달리 전혀 문제가 없을까요? 개판치는 목사는 있어도 개판치는 스님은 없을까요? 그럼에도 교계신문에서는 종종 스님들의 범계행위가 오르내립니다. 이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불자로서 부끄럽고 창피함을 느낍니다. 혹시 일반국민들이나 타종교인들이 알았을 때 불교에 치명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부분 교계신문에서는 불교내부의 비리에 대하여 쉬쉬하며 침묵일색인 것 같습니다.

 

한국불교는 좋은 일 보다 좋지 않은 일로 세상에 알려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백양사도박사건이 대표적 입니다. 이 사건이 터졌을 때 교계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올 것이 왔다.” 라고 생각했을 것 입니다. 감추고 은폐하고 싶었던 것들이 하나 둘 세상에 알려졌을 때 불자들은 당혹했습니다. 일반국민들에게 부끄러웠고 타종교인들 보기에 창피했습니다. 그런데 폭로에 앞장선 매체가 개신교의 뉴스앤조이를 표방하는 진보적 교계신문이었다는 사실 입니다. 잘못된 것을 숨기고 감추려 하기 보다 비판하여 바로잡고자 한 것입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종단괴 스님들을 비판하면 해종세력으로 내몰립니다. 현재 두 개의 매체가 해종세력이라 하여 탄압받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뉴스앤조이와 매우 비교됩니다. 비판이 언론의 고유한 사명임에도 스님의 허물을 말해서는 안된다는 대승보살계의 영향인지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 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한국불교는 개신교와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개신교가 비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을 가졌다면 한국불교는 폭로기사 한방에 휘청거릴 정도로 체력이 부실합니다.

 

언제까지나 숨기고 감추고 은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스님들의 범계행위는 물론 교리에 대한 문제점도 밝혀 내야 합니다. 숙명론, 단멸론, 영원론 등 온갖 외도 사상이 난무 하는 곳이 한국불교 입니다. 개신교라면 이단이라 하여 진즉 쳐냈을 것 입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모두 수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스님들이 앞장서서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실을 비판 해야 합니다.

 

비판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비판 없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온통 스님좋은 이야기만 하다 보면 결국 큰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2, 3의 백양사 사건이 계속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비판함으로써 막아야 합니다.

 

비판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비판은 살아 있는 조직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불교가 살아 있음을 세상에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비판한다고 하여 초심불자들의 신심을 떨어뜨린다거나 국민들이 외면 할 것이라 보는 것은 불자들과 국민들을 얕잡아 보는 생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판속에 한국불교는 성장합니다. 뉴스앤조이가 그랬던 것처럼.

 

 

 

2016-08-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