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표교수는 왜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할까?
가르침에 목말라 있는 불자들에게 한 편의 잘 설해진 법문은 삶을 살아 가는데 있어서 큰 위안을 준다. 그러나 가르침과는 엉뚱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법문을 들으면 불쾌를 야기한다.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은 둘째 치고 사람들을 엉뚱한 길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이중표교수의 강연도 그 중에 하나에 속한다.
유튜브에서 이중표 교수의 강연을 보았다. 최근 맛지마니까야 강연이 올려져 있다. 맛지마니까야정선이라 하여 최근 이중표식 번역본을 출간한 바 있는데, 이 책을 근거로 하여 대중강연한 것을 유튜브에 올려 놓은 것이다. 언제나 느낀 것이지만 현란한 말의 성찬에 그의 입을 바라만 보고 있다 보면 그의 독특한 불교철학에 이끌려 가게 된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면 부처님근본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 하나가 이중표식 트레이드 마크라 볼 수 있는 ‘삼세양중인과’의 부정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여러분들이 확인할 수 있어요 없어요? 이걸 확인하려면 전생으로 가 봐야 되거든. 전생에 정말 식이 명색으로 자라나고..” (이중표교수의 맛지마니까야 3강 정견경2-2, 34:33) 이렇게 말한다.
이중표교수에 따르면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단지 생물학적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누가 눈으로 이런 과정에 대하여 보았는지에 대하여 의문한다. 강연 중간에는 “천당에 가본 사람 있어요?” 라든가 “누가 죽어서 살아 온 사람 있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보지 않고 듣지 않은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설령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했어도 받아 들이지 말라는 식으로 해석된다. 철저하게 검증된 것 아니면 믿지 말라는 것이다. 모두 개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이중표교수의 불교관은 매우 독특하다. 그의 박사논문이 ‘아함의 중도체계’라 하는데 중도의 입장에서 불교를 해석하다 보니 용수의 중론과 유사한 말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공의 입장에서 불교를 해석한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개념화 된 것이라 한다. 십이연기에서 ‘나마루빠(Nama-Rupa)’도 불자들이 알고 있는 ‘정신-물질’이 아니라 ‘이름-형태’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우파니샤드철학을 들어 “명색이라는 개념자체가 물질과 정신이라는 개념이 전혀 아닙니다.”라고 강하게 부정한다. 여기에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마치 첫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 다음 단계가 줄줄이 어긋나는 것과 같다.
이중표교수가 말하는 나마-루빠 개념은 산스크리트어로된 우파니샤드에서 근거한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나마는 이름이고, 루빠는 형태라는 뜻이라 한다. 이에 대하여 “아비담마에서 물질과 정신으로 해석이 되다 보니까 아비담마 불교 논서 이후에 불교계에서 통용되니까 뒤에 사전적 의미로 물질과 정신으로 바뀌게 되요”라 했다. 이 말은 명백히 오류가 있다. 아비담마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여 논리를 전개시킨 논장이다. 그럼에도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본 것에 대하여 부파불교시대에 아비달마 논사에 의하여 왜곡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 한다.” (S12.2)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S12.2)에서 부처님은 12연기의 각 단계마다 정의를 해 놓았다. 정의된 것에 따르면 나마루빠는 정신-물질임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이중표교수는 우파니샤드철학을 들어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형태로 정의하고 있다. 하나의 브라흐만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로 다르게 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예를 들어 벽돌, 기왓장, 흙은 다 같은 흙일 뿐인데 여기에 형태에 따라 이름 붙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이런 논리가 전개 되면 모든 이름 붙여진 것은 개념에 불과하다. 생과 사도 개념된 것이고, 심지어 열반도 개념화 된 것이다. 따라서 내생도 없고 윤회도 없는 것이다.
이중표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다 보면 결국 공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관으로 초기불교를 해석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본래 없다”라는 말을 무수하게 되풀이 한다. 모든 것은 이름과 형태로 개념화 된 것일 뿐 본래 없기 때문에 생과 사도 없고, 내생과 윤회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삼세양중인과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중표교수에게 있어서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윤회는 부정되어야 한다. 윤회를 인정하면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이라 보지 않고 우파니샤드식 이름-형태로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철학에 따르면 이 세상의 근원은 브르흐만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브라흐만이 현현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언가 구별하기 위해 형태에 대하여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런 이름은 단지 개념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금강경에서 “A는 A가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A일 뿐이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중표교수는 “우파니샤드 시대에 쓰였던 우리가 쓰고 있는 개념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철학적으로 성찰한 것입니다.”라 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철학적 성찰이다. 부처님이 우파니샤드의 개념화 된 철학을 부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또 다른 철학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 철학은 종교가 될 수 없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부처님은 철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중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불교교리는 삼세양중인과로 불교를 이해 해 버리면 부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했던 깨달음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불교이름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또 다른 상반된 이론을 낳기 때문에 이론과 이론이 부딪쳐서 밤낮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중표교수의 맛지마니까야 3강 정견경2-2, 34:33)
paticcasamuppada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삼세양중인과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부처님은 삼세양중인과를 말씀 하신적이 없다는 것이다. 후대 부파불교시대에 논사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십이연기에 대하여 삼세양중인과로 설명하지 않으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를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이론 체계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라 보여진다. 자신의 박사논문에서 중도라는 말을 사용하였듯이 중도, 중론, 공사상 등 대승불교 사상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업과 내생,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업과 윤회를 부정해야 삼세양중인과가 성립하기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물질로 보지 않고 이름-형태로 보는 것에서부터 십이연기를 해석하고자 한다.
이중표교수의 강연을 들으면 종교로서 불교는 보이지 않는다. 대승불교의 공사상에서 늘 말하는 “본래 없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생사, 윤회는 단지 개념화 된 것이고 열반 역시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윤회를 부정함으로써 삼세양중인과가 허구이고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삼세양중인과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믿음’이다. 삼세양중인과는 실제가 아니라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한다. 불교를 믿음의 종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중표 교수는 불교를 믿음의 종교로 격하시키고 또한 불교를 철학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이중표교수의 독특한 해석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후박나무님(허정스님)은 자신의 블로그에 2008년 장문으로 작성한 논문‘이중표 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 비판’에서 이렇게 결론내었다.
예전에 아함경을 소승이라고 우리 선배스님들은 굳게 믿어왔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가르쳤듯이 잘못된 정보를 가지면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그렇게 알고 살아야 한다. 1991년도에 내가 [아함의 중도체계]를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의 문제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책들보다 심도 있는 해석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약 2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나는 이 책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동안 선방에 다니느라 책을 멀리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부끄러운 변명에 불과하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나의 불교이해 수준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왜 그동안 전문적으로 불교를 연구한다는 학자들은 이 책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20년 동안 누구도 이 책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암담해지지 않을 수 없다.(이미 누가 비판을 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이라면 다행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띄는 것은 “....으로 생각된다” 말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된다고 하는 부분은 거의가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고 있었고 대부분 잘못 추측되고 있었다. 비교해서는 안 되는 법수들을 비교 하고 나누어서는 안 되는 법수들을 나누고 확대해석하는 시도가 많이 발견 되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가 불교를 공부 할 때 이해 안되는 부분을 해결하려고 혼자서 너무 고민하지 말고 우선 널리 경전을 섭렵하는 것이 더 바른 방법이라고 본다. 나의 경험으로도 그동안 내가 문제시 하는 것은 경전에서 이미 모두 설명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곤 하였다.
그동안 우리는 한문 경전을 가지고 불교공부를 해야만 했었다. 한문 경전은 뜻글자를 해석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종종 자기만의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너무 많다. 이 책에서도 아함경이 다른 뜻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저자의 잘못 이라기 보다는 한문경전을 가지고 불교를 이해할 때 나타나는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행히 요즈음에는 5부 니까야의 중요한 부분이 번역되었다. 니까야를 번역하는 몇몇분들의 수고로움으로 이제는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붓다의 원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불교공부는 개론서를 읽는 것에서 벗어나 니까야 경전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불교 토론도 어떤 학자의 견해냐, 혹은 어떤 학파의 견해냐를 가지고 따지기 보다는 경전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를 가지고 토론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나는 이중표 교수님을 한번도 만나적이 없고 그분에게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그분의 견해를 비판하지만 그분의 치열한 공부자세는 높이 평가한다. 나는 이중표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슬펐다. 나는 이 책이 한문 경전으로만 불교를 이해 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에 생겨났던 어쩔 수없는 시행착오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시대에 그러한 정보를 가지고 공부 했었다면 나도 그러한 시행착오를 겪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후박나무님-현 천장사 주지 허정스님, 이중표 교수의 [불교의 이해와 실천] 비판, 2008-09-23)
이중표 교수의 강연을 들으면 그의 현란한 말솜씨에 넋을 잃을 정도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으면 헛점이 보인다. 초기경전을 그것도 지극히 일부에 대하여 자신의 시각으로 분석하여 자신의 이론체계에 짜 맞추다 보니 여러 가지 무리수를 범하고 있다. 설령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더라도 모두 수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 먼자가 코끼를 만지고 “이것만이 진실이다.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의 가르침을 추종하는 자들 역시 눈 멀기는 마찬가지이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먼 봉사의 뒤를 눈먼 봉사들이 따라 가는 것같다.
이중표교수가 한국불교발전에 일부나마 기여한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사상체계를 위하여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은 사실상 ‘훼불’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런 이중표식 불교는 다름 아닌 철학으로서 불교이다. 이중표교수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부정하고, 불교를 철학으로서의 불교로 주저 앉히고자 하는 것이다.
2016-09-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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