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식욕과 성욕으로 살았을 때
가르침의 바다에서
가르침의 바다는 그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 번역되어 있는 빠알리니까야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28권에 달합니다. 금액으로 따지면 백만원 가량 됩니다. 논장을 제외한 경장과 율장의 가르침의 바다에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2500년 전 부처님과 매일 대화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보고 느낀 점을 매일 글로서 표현하고 있는데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글을 쓸 때 마다 매번 새롭게 다가 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법문이라 합니다. 방대한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무엇일까요? 대승불교권에서는 마음 ‘심(心)’자 하나로 통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로 가르침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사띠(sati)’라고 합니다. 주로 수행처에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 이순간을 늘 알아차리라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라 합니다. 사띠의 범주에 들어 간다고 법니다. 그런데 글을 쓰는 입장에서 가르침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청정 (suddhi)’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불교의 목적이 해탈을 추구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 대한 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청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청정이라는 말에는 수행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청정한 삶이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난 다음 전법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것이 맞는지 먼저 실험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 간 것이 함께 수행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였습니다. 부처님은 차례로 가르침을 설하고 마지막으로 무아의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무아의 특징경이라 이름 붙여 있는 경에 따르면 다섯 명의 비구들은 차례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할 일을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선언했습니다. 아라한선언입니다. 더 이상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는 경지를 말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입증 된 것입니다. 아라한선언에서 보듯이 불교수행은 청정에 있다고 봅니다.
청정한 삶을 빠알리어로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 합니다. 전재성님은 ‘청정한 삶’ 또는 ‘순결한 삶’으로 번역했고, 초불연에서는 ‘청정범행’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 청정한 삶은 어떻게 묘사 되어 있을까요?
청정한 삶은 팔정도를 실천하는 삶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팔정도에서 ‘정업’에 대한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팔정도 정업을 보면 “1)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고,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3)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행위라고 한다.”(S45.8) 라 했습니다. 여기서 세 번째 “순결하지 못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abrahmacariyā veramaṇī)”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빠알리어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ā)’가 순결한 삶 또는 청정한 삶 또는 청정범행을 의미합니다. 청정한 삶은 출가자와 재가자에게 다르게 적용됩니다. 출가자에게는 성적교섭의 금지에 대한 것이지만 재가자들에게는 불사음에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자에게 있어서 청정한 삶은 성적교섭을 하지 않는 삶이나 다름 없습니다.
식욕과 성욕
불교의 목적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입니다. 그것도 현생에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열반은 죽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 몸과 마음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실현 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버리는 삶을 살아 가야 합니다. 감각의 문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가니까야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을 보면 “청정한 삶을 추구하고 계행을 구족하고 감관의 문을 수호하고 식사의 알맞은 분량을 알아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어 만족하게 지냅니다.”(D2) 라 했습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삶입니다. 물론 출가수행자에 해당된 것이긴 하지만 재가자도 출가수행자가 될 수 있으므로 출재가 할 것 없이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감각의 대문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핵심은 식욕과 성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에 대하여 초기경전 도처에서 절제 해야 된다고 말씀 했습니다. 그런데 식욕과 식욕은 인간의 근본 욕구임에도 성격이 다릅니다. 부처님은 식욕에 대하여 음식의 적당량을 알라고 하여 음식절제를 이야기 했지만 성욕에 따른 성적교섭은 금했습니다. 그것은 청정한 삶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오감으로 먹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단순히 미각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행위 자체가 오감이 총동원 되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술도 오감으로 먹습니다. 음식절제에 음주도 해당됩니다. 그런데 맛을 즐기면 결국 욕망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욕망으로 산다는 것은 탐욕으로 사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불교수행과 역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식을 즐기지 말고 단지 신체가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적당량만 먹을 것을 말씀 했습니다.
성적교섭 역시 오감으로 경험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단지 신체적 접촉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 코, 혀 등 온갖 감각기관이 총동원 됩니다. 더구나 성적교섭은 음식먹는 것과 달리 상대방이 있어야 합니다. 성적교섭은 혼자서가 아닌 상대방이 있어야 이루질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욕망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적교섭은 결국 욕망을 극대화 하기 때문에 탐욕을 소멸하는 삶과 역행하는 것이 됩니다.
성적교섭금지
사람들은 대부분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식욕과 성욕은 다름 아닌 욕망으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이는 탐욕의 삶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과 달리 역류도를 추구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키는 삶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살아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식절제와 성적교섭금지에 대한 이야기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보입니다. 그 중에서 출가자의 성적교섭에 대해서는 승단추방이라는 엄한 죄로 다스렸습니다.
초기경전에서 성적교섭에 대한 것이 종종 보입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든지 성적교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재가자의 경우 자신의 아내 이외에는 사음을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보는 청정한 삶으로서 성적교섭금지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성자의 삶을 사는 자는
여기에 앞으로나 뒤로나
이러한 재난이 있음을 알아,
굳게 홀로 유행하는 삶을 지키고
성적 교섭을 일삼지 말아야 합니다.” (stn821)
“멧떼이야여,
성적교섭에 팀닉하는 자는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잘못 실천합니다.
그의 안에 있는 탐닉은 천한 것입니다.” (stn815)
“여태까지는 홀로 살다가
나중에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수레가 길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속한 자라 부릅니다.” (stn816)
“지금껏 그가 가졌던
명예와 명성을 다 잃게 됩니다.
이 일을 보고 성적 교섭을
끊도록 공부해야 합니다.” (stn817)
부처님은 출가자가 성적교섭에 탐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습니다.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적교섭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욕망을 내려 놓는 것과 같습니다. 탐욕을 소멸시키는 삶에 있어서 성적욕망은 장애요소로 보기 때문입니다.
식욕과 성욕은 욕망을 부추기는 삶
식욕과 성욕, 이 두 가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식욕은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본능적 욕구이고, 성욕은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본능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달리 적용하여 말씀 했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식욕과 관련하여 음식절제를 말씀 하셨지만, 자손번식 의무가 없는 수행자에게는 성욕과 관련하여 성적교섭을 금지 했습니다.
식욕과 성욕은 모두 욕망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욕망으로 사는 세상사람들에게나 통용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가는 수행자에게는 장애가 됩니다. 특히 출가수행자에게는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히려 맹독을 지닌 독사뱀의 아가리에 그대의 성기를 집어넣을 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집어넣지 말라.” (쑤딘나의 이야기, 승단추방죄법 제1조, 율장비구계) 라고 말씀 하실 정도였습니다.
순결한 삶 또는 청정한 삶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는 출가수행자뿐만 아니라 재가수행자에게도 해당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재가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팔정도의 정업에 대한 것 역시 차별 없습니다. 다만 출가수행자에게 있어서 브라흐마짜리야는 혼자 살기 때문에 성적교섭을 금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재가수행자에게 있어서 브라흐마짜리야는 자신의 아내 이외 다른 여인과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생을 식욕과 성욕으로 살았을 때
누구나 식욕과 성욕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식욕과 성욕은 욕망으로 살아 가는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식욕과 성욕을 극대화 하면 할수록 점점 동시에 욕망이 극대화 됩니다. 이는 다름 아닌 탐욕의 삶입니다. 그런데 탐욕은 해로운 마음으로서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점점 악업만 늘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일생을 식욕과 성욕으로 살았을 때 그 업은 매우 무거울 것입니다. 업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아래로 끌어 당기는 요인으로 작용하여 악처로 떨어질 것이라 했습니다. 반면 음식절제를 하고 삿된음행을 하지 않는 청정한 삶을 살아간다면 업이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위로 오르려 할 것이기 때문에 선처에 날 것이라 합니다.
식욕과 성욕에 따라 본능대로 살다 보면 결국 악처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욕과 분노로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음식절제를 이야기 했고, 삿된 음행은 갈애만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청정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식욕과 성욕은 반드시 정복되어야 합니다.
2016-08-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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