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백년대계

거리의 탁발승이 진짜 스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6. 7. 16. 10:55

 

거리의 탁발승이 진짜 스님?

 

 

종종 안양 중앙시장에 갑니다. 물건을 사기 위해서도 가지만 생생한 삶의 현장을 보기 위해서도 갑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목탁치는 스님을 발견 했습니다. 스님을 행색을 보았을 때 위의(威儀)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나이든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 입니다. 승복을 입었으니 스님은 스님입니다. 더구나 목탁까지 들었으니 누가 보아도 스님 입니다.

 

 

 

 

 

 

 

스님은 목탁을 치며 이곳 저곳 기웃기웃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습니다. 불자로서 보기가 딱합니다.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겉모습은 스님이지만 행색이나 행위는 걸인과 다름 없습니다. 

 

 

 

 

 

 

 

 

조계종에서는 탁발을 금하고 있습니다. 승가의 위의를 손상시킨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 입니다. 그래서인지 거리의 탁발승을 보면 가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만나서 얘기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걸인과 걸사는 다릅니다. 계행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며 청정한 삶을 살아 가면 걸사(bhikkhu)’ 입니다. 그러나 단지 생계를 유지 하기 위한 것이라면 걸인과 다름 없습니다. 이는 어떤 바라문 수행자가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여,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입니다. 우리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S7.20) 라고 물어 본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수행자가 아니네. (S7.20) 라 했습니다. 외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걸식수행자, 즉 빅쿠가 아님을 말합니다. 부처님 당시 수 많은 수행자(사마나)가 있었지만 부처님 교단에 들어와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수행자에 대하여 빅쿠(걸사)라 한 것입니다.

 

초기경전에서는 걸사로서의 삶을 찬탄하는 장면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로히니의 경을 보면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 (Thig.283) 라 되어 있습니다. 이는 금과 은을 받지 않고 오로지 탁발에만 의존하여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사문을 찬탄한 것입니다.

 

걸사인 빅쿠(bhikkhu)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보면 걸인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되어 있습니다. 영문으로 된 것을 번역해 보면 구족계를 받은 부처님의 제자를 빅쿠라 한다. 걸식에 의존하는 승려는 가장 빅쿠다운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빅쿠는 문자적으로 ‘구걸하는 자’를 의미하지만 실제로 구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용히 자선을 바라며 문 바깥에 서 있다. 그들은 보시자가 자발적으로 주는 것에 의지하여 살아 간다.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도 아니고 성직자도 아니다. 그는 생계를 위한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고 천명한다. 다만 자신이 준수하는 계율안에서 살아간다. 그는 자발적 빈곤과 금욕적 생활을 한다. 만일 그가 성스런 삶을 살 자신이 없다면, 그는 언제든지 가사를 버릴 수 있다.”라 되어 있습니다. 걸사는 스스로 선택한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걸사로서의 삶은 일반사람들의 삶과는 다릅니다. 머리를 깍고 분소의를 걸치고 걸식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얘기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세상에는 ‘손에 발우나 들고다녀라!’라고 하는 저주가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아들들은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 그러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결코 왕이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강도가 강요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빚을 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 떨어졌다. 괴로움에 떨어져 괴로움에 둘러싸여 있다. 적어도 괴로움의 다발들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S22.80)

 

 

탁발, 즉 빌어 먹는 것은 삶의 끝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저주라 했습니다. 왜 삶의 끝이고 저주일까요? 주석에 따르면 삶의 끝은 가장 낮은 위치를 말합니다. 하찮고 형편 없고 나쁜 것입니다. 더구나 저주라 했습니다. 이는 부처님당시 사람들이 그들의 적을 공격할 때  “중옷이나 입고, 그릇을 들고 밥이나 빌러 다녀라!”라고 분노의 말을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시장통에서 목탁을 치며 돌아 다니는 스님이 걸인인지 걸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목좋은 사찰을 차지하고 나라돈 지원금으로 호의호식하며 사는 권승들 보다는 낫다는 겁니다.

 

목살에 풍채 좋은 체구의 권승은 탁발하지 않아도 생계가 보장 되어 있습니다. 왜소한 체구의 탁발스님은 생계가 보장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거리에 나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름기 흐르고 탐욕이 덕지덕지 붙은 듯한 권승들 보다 차라리 불쌍해 보이는 거리의 탁발승이 더 나아 보입니다.

 

글을 쓸 때 스님들을 언급할 때 매우 조심 합니다. 오해 받을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일부 탐욕스런 스님에 대하여 권승이라고 표현 합니다. 모든 스님이 권승이 아님을 말 합니다. 그럼에도 권승도 스님 입니다. 권승도 스님이기 때문에 스님을 언급한 것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율장을 보면 재가불자 또는 일반인 또는 출가자의 비난과 분개와 혐책이 있습니다. 출가자로서 비난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을 때 입니다. 이런 적극적 비난이 있었기에 율장이 성립되었습니다. 수범수제 입니다. 비난 하고자 하는 것은 탐욕스런 권승입니다.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이에 따르면 2백여명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득권 프레임에 갇혀 있는 스님들은 모두 권승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삼귀의문에서 승보에 대하여 거룩한 스님들이라 주장하는 것도 일종의 기득권 논리입니다.

 

대부분 스님들이 삼귀의문의 거룩한 스님들이라는 문구를 포기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교문제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이라는 말이 승가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자의적으로 또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스님들 스스로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권위는 강요한다고 해서 문자로 규정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존경받을 만한 행위를 했을 때 존경합니다. 삼귀의문에서 스님들을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이를 고수하는 것은 기득권프레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득권프레임에 갇혀 있으면 권승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스님들이 기득권 프레임에 갇혀 있으면 스님과 신도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짓고자 합니다. 그래서 한글삼귀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를 고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출가자나 재가자나 모두 귀의의 대상은 여법한 승가입니다. 이런 사실을 부정하며 기득권 프레임에 갇혀 산다면 설령 종단권력이 바뀌어도 그 밥에 그 나물이 될 것입니다.

 

중앙시장에서 본 탁발승은 위의도 없고 불쌍해 보여서 사실상 걸인과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득권프레임에 갇혀 있는 스님들을 생각한다면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승가의 위의에 어긋난다 하여 아무리 탁발을 금해도, 설령 위의에 어긋나 보여도 기득권 프레임에 갇혀 있는 스님들 보다 더 나아 보입니다. 어쩌면 거리의 탁발승이 진짜 스님처럼 보입니다.

 

 

2016-07-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