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전에서 왜 차(茶)이야기가 없을까?
불교인들은 차를 즐겨 마십니다. 방문했을 때 내 놓는 것이 차입니다. 차와 차도구를 갖추어 놓고 차를 나누며 대화를 하는 행위에 대하여 차담이라 합니다. 차기에 넘칠 듯이 가득 붓고 또한 찻잔에 넘칠 듯이 가득 부어 차를 대접합니다. 차를 나누며 대화 했을 때 부드럽습니다. 때로 어색한 침묵도 막을 수 있습니다. 차는 나누어서 좋고 감사하게 받아 마셔서 좋습니다. 이렇게 차를 서로 나누고 음미 했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대화합니다. 갖가지 종류의 찻잎에서 우러나오는 맛을 음미하며 차와 차담을 즐기는 것입니다.
차를 접하면서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부처님당시에도 차문화가 있었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차를 마셨다든가 제자들이 차담을 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차를 마셨는지 마시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차를 즐긴다는 것은 일종의 맛에 대한 갈애입니다. 담배를 피는 것처럼,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차를 마시는 것 역시 맛에 대한 갈애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종종 음식절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잠을 많이 자는 것, 음식절제를 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꾸짖는 이야기를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를 가득 채우지 말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적게 하고 탐욕을 일으키지 마십시요.”(stn707) 라든가, “언제나 새김을 확립하고 식사에 분량을 아는 사람은 괴로운 느낌이 적어지고 목숨을 보존하며 더디 늙어가리.” (S3.13) 라 했습니다. 또한 감관을 수호하고 늘 깨어 있는 마음과 음식절제를 동급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먹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탐욕이나 분노로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이는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S35.239) 라는 게송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게송은 사실상 빠알리공양게송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가장 극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는 “맛에 대한 갈애가 생겨나면 아들고기의 대한 비유를 상기하라.”(Thag.445) 라는 내용입니다. 어느 부부가 식량이 떨어지자 “귀한 아들을 죽여서 말린 고기나 꼬챙이에 꿴 고기를 만들어 아들의 고기를 먹으면서 황야를 빠져나갔다.”(S12.63)라는 이야기에서 유래합니다. 음식을 단지 보양이나 즐기기 위해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일까 사리뿟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다섯 입 식사하고,
그리고 물을 마셔라.
자신에 전념하는 수행승이
안온한 삶을 살기에 족하다.”(Thag.983)
테라가타에서 사리뿟따존자가 음식 먹는 것을 시로써 표현 한 것입니다. 불과 네 다섯 번만에 식사가 끝남을 말합니다. 주석에서는 “네다섯 모금, 네다섯 입, 네다섯 주먹, 네다섯 조각을 먹는다는 뜻으로, 맨손바닥에 음식을 퍼 먹는다.”라 되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맛집을 찾아 여러 시간 보내는 것과 비교됩니다. 요즘 하는 말로 “게눈 감추듯”입니다. 음식을 무척 빨리 먹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음식절제와 맛에 대한 갈애의 위험성에 대하여 말씀했습니다.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것에 대한 경계의 말이기도 합니다. 차를 즐겨한다는 것 역시 습관적이고 반복적 행위입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하루일과를 시작하는데 지장이 있듯이 차를 마시지 않으면 몸의 컨디션이 원활하지 않다면 이미 습관화 된 것입니다. 그런데 습관들인다는 것은 일종의 집착으로서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본다면 부처님제자들은 자극성이 있고 중독성이 있는 차나 커피 등의 물질을 마시지 않았음에 틀림 없습니다. 아마 부처님이 지금 여기 계신다면 출가수행자들이 차마시는 것에 대하여 ‘악작(惡作)’이라 했을지도 모릅니다. 악작이란 빠알리어 둑까따(Dukkata)로 영어로는 ‘badly done’입니다. 악작이란 악을 짓는 것으로서 잘못된 행위를 말합니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출가수행자에게 있어서 기호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집착된 행위는 해탈과 열반에 방해되는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잠시 멈추어 하늘 한번 쳐다 보며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 보며 ‘참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욕망이라 합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그 다음 날도 꽃을 보러 가는 행위도 욕망이 개입된 것입니다.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소멸에 목표를 둔 수행자에게 있어서 대상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일으킨다면 해탈의 길과는 멀어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가 중독성 물질, 즉 술, 담배, 커피, 차 등에 집착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재가의 삶을 살아 가는 자에게 있어서 출가수행자처럼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없습니다. 일하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갈애이자 집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많이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발생할 때 중독성 물질을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람과 사람관계에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커피나 차, 심지어 술, 담배 등 중독성 물질이 때로 유효하기도 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수행자들에게는 기호품은 의미가 없습니다. 출가의 삶과 재가의 삶은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출가자가 차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해탈의 길에 장애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맛에 대한 갈애는 결국 집착을 야기하고, 또한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라 하여 연기가 회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해탈의 연유는 무엇인가? 갈애를 떠남이 그 대답일 것이다.”(S12.23) 라 했습니다.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맛에 대한 갈애를 유발하는 기호품은 금기물질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기경전에서는 차나 차담에 대한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2016-09-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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