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왕성폭포 320미터와 역류도(逆流道)의 삶
종종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감탄할 때가 있다. 눈 앞에 펼쳐진 한폭의 동양화 같은 풍광을 보았을 때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설악산을 처음 찾았을 때 설악동에서 바라 본 자연의 풍광이 그랬다. 사는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낯설고 이국적인 풍광에 매료 되어 한참 쳐다 보았다.
왜 꼭꼭 숨겨놓았나?
오랜 만에 토왕성폭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몇 달 전 뉴스에 따르면 사십여년 만이라 한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왜 꼭꼭 숨겨 두고 있었을까? 요즘 해외여행이 자유로운 시대에 사람들은 중국에 여행가는 것을 마치 국내여행 가듯 한다. 그곳 중국 명산에서 본 풍광은 이제까지 보아 왔던 산하대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설악산이 아무리 빼어난 풍광을 자랑해도 중국명산에 비하면 별빛이 달빛의 십육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정부에서는 자연보호를 명목으로 토왕성폭포를 꼭꼭 숨겨 두었다. 이외 숨겨 놓은 비경은 많다. 마치 선심 쓰듯이 이제서야 공개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족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경우 명산에 잔도를 가설 하여 깊숙한 곳까지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비록 자연이 파괴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사람들에게 경이로운 자연의 풍광을 볼 권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본받을 만하다.
장엄하고 장쾌한
토왕성폭포를 보기 위하여 민박집에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아침도 먹지 않고 6시대에 출발 했으니 너무 이른 것 같다. 설악동으로 향하는 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널널하다. 설악산에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와 보았다. 아마 우리나라 국민치고 설악산 한 두번 오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설악동에서 바라 본 풍광은 익숙하다. 언제 보아도 장엄하고 장쾌해 보인다.
이른 아침 수 많은 사람들이 토왕성폭포길을 향한다. 단체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중간에 억양이 있는 억센 남쪽 지방 사투리로 시끌벅적하다.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흥정하며 파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남쪽 지방 특유의 강렬한 사투리가 마치 물고기가 파닥파닥거리듯이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다.
세심청정(洗心淸淨)
토왕성폭포 가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다.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약 한시간 거리의 길이다. 가는 길에 모두 세 개의 폭포가 있다. 육담폭포, 비룡폭포, 토왕성폭포이다. 이전에는 비룡폭포까지 가능했다.
가장 먼저 육담폭포를 맞았다. 여섯 개의 담소가 있어서 육담이라 했을 것이다. 그 중에는 폭포가 형성된 것도 있다. 시원하게 내리치는 물줄기 소리가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이때 한자용어 ‘세심청정(洗心淸淨)’이라는 말이 떠 오른다. 세찬 물소리가 마음을 깨끗이 씻어 내려 청정하게 해 주는 것 같다.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토왕성폭포 가는 길에 두 번째 폭포와 마주했다. 그것은 비룡폭포이다. 비룡폭포라고 명명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표지판 설명에 따르면 “폭포수 속에 사는 용에게 처녀를 바쳐 하늘로 올려 보냄으로써 심한 가뭄을 면하였다.”고 한다. 높이 16미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보기에도 시원하고 장쾌하다. 이처럼 세차게 내리치는 물줄기와 그 물줄이를 이용하여 승천했다는 전설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연어의 회귀를 연상케 한다. 있는 힘을 다해 거센 물줄기를 타고 솟구치는 연어를 보면 마치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간다는 얘기는 초기경전에서도 보인다. 부처님은 처음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 이렇게 말씀 했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차라리 설하지 말아야지.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하네.”(S6.1)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홀로 명상에 잠겼을 때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S6.1) 라 했다. 진리는 현자들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어렵고 심오하고 미묘해서 설명해 주어도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욕망과 분노로 살아 가기 때문이다.
탐, 진, 치로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미묘한 진리를 이야기 해 보았자 이해도 못하고 입만 아플 뿐이다. 그들이 가만 있으면 다행이다. 대부분 큰 소리로 웃어버리거나 비난하기 쉽상이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가득한 자들에게 진리를 설해 보았자 피곤한 일이고 또한 그들을 귀찮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탐욕과 성냄에 덜 물든 사람들이다. 이들을 위해 부처님은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다. 그런 진리는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마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연어가 있는 힘을 다하여 거센 물살을 역으로 솟구치는 것과 같고, 용이 폭포수를 따라 승천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라 했다. 이런 진리를 ‘역류도(逆流道)’라 한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다 하여 역류도라 한다. 세상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아 갈 때 부처님 제자들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 가는 것이다.
양치하는 것은 참을 수 없어
자연은 경이롭다. 경이로운 자연이 만들어지기 까지 만들어지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런 자연은 후대에 물려 주어야 할 유산이다. 그러나 자연을 접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세상에서 살던 그대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비룡폭포 한편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다. 아침식사를 풍광 좋은 곳에서 해결하는 모양이다. 소주와 막걸리 등 반주를 겸하여 왁자지껄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 단체로 온 관광객들이다.
어떤 이는 계곡물을 이용하여 양치질을 하고 있다. 이를 본 사람이 지적한다. 아마 정의감이 발동해서 일 것이다. 이른 아침 먹거리와 함께 술판을 벌이는 것까지 지적하지 못해도 양치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구백계단의 토왕성폭포를 향하여
목적지 토왕성폭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사십여년 만에 공개 되었다는 토왕성폭포이다. 그렇다고 토왕성폭포 바로 근처 까지 가는 것은 아니다. 멀리서 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이다. 비룡폭포에서 약 삼백미터 올라 가면 된다.
토왕성폭포 전망대 가는 길은 매우 험하다. 삼백미터의 길이 모두 계단으로 되어 있다. 어느 등산객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구백계단이라 한다. 구백계의 계단으로 만 이루어진 길을 오를 때 숨소리는 거칠어 지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오르면 오를수록 주변의 풍광이 드러난다.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에 피로는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에 압도되어 사라져 버린다.
사십여년 숨겨 놓은 비경
구백계단의 끝자락에 이르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마치 숨어 있는 비경이 갑자기 펼쳐지는 듯 하다. 정부에서 사십여년이 숨겨 놓고 있었던 비경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치 중국명산에서 보는 듯한 장엄하고 장쾌한 광경이다. 높이 320미터에 이르는 폭포가 마치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듯 하다.
토왕성폭포는 삼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단 150미터, 중단 80미터, 하단 90미터로 총높이 320미터에 이르는 긴 길이의 폭포이다. 그렇다면 왜 토왕성폭포라고 이름 하였을까?
토왕성폭포라 했을 때 행성 중의 하나인 토왕성을 떠 올리게 한다. 명왕성도 있고 해왕성도 있는데 하필이면 왜 토왕성일까? 설명문에 따르면 지명에 따른다. 고서에 따르면 ‘토왕성부(土王城府)’가 있던 곳에 있어서 토왕성폭포라 한다. 행성의 이름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이런 토왕성 폭포에 대하여 ‘중국 여산보다 낫다’고 한다. 이는 조선시기 김창흡(1653-1722)의 설악일기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토왕성 폭포는 중국명산과 비교하여 그 풍광이 손색없다.
“내 일생동안 이런 풍경은 처음 본다”
토왕성폭포 전망대에는 수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저 멀리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 듯한 장쾌한 모습을 보고 어떤 이는 “내 일생동안 이런 풍경은 처음 본다”라며 감격해 한다. 이런 장면을 오래오래 기억해 두려는 듯 하다. 그러나 전망대에 머무는 시간은 불과 몇 십분에 불과 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광도 마냥 바라 볼 수 없다. 다음 일정을 위하여 자리를 떠나야 한다. 꾸역꾸역 밀려 오는 뒷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길을 터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마치 사진을 찍듯이 장쾌한 풍광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꺼내 볼 것이다.
역류도의 삶을 실현을 위해
토왕성폭포 320미터를 보았을 때 16미터 길이의 비룡폭포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그것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거센 흐름으로 살아 갈 때, 부처님 제자들은 이를 거슬로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 갔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역류도를 추구한 것이다. 토왕성폭포 320미터에서 역류도의 수행자를 연상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2016-10-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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