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나는 살아 있는 한 진실을 말하리라”거짓말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24. 14:41

 

 

나는 살아 있는 한 진실을 말하리라거짓말에 대하여

 

 

 

 

직원이 몇 명 되냐고

 

사람들은 거짓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람들은 대부분 거짓말을 하며 산다. 어떤 이는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 그것이 선의의 거짓말이든 악의찬 거짓말이든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 거짓말일 뿐이다.

 

거짓말을 종종할 때가 있다. 혼자 일하다 보니 가끔 직원이 몇 명 되느냐고 문의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직원이 많으면 회사가 큰 것이고, 큰 회사이면 믿을 만하기 때문이라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하고 있는 일의 성격상 직원을 많이 두고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나홀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일인사업자도 다수이다.

 

일인사업자에게 직원이 몇 명이 되느냐는 전화를 받았을 때 처음에는 혼자 일한다고 정직하게 대답했었다. 그랬더니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이었다몇 번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생각을 바꾸었다. 문의 전화가 오면 두 명 내지 세 명이라 말하리라 한 것이다. 마침내 문의 전화가 왔을 때 두 명 또는 세 명이서 일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이 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해서 부풀려 말해도 연락이 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나홀로 있음에도 두 세 명이서 있다고 한 것에 대하여 크게 게으치 않았다. 아예 없는 것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사기에 해당되지만 조금 있는 것에 대하여 부풀려 말하는 것은 장사나 사업하는 사람들에게게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장사꾼이 이 물건 밑지고 팔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얀거짓말이라 하는데

 

일상에서 수 없는 거짓말을 목격한다. 학생이 지각했을 때 교통이 막혀서 늦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 거짓말이다. 술을 밤새도록 마신 직장인이 다음날 지각했을 때 역시 교통체증을 핑계대며 거짓말 하기도 한다. 이런 거짓말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대로 믿을 수도 있고 알면서도 속아 줄 수도 있다. 어머니가 아이를 달랠 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친구나 연인에게 약속시간 늦은 것에 대한 변명을 할 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치럼 악의가 없는 선의의 거짓말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얀거짓말이라 한다.

 

거짓말은 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법화경을 보면 화택의 비유(火宅喩)’가 있다. 억만장자의 집에 불이 났는데 아이들이 불난줄도 모르고 장남감에 눈이 팔려 있다. 장자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거짓말을 했다. 장자는 너희들이 항상 원하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라.”라고 소리친 것이다. 이 말에 솔깃하여 아이들은 불구덩이 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이들은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고 항의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약속한 약속한 양, 사슴, 소가 끄는 수레 보다 더 크고 화려한 백우의 수레를 전부 나누어 주었다. 이에 아이들이 만족했다는 것이 화택유이다.

 

화택유를 보면 장자가 거짓말 한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법화경에서는 이를 거짓말이라기 보다 방편으로 설명한다. 법화경에서는 성문, 연각, 보살에 대하여 ‘삼승’이라 하여 이를 양, 사슴, 소가 끄는 수레로 비유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승이라 하여 흰소가 끄는 수레로 비유했다. 화택에 빠져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방편으로서 삼승을 설한 것이고, 사실은 일승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삼승은 방편이고 일불승만이 진실이 된다.

 

일반적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의 설명이라 한다. 근기가 다양한 사람들을 위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다 보니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때로 속임수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리를 알려 주기 위한 방법이라 본다면 방편도 일종의 하얀거짓말이 될 수 있다.

 

수행자는 있는 그대로 말할 뿐

 

사람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왜 그럴까?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깨닫지 못한 자의 모든 말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금강경에서 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狂語者 不異語者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깨달은 자는 진실만을 말하며 있는 그대로 말함을 의미한다. 이는 일반사람들이 하는 말과 성자들이 하는 말이 다름을 말한다.

 

일반사람들은 탐진치로 살아간다. 그러나 수행자들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 간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역류도를 추구한다. 말을 함에 있어서도 세상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하지만 수행자들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세상사람들은 구업으로 인하여 어떤 과보를 받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마구 뱉어 내지만, 수행자들은 행위의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말한다. 따라서 수행자에게 있어서 거짓말은 있을 수 없다.

 

수행자는 있는 그대로 말할 뿐이다. 이는 부처님이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Ud1.10) 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하얀거짓말은 있을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선의에 의한 것일지라도, 설령 그것이 방편일지라도 출세간적 관점에서 본다면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욕망과 성냄과 사견으로 살아 가는 사람에게 거짓말은 일상화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도 거짓말하는 것에 속한다. 점심 한끼 사기로 약속했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면 거짓말한 것이다. 남을 속이는 행위도 역시 거짓말이다. 설령 그것이 선의이든 악의이든 거짓말은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주고 만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를 오계로서 엄하게 규정하고 있다.

 

법회에서 왜 오계서약을 하지 않을까?

 

한국불교에서 법회할 때 법회순서가 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은 빠지지 않으나 오계를 독송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 반면 테라와다 예불의식에서는 오계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아마 오계독송여부가 한국불교예불의식과 빠알리예불의식과 가장 큰 차이 중의 하나일 것이다.

 

빠알리예불의식에서는 반드시 빠알리어로 오계준수를 서약하는 독송을 한다. 거짓말과 관련하여 “Musavad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라 하여 거짓말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라 한다. 이외에도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계, 삿된 음행하지 않는 계,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먹지 않는 계에 대하여 서약한다. 그러나 왠일인지 한국불교에서 법회할 때 오계서약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한국불교에서 오계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불자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불자가 되고 오계를 준수함으로써 불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계행을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스님들이 계를 지키지 않아 종종 세간에 대서특필되기도 하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계행을 지키지 않은 스님들에 대한 보도가 나왔을 때 불자로서 사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 모두가 법회의식에서 오계가 빠진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한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한국불교 법회의식에서는 변형된 삼귀의를 낭송하지만 오계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스님들이나 불자들은 오계를 예사로 여기는 것 같다. 오계에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입만 열면 거짓말 한다면 불자로 볼 수 있을까? 변형된 삼귀의와 오계 없는 법회의식을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다.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은?

 

거짓말에 대하여 불교에만 오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십계명을 보면 아홉 번째 항목에 바이블 구절을 근거로 거짓증언을 하지 마라라고 되어 있다. 천주교 역시 여덟 번째 항목에 거짓증언을 하지 마라라고 되어 있다. 마치 법정증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거짓말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라 한다. 어떤 거짓말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거짓말 하는 것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고” (M9) 라고 했다. 또 거짓말 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라 했다. 그래서 거짓말을 버리고, 거짓말을 떠나고, 진실을 말하고, 신뢰할 만하고, 의지할 만하고, 세상을 속이지 않습니다.” (M27) 라 했다.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은 반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된다. 진실만을 말할 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경전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법정에 불려가거나 모임에 나아가거나 친지 가운데 있거나 조합에 참여하거나 왕족 가운데 있거나 증인으로서 질문을 받아, ‘오, 이 사람아,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하라.’라고 하면, 그는 모르면서도 ‘나는 안다.’고 대답하고, 알면서도 ‘나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나는 본다.’고 말하며, 보면서도 ‘나는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을 위하여, 혹은 타인을 위하여, 혹은 뭔가 이득을 위하여 고의로 거짓말을 합니다.” (M41)

 

 

종편방송에서 들은 말이다. 어느 변호사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거짓말을 하는 곳이 법정이라 했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들었으면서도 듣지 않았다 말하고, 알면서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그는 모르면서도 ‘나는 안다.’고 대답하고, 알면서도 ‘나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대화하다 보면 드러나는 거짓말

 

거짓말 하는 자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거짓말을 하는지에 대하여 알아 보는 방법이 있다. 그 사람과 함께 대화 하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은 사람과 함께 대화를 통해 왕래하면서 이와 같이 ‘이 존자는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고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다. 이 존자와 예전에 나눈 대화는 나중에 나눈 대화와 일치 하지 않는다. 이 존자의 대화는 청정하지 못하고, 이 존자는 청정하지 못한 대화를 나눈다.’라고 안다. (A4.192)

 

 

 

 

 

Truth-Lies

 

 

 

이 말의 요지는 ‘거짓말’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한 한말 다르고 저 사람에 대한 한말 다르다면 일관성이 없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하는 것이다. 똑 같은 말을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말한다면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 경에서는 청정하지 못한 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대화하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한입으로 여러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이 한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깨달음사칭에 대하여

 

오계에 불망어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계목이다. 설령 그것이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예외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법정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해서는 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왜 거짓말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보는 것일까? 이는 율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재가자와 달리 출가자에게 있어서 거짓말은 상상도 할 수 없이 큰 것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이냐하면 목이 달아날 정도로 큰 죄를 짓는 것이라 했다.

 

불교에 바라이죄가 있다. 이를 승단추방죄라 한다. 일반적으로 오계를 근간으로한다. 그런데 오계의 순서와 일치 하지 않는다. 오계에서 불음주항목은 승단추방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음주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음주는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불선업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십악행에서도 빠져 있다. 오계를 근간으로 한 승단추방죄의 항목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1)성적교섭, 2)주지 않은 것을 빼앗음, 3)인체의 살해, 4)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 에 대한 것이다. 모두 네 가지 항목이다. 여기서 성적교섭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음행하는 것이 청정한 삶에 가장 방해요소가 되기 떄문이다. 실제로 율장의 2/3  가량은 음행에 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도둑질에 대한 것이고, 이어서 살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것이다.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는 거짓말에 대한 것이다. 율장에서는 깨달음을 사칭하는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출가한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사칭은 대망어죄라 하여 승단추방죄라는 형식으로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경장에서는 볼 수 없고 오로지 율장에만 언급되어 있는 깨달음 사칭,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자, 우리가 재가자들에게 서로서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를 성취한 것에 대해 이와 같이 ‘저 수행승은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세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한번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돌아오지 않는 경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거룩한 경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한 자이고, 저 수행승은 여섯 가지 곧바른 앎을 성취한 자이다.’라고 찬탄을 합시다.

(Uttarimanussadhammasikhapadā-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추방죄법 제4, 율장비구계, 전재성님역)

 

 

기근과 전염병으로 먹을 것을 얻을 수 없게 된 수행승이 한 말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말을 보면 “이와 같이 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보시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한 것에 알 수 있다. 재가자들이 보시하면 탁발음식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안거도 편히 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수행승들은 재가자들에게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를 이야기하였다.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음에도 인간을 뛰어넘는 복전에게 보시를 한 것이다. 그 결과 “그 수행승들은 풍모가 나고 감관이 비대해지고 안색이 좋아지고 피부가 윤택해졌다.”라고 묘사 되어 있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것은 결국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

 

깨달음사칭은 ‘망어’에 해당된다. 그것도 대망어에 해당된다. 목이 달아날 정도로 큰 죄를 짓는 것이 되어 승단추방죄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오늘날 깨달음사칭을 종종 볼 수 있다. 부처님가르침 보다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 그리고 사후세계 위주로 하는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천상과 지옥, 극락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보시를 유도한다면 깨달음 사칭이라 볼 수 있다.

 

깨달은 자만이 깨달은 자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깨닫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 깨달음사칭을 하면 쉽게 넘어간다. 그러나 부처님은 부처님 눈으로 깨달음 사칭하는 자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안거기간중에 깨달음사칭한 비구들에 대하여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은, ‘나는 빈방에서 고독을 즐긴다.’라고 생각할지라도 인간을 뛰어 넘는 것을 사칭하지 말아야 한다. 수행승으로서 악한 욕망을 가지고 탐욕으로 가득차고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지 않는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 즉, 선정이라든지 해탈이든지 삼매이든지 성취이든지 길이든지 경지에 이른 것을 사칭한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고 싸끼야의 아들도 아니다.” (율장대품 제1 Vin.I.97) 라고 말한 것에서알 수 있다.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율장에서는 배를 채우기 위한 목적을 가진 자를 사칭하는 자라 했다. 그러나 오늘날 깨달음을 사칭하는 자들은 교주가 되고자 하는 목적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어느 스님은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를 이야기하며 마치 신흥종교 교주처럼 행세하는 것을 보았다. 법문을 들어보면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 새로운 종단을 만들어 마치 부처님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 가훈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산다. 언제든지 거짓말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번 거짓말을 하면 열 가지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학교 다닐 때 면접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그 때 당시 사촌형이 사람을 하나 소개시켜 주었다. 대기업에서 인사팀장을 담당하고 있는 사촌형 친구이었다. 면접에 대비하여 면접요령을 가르쳐 줄 것이라 했다.

 

면접요령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인사담당 팀장을 찾아 갔다. 그러나 전혀 다른 질문을 했다. 집에 가훈이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사실 집에 가훈이 없었다. 만일 면접장에서 집에 가훈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마 대부분은 잘 보이기 위하여 , 집에 가훈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질문은 틀림 없이 그 가훈내용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볼 것이다. 이럴 때 당황할 것임에 틀림 없다.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물러 설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 내어 근면이니 성실등의 말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면접관은 그렇다면 그 가훈은 누가 만들었나요?”라고 계속 물을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만들었다고 거짓말을 할 것이다.

 

면접관은 면접자에게 가훈이 어떤 연유로 만들어졌는지 물을 수 있다. 대부분 여기서 막히고 만다. 없는 말을 만들어 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거짓말은 들통나게 되어 있다. 이럴 경우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다. 가훈이 없으면 가훈 없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면접자는 이런 솔직한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만일 거짓말하는 자를 뽑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회사에 손해끼칠 자라 생각할 것임에 틀림 없다. 거짓말하는 자는 회사에 있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본다면 정직하게 답변하는 것이 면접에서 요령이라면 요령이다. 사촌형의 친구이자 대기업의 인사담당과장은 이렇게 면접에 대한 교육을 시켜 주었다.

 

나는 살아 있는 한 진실을 말하리라

 

한가지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는 열 가지 거짓말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사기꾼은 사람을 속여 먹기 위해서 여러 가지 거짓말을 준비 한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다 보면 들통나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신뢰를 잃으면 그가 이전에 행한 일도 모두 의심하게 받게 된다. 그 결과 그를 믿을 수 없게 된다. 한번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혀 버리면 설령 그가 진실을 얘기해도 믿지 않는다. 마치 양치기소년의 거짓말 같은 것이다.

 

어떤 이는 신용을 잃은 자에 대하여 걸어 다니는 시체와 같다고 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아무도 알아 주지 않기 때문에 살아 있어도 산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어서 움직이긴 하지만 마치 유령같고 좀비 같은 것이다.  사실상 죽은 자나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정직하게 말하면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믿음을 주게 된다.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석천의 일곱 가지 서원 중의 하나를 보면 나는 살아 있는 한 진실을 말하리라.(Yāvajīva saccavāco assa)”(S11.12) 라고 되어 있다. 이를 바꾸어 보면 나는 살아 있는 한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가 된다. 살아 있는 한 그것이 선의의 거짓말이든, 방편의 거짓말이든 어떤 거짓말이든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2016-08-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