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자의 재가자 비판은 넌센스
출가자와 재가자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재가자중에 출가자가 나오고, 출가자라 하더라도 환속하면 재가자가 됩니다. 재가자는 출가자의 ‘밭’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재가자는 세간에 살고, 출가자는 출세간에 삽니다. 그러다 보니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재가불자도 일반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간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은 늘 출세간적 가치를 지향합니다. 몸은 세간에 있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출가한 ‘심출가자’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몸은 출가했지만 마음은 세간에 있는 ‘신출가자’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신출가심출가자’입니다.
재가는 출가의 밭이기 때문에 신심 있는 자 중에서 출가자가 나옵니다. 반면 출가를 했더라도 마음은 늘 세간에 가 있다면 환속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재가는 출가자의 밭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세간의 재가와 출세간의 출가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재가자는 여법하지 못한 출가자를 보면 비난하고 비방하고 비판 합니다. 이런 현상은 부처님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재가자의 비난이나 비방, 같은 출가자의 비난이나 비방, 일반사람들의 비난이나 비방에 따라 그때그때 계율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를 ‘수범수제’라 합니다. 이를 모아 놓은 것이 방대한 ‘율장’입니다. 최근에 전재성박사가 빠알리율장을 번역하여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율장대품, 율장소품, 율장비구계, 율장비구니계 입니다. 예전에는 출가자들이나 볼 수 있는 비밀문서나 다름 없었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누구나 사서 볼 수 있습니다.
율장에 따르면 재가자나 일반인들이 출가자를 비난하고 비방하고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섯무리의 수행승들이 길게 끄는 가락에 맞추어 노래했다고 했을 때 율장에서는 “사람들은 그들에 대하여 혐책하고 분계하고 비난했다.”라는 정형구가 나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재가자가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하여 혐책하고 분계하고 비난했다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청정한 삶을 살기로 맹세를 한 출가자와 재가자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세간에서 다양한 삶을 살아 가는 무수한 재가불자에 대하여 승가의 잣대를 대서 재가자의 보살행과 실천행이 미흡하다고 해서 성찰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 보여 집니다. 마치 오계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출가자를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묻는 것처럼 보여 집니다.
출가자는 청정한 삶을 살아 갑니다. 반면 재가자는 세상속에서 살아 갑니다.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도 다릅니다. 같은 행위라도 출가자에게는 ‘악작죄’가 되지만 재가자에게는 전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상윳따니까야에 ‘향기도둑의 경’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경에서 하늘사람은 연꽃향기를 맡고 있는 수행자를 나무라고 있습니다. 연꽃향기를 맡는 수행자에 대하여 ‘향기도둑’이라 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지나가다 아름다운 꽃이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냄새 맡는 행위를 도둑질로 본 것입니다. 이에 수행승은 항의 하듯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수행승]
“나는 연꽃을 취하지도 않았고
꺽지도 않았고 떨어져서 향기만 맡았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대는 나를 향기 도둑이라고 하는가?
연 줄기를 잡아 뽑고,
연꽃을 꺽고,
그와 같이 거친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S9:14)
수행자가 항의할 만 합니다. 연줄기를 잡아 뽑아간 것도 아니고 또 연줄기를 꺽어 간것도 아닙니다. 단지 연꽃향기가 좋아 향기를 맡은 것일 뿐인데 향기도둑질이라 한 것에 대하여 억울해 합니다.
수행자는 향기를 맡아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연꽃을 꺽는 등 거친행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향기도둑이라고 말한 이유는 무었일까요? 이에 대하여 하늘사람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합니다.
[하늘사람]
“어떤 사람이 거칠고 흉폭하고,
하녀의 옷처럼 심하게 더럽혀졌다면,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 없지만,
지금은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네.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 (S9:14)
하늘사람은 수행자를 가엾게 여겨 도움을 주고자 한 것입니다. 습관이 반복되다보면 해탈에 방해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일반사람과 달리 청정함을 추구하는 자이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의 거친 행위에 대하여 말하진 않지만 수행자이기 때문에 허물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수행자의 허물은 일반인들 보다 훨씬 더 매우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정한 수행승의 허물에 대하여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네”라 한 것입니다.
청정한 삶의 살기로 한 출가자와 오염된 세상에서 살아 가는 일반재가자의 삶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출가자의 작은 허물은 크게 보이지만 일반재가자의 허물은 문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가자가 술을 마시면 크게 비난 받지만 재가자가 술을 마시면 약간 비난 받을 뿐입니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가자가 출가자를 비난하고 비방하고 비판할 수 있어도 그 역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재가자에 대하여 출가자와 같은 레벨의 실천행과 보살행을 요구하며, 재가자의 출가자에 대한 비판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면 ‘넌센스’라 봅니다.
2016-08-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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