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생각이 다르다 하여
그날이 그날 같은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가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하루입니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상이 변함 없음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똑 같지는 않습니다. 만일 비데오테이프 틀어 놓듯이,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듯이 일상이 반복된다면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일지라도 작은 변화가 있기에 살아 갈 만 합니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입은 끊임 없이 나불거리고 가끔 눈을 깜박 하기 때문에 볼 만합니다. 만일 정지화를 계속 보고 있으라고 한다면 오래 보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 좋은 거라고, 되돌아 보면 판에 박은 듯한 일상이 그래도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파란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거센흐름에 휘말려 들었을 때 평범한 일상을 그리워 하게 됩니다. 양지바른 곳에서 하릴없이 햇볕을 쬐고 있는 듯한 모습이 그래도 좋은 것이라 여깁니다.
일인사업자의 일상은 평범합니다.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좀처럼 변화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같은 장소에서만 거의 십 년 째 있습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주변을 보니 도시의 스카이라인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집을 나서 학의천을 지나 개인적 공간인 사무실에 도착하는 일상은 십 년 가까이 변함 없습니다. 늘어 나는 것은 글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글은 남았습니다. 글이 곧 시간입니다.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렸지만 글이 남았기 때문에 시간을 붙들어 맨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천장사에 가면
평범한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서울행을 택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의도적으로 모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달에 한번 열리는 모임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외 부정기적으로 법회모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요일 천장사에 내려갔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자주 내려 가지는 못하지만 내려 가 보아야 할 것 같아 가게 된 것입니다.
천장사에 가면 늘 그렇듯이 일요법회를 합니다. 아마 한국불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일 것입니다. 대부분 사찰에서 일요법회하는 곳은 드뭅니다. 그것도 초기경전을 강독하며 토론식 법회를 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빠짐 없이 참여하는 고정멤버들이 있었고 새로운 얼굴들도 보였습니다. 등산가다가 한번 들러 본 사람들도 있고 사찰순례계획에 따라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난 다음 일아스님이 편집한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을 교재삼아 토론을 진행 했습니다.
천장사에 작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늘 그날이 그날 같은 절집에서도 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주지연임이 허락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유는 종단에 쓴소리 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 보여집니다. 바른 말을 했을 때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치는 것이 요즘 한국불교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골의 작은 절에서 특별하게 바뀐 것은 없습니다. 일요법회도 그대로 하고 법회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그대로 입니다. 단지 이름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주지에서 전주지로 명칭이 바뀐 것입니다.
법회가 끝나고 점심공양을 했습니다. 11시 30분입니다. 늘 그렇듯이 산중의 점심공양은 매우 소박합니다. 고기는 일체 보이지 않습니다. 밥과 김치, 나물 몇 가지가 전부 입니다. 스님 세 분이 살고 있는데 스님들 역시 특별난 반찬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분의 스님들이 오후불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채식위주의 식단에서 오후불식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염려 됩니다. 그러나 오후불식하는 스님에 따르면 절에서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합니다. 다만 채마밭을 가꾸는 정도 등의 일은 한다고 합니다.
점심공양후 차담을 했습니다. 공양식당 바로 옆에 다실이 있어서 으례히 차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팽주가 될 수 있습니다. 대게 차를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게 됩니다. 이제 차문화에 익숙해졌습니다. 이번에는 팽주가 되어 차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차를 나눈다는 행위 그 자체는 일종의 소통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맹물한잔 놓고 대화할 수도 있지만 찻잔이 비면 채워주는 것 자체가 소통입니다. 그래서 차담을 하면 어떤 이야기든지 할 수 있고 대게 착하고 건전한 이야기들입니다.
차담이 끝난 후 채마밭으로 이동했습니다. 서산시내 아파트단지 옆에 있는 곳입니다. 비구니스님의 신도가 제공한 곳이라 합니다. 마침 열무김치를 담글 수 있는 채소가 다 자라서 함께 다듬기로 한 것입니다. 일요법회팀원들 모두가 함께 모여 채소를 다듬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다듬어진 채소는 공양간으로 보내 아마 김치담그는 재료로 활용될 듯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푸대에 해당되는 채소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작은 사부대중모임
채마밭봉사가 끝난후 당진에 있는 법우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일요법회팀원이기도 한 법우님이 생일잔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역에 사는 비구니 스님 세 분을 합여 네 분의 스님과 일요법회팀원을 합하여 십오륙명이 참석했습니다. 식사모임은 일종의 청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테라와다불교에 따르면 스님들을 초대하여 음식공양을 하는 아름다운 제도가 있습니다. 신도들 대부분 청식을 원하지만 자신에게 순번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초대받은 스님들 중에는 비구니 스님들도 있어서 사부대중이 되었습니다. 작은 사부대중모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부대중이 한자리에 모여서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또 다시 차담이 시작 되었습니다. 넓은 거실에 십오륙명이 빙둘러 앉아 차를 나누며 이야기 했습니다. 이야기 주제는 자연스럽게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것으로 옮겨 갔습니다. 어느 법우님은 울분으로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법우님은 차분하게 냉정하게 대처하자고 했습니다. 한가지 사안을 놓고 생각하는 바가 모두 다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토론에 사부대중 모두가 참여하여 활발에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단에서 마련한 사부대중 백인대중공사 토론하고 다른 것입니다. 눈치 보는 것 없이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 오버하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잘못을 지적해 주기도 합니다.
토론을 하다보면
토론을 하다보면 격해질 수 있습니다. 토론의 규칙을 모르면 감정싸움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잘못을 지적했을 때 이를 받아 들이기 매우 힘듭니다. 아마 잘못알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을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제삼자가 보았을 때 잘못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보는 관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 하늘에 달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달을 쳐다 보면서 참 아름답다고 느낄 것입니다. 반면 어떤 이는 저 달을 쳐다보면서 슬픈 표정을 지을지 모릅니다. 또 어떤 이는 커다란 빵과 같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나의 달을 놓고 사람들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른 것입니다. 달은 하나이지만 천개도 되고 만개도 되는 것은 사람들마다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점이 다르다는 것은 주관이 개입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분별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눈과 귀 등 감각기관으로 형상과 소리 등 감각대상을 접하였을 때 이를 분별하는 의식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다 과거 경험까지 곁들인다면 비교하게 되어 종합판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긴 보되 자신의 방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달을 보아도 어떤 이는 아름답게 보이고, 어떤 이는 슬프게 보이고, 어떤 이는 커다란 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님
토론을 할 때 이견이 생겨난 것은 당연합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견은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같지 않다고 하여 내친다면 편협한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과 틀린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과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적대시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님,
꾸짖어 충고하는 님, 현명한 님,
숨겨진 보물을 일러주는 님을 보라.
이러한 현자와 교류하라.
그러한 사람과 교류하면,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은 없으리.”
(Dhp76)
세상에는 ‘남의 잘못 만을 찾는 자’와 ‘잘못을 그만 두게 하려는 자’ 이렇게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비난과 비방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후자의 경우 충고 내지 비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난과 비판은 다른 것입니다. 비판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하기 때문에 장려 되어야 할 사항이지만, 비방이나 비판은 모욕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제되어야 합니다.
잘못을 하여 잘못을 지적당하였다면 대부분 모욕으로 생각하며 분노의 마음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분노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분노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면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대하여 내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고맙고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잘못 된 것이 있으면 지적해 주고 꾸짖어 충고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용기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꾸짖어야 할 것은 꾸짖어 말하고, 충고해야 할 것은 충고하여 말한다. 견실한 자는 견디어 낼 것이다.(M122)”라 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 하여
언제나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를 회상합니다. 좋았던 것에 대해서는 다시한번 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한번 지나간 것은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지금 손님이 찾아 왔다면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반드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순간이 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기억에 남을 모임이라도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일기일회입니다. 천장사의 모임도 그렇습니다. 사부대중이 모여서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하여 고민하고 토론했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모임이라 생각한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버했을 때 지적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견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달이라도 쳐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개의 달, 만개의 달입니다. 그러나 달 그 자체는 변함 없습니다. 다만 보는 관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상대방의 견해를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하여 내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적용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Ud1.10)
2016-09-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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